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4 |
꿈꾸는 노년 - 박완서의「친절한 복희씨」속 중풍노인의 수발자
관리자(2011-04-12 16:08:18)
진퇴양난의 위치에 처해있는 수발자의 변덕스러운 심리
- 장미영 전주대 교수
노인 간병은 환자와 수발자 간의 관계에 따라 그 맥락과 의미가 달라진다. 환자가 자녀인지, 배우자인지, 부모인지에 따라 수발자가 느끼는 부담의 정도와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거기에 더해 수발자에 대한 사회적 지지의 양상까지 상호관계에 따라 차이가 크다.
아내 수발자
2006년, 소설가 박완서는 만 75세 때,「 창작과 비평」, 봄 호에 실린 단편소설「친절한 복희씨」에서 늙은 배우자를 간호하는 아내 수발자의 심리를 포착해냈다. 이미 노인의 대열속에 있었던 70대의 작가인지라 박완서가 그리는 노인 문제는 우선 독자의 신뢰 속에서 묵직한 공감을 얻었다.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난 듯한 실감나는 상황 묘사와 미묘한 심리 표현은 굳이 노인이 아니더라도 노인들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착각을 주면서 작가의 노익장에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아무도 없이 그와 나 단둘이 있다는 게 나를 불안하게 한다. 그는 중풍에 걸려 오른쪽 반신이 흐느적대고, 제 입 안의 침도 잘 수습하지 못한다. 뭐라고 말을 하기는 하는데 잘 알아들을 수 없이 버벌거린다. 나니까 대강 알아듣지 타인하고는 거의 의사소통이 안 된다. 입술을 오므리지 못하니까 나를‘복희야’라고 부르고 싶을 때는 입가에 심한 경련이 인다. 나는 그게 불쌍하지 않고 고소하다.…(중략)… 그이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한 건 사실이지만 나이 때문에 그를 꺼렸던 건 아니다. 요새 나는 자주 거울 앞에 서곤 하는데 오래 바라보진 못한다. 너무 젊어 뵈는 내가, 중풍이 걸린 후 몰라보게 퇴락해가는 그보다 더 낯설어 보인다. 나는 자신이 마치 늙은 왕의 죽음과 함께 순장당한 어린 궁녀만 같아 그 애처로움을 차마 오래 견디지 못한다『.( 친절한 복희씨』, 238~240면) 자녀들이 모두 떠나고 달랑 늙은 내외만 남겨진 집에서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남편을 수발하는‘복희씨’는 수시로 남편과의 사이에 있었던 과거를 떠올린다.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수발하는 배우자의 심기가 달라지는 것이다.‘복희씨’는 열아홉 꽃 같은 나이에 서른을 넘긴 띠동갑 홀아비와 결혼했다. 남편은 단출한 홀아비가 아니라 전처의 아들도 하나 딸려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복희씨는 처녀 적 그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는 동안, 그의 뻗치는 성욕 때문에 여러 차례 강간을 당한 후 원치 않았던 임신으로 어쩔 수 없이 후처로 들어앉아야 했다. 부부라는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발자가 되어야 하는 아내는 끊임없이 지난 세월을 반추하며 수발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남편의 신체적 기능 손상은 아내로부터 삶의 의미를 앗아가고 삶의 목표를 없애버렸다. ‘나는 그가 불쌍하지 않고 고소하다.’거나‘나는 자신이 마치 늙은 왕의 죽음과 함께 순장당한 어린 궁녀만 같아 그 애처로움을 차마 오래 견디지 못한다.’는 표현은 부정적인 기억을 안겨 준 남편 수발이 아내에게 얼마나 정신적으로 큰 타격이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의무감과 복수심의 착종 한류스타 이영애 주연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연상시키는 제목, 「친절한 복희씨」는‘친절한’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반어적인 느낌 때문에 왠지 반전이 있을 것 같아 호기심을 부추긴다. ‘복희씨’이야기는 흔히 세속에서, 남편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젊은 아내들이 남편의 말년을 상상하며‘나중에 늙어서 보자.’고 벼른다는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식모 출신의 아내를 결혼한 후에도 식모처럼 대했던 남편은 이제 화장실 수발까지 요구한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비.아.그.