2011.4 |
신귀백 영화엿보기 - <127시간>
관리자(2011-04-12 16:11:23)
신 귀 백 영화엿보기 - <127시간>
매뉴얼에 없는…
감동
설날 아침 해가 비춰와 창가의 물방울이 눈부시게 빛나는 아침
일본 도치기현에 사시는 1911년 생으로 92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시집『약해지지마』는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시바다 도요라는 할머니가 쓴 시다. 평범한 시구지만 이 시가 아흔 살 넘어 쓴 시라면, 이 짧은 글줄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힘을 가진다. 한 세기를 산 할머니가 거울을 보고 립스틱을 바르고서는‘바람과 햇살이 말을 걸어오는, 틀림없이 아침이 찾아와 해가 비출 거’라는 믿음은 읽는 이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여기 또 다른 감동이 대니 보일의 영화 <127시간>에 있다. 스물여덟 살 난 미국 청년 애론 랠스톤에게도 아침이 찾아온다. 그는 유타주 블루 캐년 협곡 바위틈에서 아침을 맞는다. 오전 8시 반에는 까마귀가 찾아오고 9시 반쯤에는 바위틈으로 한 줄기 햇볕이 찾아와 온몸을 샤워한다. 그러나 애론에게 찾아오는 127시간 그러니까 닷새의 아침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맞는 아침이다. 애론은 암벽과 바위 사이에 묶여있다. 마치 곤충핀에 찔린 나비표본처럼 협곡 바위틈에 팔이 끼어서 말이다. 위기 탈출의 그 어떤 매뉴얼에도 없는 그의 협곡 탈출기는 감동을 준다.
존재의 비루함
결론부터 말하면 애런은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탈출한다. 그것도 자신을 물고 있는 바위에 낀 팔을‘자르고’서 말이다. 스포일러라고? 그렇다. 영화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탈출 장면이 자극적일지 모르지만, 지루할 텐데. 도대체 한 사람(한 배우)이 127시간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견딘 시간을 어떻게 형상화 시키려고 감독은 뻔한 이야기에 뛰어들었을까? 대니 보일에게 돈과 명예를 안긴 것은 <슬럼독 밀리오네어>지만 우리가 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아직도 <트레인스포팅>의 그‘젊음’이다.‘ 인생을 선택하라, 직업을 선택하고 가족을 선택하라, TV와 세탁기도 선택하고 미래를 선택하라. 그런데 내가 왜 이따위 선택을 해야 하지?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는 이완 맥그리거가 보여준 부랑아적 감성으로부터 15년이 흐른 오늘, 대니 보일은 서바이벌이라는 감동을 들고 나왔다. 사실 관객은 애런이 직접 자신의 한쪽 팔을 잘라낸 충격적인 실화를 영화로 담았다는 다큐멘타리적 정보를 다 알고 본다. 공포의 얼굴은 연기력이 관건인데, 어떤 배우가? 극한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보여 준 94분을 혼자 때우는 빛나는 연기를 한 애런 랄스턴 역은 <스파이더맨>시리즈에서 해리 오스본 역을 맡았던 제임스 프랭코가 열연했다. 영국 뉴웨이브의 상징인 대니 보일이 만든 영화답게 초반 분할화면과 광고 영상 같은 도시적 삶으로 시작하는 편집은 <트레인 스포팅>의 속도감을 보여주는데. 