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4 |
[명인명장] 태극선 선자장 조충익 명인
관리자(2011-04-12 15:59:38)
먹고 살라고 만든 부채, 이제는 아름다움에 눈 떴네
- 태극선 선자장 조충익 명인
<걸어온 길>
1948년
장수군 번암면 사암리에서 태어남
1958년
10살 나이에 장수 번암초등학교 입학
1976년
20대 후반에 남원으로 나와서 시계점, 서점 등에서 일함
1978년
30살 무렵, 전주에서 태극선 노점상 시작
1980년
33살에 태극무늬 작도법 개발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때 태극선 첫선을 보임
1984년
공예품 전문생산업체‘( 전주민속공예사’) 지정
1985년
제24회 서울올림픽 기념품 생산업체 지정
1985년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 기념품 생산업체 지정
1986년~2000년
제9회 전라북도 공예품경진대회 최우수상 수상 등 각종 공모전 30여회 수상
1989년
중소기업진흥공단 최고경영자 연수과정 수료
1997년
향토 토산품 생산업소 지정
1998년
월드컵 관련 상품생산 유망기업 선정
1998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제 제10호 선자장(태극선) 지정
1998년~현재
한솔종이박물관 초대전 등 40여회 전시회 개최
전주시 대성동‘죽전선자방’에서 작품 활동 중
학교라고 해봐야 다닌 것도 아니여 원래 고향은 장수 반암이요. 보통 말하기는 번암 번암 허는디 한자로 쓰면 반암이여, 반암! 근디 사람들이 번암 번암 허니까 번암으로 바뀐 거여. 우리 형제가 8남매고 밑에 여동생이 하나 있고 나가 아들로는 막낸디, 우리 아버지가 한학을 하셨어. 인자, 뭐 전문으로 헌 거는 아니었고, 옛날에는 서당이라고 해가지고 한문 같은 것을 허셨지. 그때는 면에서 시회라고 해서 글짓기를 했는디, 요즘말로 허면 백일장이지. 운 자를 딱 두 개 냈는디, 면에서는 장원도 허신 일도 있고 그랬어. 장원을 허시며는 한 턱을 내야 허는 거신디, 살기가 힘드니까 못 내잖어? 그러니까 장원했다고 말도 안 했어. 돈이 없으니까. 우리 아버님은 살아계실 때부터 모범을 많이 보이셨어요. 이를 테먼, 아버님 생일 돌아오시면 가까이 있는 분들 꼭 오시라고 해가지고 식사 같이 허시고. 또 우리는 사암이라고 해가지고 학교하고 20리길이여. 차도 안 다니니까 걸어댕겨야 허는디, 학교라고 해봐야 다닌 것도 아니여. 반절도 학교를 못 나갔으니까. 그래서 겨울방학이 되면, 여름방학 때는 농번기니까 안 되고, 겨울이면 아버님이 한문을 가르치셨어. 내가 배운 것을 머리 속에 넣어놓고 죽으면 뭐허냐, 해가지고 동네 애들 데려다가 갈쳤죠. 천자문도 갈치고 사자소학도 갈치고. 얼매나 깊이 있는 것은 못해도 그렇게 갈쳤지.