라를 찾는 지치지 않는 성욕과 기품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례하고 비루하며 염치없는 남편의 태도에‘복희씨’는 솟구치는 증오심과 의무감 속에서 나날이 피폐해간다. 그이는 내가 해주는 뒷물을 처음에는 약간 미안해하는 듯 하더니 차츰 즐기기 시작한다는 게 느껴졌다. 발음이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에 그가 내지른 소리는 아유 시원해, 아아 시원타, 정도였을 것이다. 너무 시원해서 그랬던가. 차츰 발음하기를 포기하고 신음 같은 흥얼거림으로 변했다. 나는 그 흥얼거림에서 성적인 낌새를 챘다. 나의 짐작은 틀림이 없었다. 하루에 한 번씩 보던 변을 두 번씩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아랫도리에서 단호하게 내 손길을 떼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했다.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세상에 그런 편리한 장치가 있다는 걸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했을걸. 용용 죽겠지 놀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친절한 복희씨』, 247~248면) 남편에 대한‘복희씨’의 친절한 수발 뒤에는 생철갑이 있었다. 생철갑은 조금만 쓰면 만병통치약이지만 많이 먹으면 고통 없이 죽을 수도, 남을 감쪽같이 죽일 수도 있는 아편이다.‘ 복희씨’는 그런 무시무시한 약을 아무도 몰래 서랍에 넣어 두고 가끔씩 손에 쥐기만 해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을 느낀다.‘많이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독약’이라는 신통한 생철갑은 남편과의 애정 없는 성생활을 견디게 해주는 위안제로 시작하여 지금은 남편을 죽이고 싶은 살의를 다독이는 진정제로 변모했다. 주위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도 이토록 복잡한 심정으로 수발을 견디는‘복희씨’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한다. 남편의 지난 횡포를‘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독하게 이를 갈’면서도 수발자로서의 불가피한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복희씨’의 스트레스는 반감을 넘어 수시로 번뜩이는 살의로 이어지다가 결국 체념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대부분의 배우자 수발자가 그러하듯, 작가는 유별나게 헌신적이거나 악질적인 수발자 이야기로 독자를 자극하는 대신, 희노애락의 인간 본능에 충실한 보통 수발자의 애환 쪽으로 물꼬를 터서 더욱 현실감 높은 진정성을 발산한다.
사회적 지지의 문제점
의무감에 노부모를 찾는 자식들은‘복희씨’에게 성취감 대신 슬픔을 안겨 주었다. 부모는 혈육과의 소통을 갈망했다. 그런데 자식들은 마치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노인복지사처럼 나무랄 데 없이 공손하고 친절한 태도로 똑떨어지게 공평하고 규칙적인 효도 방문으로 자식의 임무를 마감하고 만다. 첫째 일요일엔 첫째네가, 둘째 일요일엔 둘째네가, 이렇게 순번을 정해서 오기로 합의했다고, 마치 노인복지사처럼 나무랄 데 없이 공손하고 친절한 태도로 알려줬을 때 내가 뭐랬더라?“공일이 닷새 든 달도 있던데 그런 공일날엔 뭐 할 거냐. 네 집이 모여서 얼씨구 소풍이라도 가지 그러냐.”“어머님도 참. 우리도 스트레스 안 받는 날도 좀 있어야죠. 그게 그렇게 억울하시면 미국 있는 시누님을 다달이 부르시든지요.”…(중략)… 빨리 의무를 끝내고 일어서고 싶은티가 역력한 걸 나는 매번 놓치지 않는다『.( 친절한 복희씨』,244~245면) 작가는 직정적 표현을 통해, 따로 기거하는 노부모를 상대로 정서적 지지를 가장하고 있는 자식들의 형편없는 위선과 이중성을 짚어낸다. 이 부분에서 배우자 수발자가 겪는 또 다른 차원의 감정적 훼손이 날렵하게 드러나고 만다.지독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의 욕망과 시대가 요청하는 인간에 대한 도리 사이에서 진퇴양난의 위치에 처해 있는 수발자의 변덕스러운 심리를 박완서만큼 정확하게 파헤친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읽는 이들을 찔끔하게 만드는 작가의 사람살이에 대한 예리한 통찰은 좀 더 원숙한 삶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여지없이 뒤에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