애런은 엔지니어다. 그는 금요일 저녁 배낭에 CD와 물을 챙기고 블루 캐년을 향해 빈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컨트리 기타음악. 그리고 사막에 이르러 SUV자동차 안에서 한 숨 자고 토요일 아침, 사막을 자전거로 달린다. 자전거가 엎어질 때, 셀프카메라라니. 협곡에 이르러 자전거는 나무에 묶어두고 이제는 뛴다. 거의 뮤직비디오 스타일의 초반전 익스트림 스포츠 장면은 활기차지만…. 기계를 만지지만 가이드가 꿈인 애런은 블루 캐년에서 두 명의 젊은 여성을 만난다. 여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방진 젊음인 그는 말솜씨도 좋지만 실력으로 협곡 사이 길을 두고 고민하는 여인들을 안내한다. 협곡의 지름길 벽을 훑는 손에 이어 암벽 아래 폭포가 있는 다이빙. 수직의 절벽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멋진 퍼포먼스 뒤에 전인미답(全人未踏)의 풍경이 펼쳐지고 여자들은 뿅 간다. 그러나 이것은 로버트 프루스트의 시 제목‘가지않은 길’을 즐기는 청년의 오만한 자세와 즐거운 시간은 후반부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촉매제다. 협곡의 청년시절에는 솟아오른 욕망과 고뇌가 있고 그 안쪽에는 추락의 유혹이 기다리는 심연이 있으니. 두 여자를 보내고 홀로 암벽 사이를 통과하던 애런은 발을 헛디뎌 협곡 사이 추락하여 몸이 끼이게 된다. 자기 몸보다 더 작은 웬만한 쿠션보다 조금 큰, 바위 사이에 오른 팔이 낀 것. 이것 장난이 아니다. 감독은 고립된 공간 거기서 그 좁은 곳에 카메라를 대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모노드라마인 만큼 과거의 추억과 공포를 다루어야만 90분 이상을 때울 수 있다. 혼자만의 싸움을 붙드는 감독의 카메라는 위에서 뒤에서 앞에서 멀리서 가까이서 치고 빠지면서 관객들의 몰입을 위해 극도의 클로즈업을 통한 고통의 장면 사이 그의 심리변화를 담아낸다. 애런은 침착해지자며 작은 테이블 같은 바위 위에 모든 소지품을 정렬해 놓는다. 로프와 칼, 랜턴, 500㎖의 물 한 통과 캠코더. 애런은 살고 싶은 의지에 칼로 바위를 쪼아보지만 여긴 앙코르와트의 붉은 사암(砂巖)이 아니다. 칼 위로 지나가는 개미 그 개미만도 못한 삶이 끝나고 나면 말라죽어 미라가 되는 것이 그에게 다가올 시간이다. 잠을 자야하고 그리고 꿈을 꾸고. 추위와 허기의 과정 중 간간히 등장하는 하늘을 나는 새, 태양이 만드는 그림자에 이어 아버지와 함께 본 캐년의 추억. 여동생 결혼식 축가 연습이라는 소소한 가족의 걱정에서부터 농구장에서 이별한 여자를 추억한다. “넌 평생이 고독할 거야”라는 저주를 남긴 애인을 생각하노라니 심장은 빨리 뛰는데 추위 속 시간은 참 천천히 간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아니 고통은 영혼을 잠식한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고 멋지게 말할 수 없으니 즐거운 자학이나 아늑한 고립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끝이 나는 국방부 시계가 아니다. 애런은 오전 내 자일로 도르레를 만들어 돌을 옮겨보려 했지만 실패. 그의 얼굴빛은 캐년의 바위 빛깔을 닮아간다. 천둥과 비가 몰아치자 혀를 내밀어 비를 받아먹고 잠깐 기뻐하지만 이건 협곡에서 익사해서 뒈지기 직전, “살고 싶어!”라고 그는 카메라에 대고 외친다.