뭐든지 기초가 튼튼해야 되는 거신디
긍게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은 전혀 없는 거나 마찬가지요. 어려서 저는 몸이 굉장히 허약해가지고 아픈 치레를 많이 허니까는 학교도 늦게 들어갔어요. 보통 그때는 많이 늦게 들어가고 그랬는디 그런 중에도 나는 더 늦게 들어갔어. 아버님이 학교를 가자 해가지고 20리 길을 걸어갔는디, 교장실로 딱 가시자고 허드라고. 원래는 입학식 때 가야 허잖아요? 근디 입학식도 아니고 한참 지나서 교감선생님한테 찾아가서 어디 사는 누구라고 허고는 자식놈을 학교를 보낼라고 왔는데 저것을 한번 봐달라고. 긍게 뭔 말을 허실라고 했냐면, 우리 자식놈이 머리가 있으니까 1학년 건너뛰고 2학년부터 다니게 해달라고. 근디 내가 한자는 좀 아는디 한글은 몰라요. 한글은 내 이름허고, 집집마다 대문에‘개조심’부엌문에‘불조심’고것만 알제, 잘 모르는 거여 말자면 다른 것은 잘 모르고. 아버님은 한문을 배우신 분이라 한문 위주로 갈치싱게. 거그에‘반암 초등학교’고것이 앞에 딱 써있응게 요거 한번 읽어봐라 그러는데 떠듬떠듬 읽으니까‘될랑가 모르겄다’그랬는디, 어쨌든 그래서 인자 2학년에 들어간 거여 이를 테며는. 내가 뭔 이야기 할라고 이 이야기를 하냐면, 뭐든지 기초가 튼튼해야 되는 거신디, 그게 암것도 아닌 것 같애도 나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허는 거시여. 내가 상급학교를 안 갔어. 배운 것은 그것뿐이 없어. 한문은 아버님헌티 배웠는디 도연명 시라든지 이태백 시 중에서 쉬운 것을 배웠는디, 그 다음에 배운 것이 사자소학이여. 긍게 천자문은 안배웠어. 사실 천자문부터 배워야 되는 것이거든. 그것도 잘못된거여. 근디 왜 그랬냐 허면 아버님이, 너는 재주가 있으니까 이 글자 하나 하나를 시간 버려서 배울 필요가 없고, 시를 배우면서 글자 나오면 같이 배워가면서 허면 된다, 그런 것이지. 지금 생각해 보면 글자는 많이 몰라. 나중에 내가 상급학교를 가서 다른 학문을 했으면 몰라도 배운 것은 딱 그것뿐이니까 말하자면 신학문은 국민 학교 5년 댕긴 거 그것밖에 없지. 긍게 나는 아는 글자도 몇 백자 안 되는 거여. 그러다 보니까 신문 봐서 몰라갖고 우세 사는 일은 없지만 근디 좀 아쉬운 점이 많다 이거지. 천자문 정도 배웠어야 되는디. 우선은 끼니 갈망이 안 되는디 공부가 되겄어요? 그래서 지금도 뭐 시험을 나간다든지 헐 때는 꼭 처음부터 단계를 밟아서 기초를 튼튼히 해야 모든 것이 잘 된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거지. 공부는 허고 싶었는디 여건이 안 되어가지고 그랬지. 몸이 약해서 농사도 못 짓지. 그러다가 첨에는 남원으로 나와서 시계 기술을 배웠어. 그런디 그것도 벨로 재미가 없고 그래서 서점 점원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디 서점 점원 해가지고는 먹고 살 일이 해결이 안 되는 거여. 그래서 학교 교문 겉은데서 노점을 했어. 학생들헌테 좀 필요헌 거, 크리스마스때 카드 재료 같은 거, 뭐 그런 장사를 좀 허다가 나중에 인자 기념품을 만들게 된 거여.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좀 있다고 했었거등. 그래서 기념품을 만들어서 근근이 생활 헐 정도만 했었는디, 아무리 해도 공부할 여건은 안 되는 거여. 우선은 끼니 갈망이 안되는디 공부가 되겄어요? 그래가지고 인자 기념품 중에서도 쪼만헌 미니병풍, 유리로 되어가지고 남원 광한루 같은 데 가면‘춘향전’해가지고 파는 거, 그걸 상당히 했었어요. 