현애살수
카메라만 있어도 덜 외롭다. 자신을 객관화 시키는 도구를 넘어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가 바로 캠코더다. 난파로 섬에서 현대판 로빈슨 크로소우가 된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는 배구공‘윌슨’과 함께 대화를 하지만 그는 캠코더와 대화를 한다. 그 대화의 끝에‘이 바위는 계속 여기서 날 기다렸던 거’라는 거의 시에 가까운 대사를 남기는데. 모든 인간이 죽어 이름을 남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 옛날 누구는 동굴에 벽화를 남기고 거북이 등껍질에 글을 새겼지만 애런이 배운 언어는 영상이기에 그는 카메라로 유언장을 쓴다. 수직의 절벽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절벽에 썩은 나무가지를 잡고 있다면 차라리 그 손을 놓는 것이 사내다운 일이다. 현애‘철’수가 오독이라고.현애살수장부아(懸崖撤手丈夫兒)! 자연은 살려면 스스로 그 팔을 자르라 명령한다. 젊은이가 갖는 자연에 대한 객기치고는 팔 하나를 요구하는 형벌은 지나치지만, 단칼에 내리치는 것이라면 까짓것 하나쯤 잘라줄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어디 생각처럼 말처럼 그리 쉽나? 자신의 피를 맛본 영화 속 청년은 자일로 지혈대를 삼고 잘 들지도 않는 중국산 칼을 팔에 쑤셔 넣는다. 밥을 먹고 글씨를 쓰고 자전거를 운전하고 여인을 안던 팔을 도끼로 한방에 찍는 것이 아니라 썰고 부러뜨려야 하는 비극이니‘뼈를 깎는 고통’이 수사(修辭)가 아니다. 피범벅의 지독한 클로즈업 그리고 피 묻은 손으로 셔터를 누른다. 그 위 하늘을 날아가는 제트기가 만드는 하늘의 낙서라니. 비극을 살리는 것은 음악이다. 절벽에 매달려 옴짝달싹 못하는데 흘러나오는 음악은 경쾌한 팝‘트라제디’다. 하지만 평면적 캐릭터. 애런은 질서와 효율성을 특별히 사랑하거나 혁명이나 사랑 혹은 마약에 경도되는 사람도 아니다. 단지 살고 싶은 욕망과 결단력이 남달리 강한 사람일뿐. 자신과 자신감을 사랑하는 청년이 자살을 꿈꾸지 않는 것 또한 놀라운 것이지만 캠코더 속 여인의 모습을 보며 자위를 생각하던 것, 있을 수 있다. 엄마 아빠에 대한 후회는 이 이야기가 보통 사람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임을 알리지만, 데니 보일의 영화치고는 간이 덜하다. 인도공동체로 떠난 옛 애인과 시를 읽는 주식 중개인으로 술값을 내는 한 때 시를 쓰던 친구 혹은 포르노를 찍는 그림 그리던 친구가 있었더라면 영화의 결이 조금 더 풍부해졌을까? 매뉴얼 이전 127시간이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다시 밑줄 치며 읽을 수 있는, 앙코르와트를 패키지로 다녀올 수 있는, 단편소설 한 편을 진지하게 써 볼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영화 속‘127시간’은 이런 낭만적이거나 생산적인 시간이 아니라 한 젊은이가 구조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공간 그 어떤 구조 매뉴얼도 없는 곳에서 극한의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다. 오만한 젊은이가 자연 앞에서 겸손한 사람으로 돌아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 일본 지진 상황이 계속 뉴스에 전해진다. 어떤 영화에서 본 것 보다 더한 영화적 풍경들이다. 누가 찍은 캠코더 장면인지 센다이 쓰나미 장면은 미술감독과 컴퓨터 그래픽 장면이 만드는 상상력을 비웃는다. 배가 지붕 위에 있고 쫓아오는 쓰나미를 피해 필사의 질주를 하지만 자동차는 물에 휩쓸려간다. 그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시체로 발견된 사람의 배낭 속 소지품이었으니. 재난 대비 매뉴얼대로 움직였을 그들의 배낭 안쪽에 인감과 앨범과 통장 등이 들어있었다 한다. ‘누구에게나 아침은 반드시 찾아온다’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이다. 애런은 너덜거리는 팔을 감추고 햇빛 속으로 걸어 나간다. 그의 인감일 오른쪽 팔은 바위에 끼워놓았지만 사투의 흔적을 담은 캠코더는 배낭에 넣고서 말이다. 걷는다는 것, 자유스럽게 움직인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살아 돌아온 애런은 팔이 잘린 채로 수영을 하고 여전히 협곡과 산을 간다고. 단, 이제는 늘 행선지를 적은 쪽지를 남기고. 교훈적이다. 부모가 계시면 멀리 나가 놀지 말고, 피치 못하여 멀리 나가게 될 때는 반드시 놀고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야 하느니라. ‘부모재(父母在)어시든 불원유(不遠遊)하며 유필유방(遊必有方)이니라’는 공자님 말씀을 그 고생하고서 깨달았단 말씀인데…. 딸기가 맛있다는 도치기현에서도 여진이 있고 시금치에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한다. 시바다 도요 할머니의 따뜻한 시 한편이 올라오리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