그랬는데 박대통령 사건(79년)이 딱 나면서 관광지에 사람들이 안 오니까 장사가 안 되는 거여. 그래가지고 이쪽 전주 우체국 사거리에 와서 토산품 겉은 것을 보는데, 부채가 딱 눈에 띄는 거여. 이런 것은 정세 허고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많이 왔다갔다 허니까 많이 사기도 하고 그래서 괜찮을 것 같애.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된 거지. 근데 뭐 기술이 있나? 그래서 광한루 관광 상품 파는 디서‘전주 가서 부채 좀 사와달라’그러면 부채를 만든 디를 가가지고 띠어다 주는 심부름을 했지. 근디 부채 만든 디를 가면 일허시던 분이 손을 딱 놓아부러. 지금은 부채 만드는 것을 배우라고 해도 안 배우는디, 그때는 그것이 자기네들 밥줄이여 말하자면. 긍게 기술을 안 알려줘. 털신 얘기도 있잖아요? 아버지가 아들한테도 안 알려주다가 나중에 죽을 때‘털털털’만 했다는 이야기처럼, 자기 밥줄하고 관계된 것은 안 갈쳐줘요. 혼자 다 터득을 허는 수밖에 없는 거여 긍게 첨에는 궁금헌 거지. 가서 보니까 무슨 문틈 겉은 디다가 부채를 쭈욱 붙여놨는데 말이지, 부채를 그냥 걸어노면 될 것을 왜 거그다 붙여놨능가 그랬지. 지금이나 되니까 문화재고 뭐고 그러지 그때는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응게 혼자 다 터득을 허는 수밖에 없는 거여. 나중에 내가 눈동냥에 귀동냥에 해가지고 보니까 부채를 풀칠을 해가지고 넣어노며는 부채 면적은 넓은디 얇아. 건조라고 하는 것이 수분 증발인디, 일시에 똑같이 증발이 되면 이게 그대로 있는디, 모든 사물이 걸어노며는 가에서부터 서서히 말라 들어가. 긍게 가서부터 말르면 이것이 옹그라들어. 그래서 부채가 휘어지는 거여. 그러니까 목공소에 가보면 판자를 길에다 세워놓고 휘어지면 다시 거꾸로 돌려놓잖아요? 이것도 원리가 그것이요. 땡겨 가지 말라고 여그다 붙여놓은 거요. 애로사항이 많았지. 지금은 개발을 해가지고 서서히 마르는 것을 개발했지. 뭐든지 빨리 말르면 문제가 생기는 거여. 오징어 구울 적에 보면 막 뒤틀리는 것허고 똑같은 거여. 긍게 서서히 말리는 거지. 풀을 좀 되게 해서 풀과 대나무와 종이가 적절허게 힘을 지탱할 수 있고 수분이 서~서히 빠져나가게 허며는 약간 휘어졌다가도 도로 다시 돌아와. 좀 눌르면 다시 원상복구가 돼. 태극 만드는 작도법을 개발을 했지 또 태극문양을 보니까 이게 전부 다 사람마다 무늬가 다틀려. 왜그냐면 자기가 스스로 그린 게 없어. 옛날 사람 거보고 자기가 그리는 거여. 근디 복사기도 없고 긍게 그놈 뽄을 타는 수밖에 없는디, 지금은 컴퓨터가 있고 별것이 다 있응게 0.1미리도 차이가 안 나지만 대충 연필로 그리는 것이라 그릴 때마다 차이가 나. 손재주가 있으면 얼마나 있겄어요? 그러니까 태극무늬가 가다가 공간이 틀어지는 거지. 3태극무늬가 원으로 펴지면서 똑 같아야 되는디 한쪽은 넓게 되고 한쪽은 좁게 되고 그러는 거여. 그래서 내가 태극 만드는‘작도법’을 개발을 했지. 작도법이 없으며는 평생 가야 똑같은 태극무늬가 안 나오는 거여. 그릴 때마다 달라지는 거여.내가 그린 거라도 해도 복사를 허지 않는 이상 달를 수밖에 없는 것이거든. 원래는 춘향이를 그릴라고 했는디 크게 그리니까 월매허고 똑같고 작게 그리니까 향단이더라, 그런 표현을 내가 했는디, 그렇게 안 될라면 표준 작도법이 있어야 되는 거여. 그래서 작도법을 개발했지. 또 옛날에는 태극무늬를 붙일 때 겹쳐서 붙였어요. 왜냐면 겹쳐서 안 붙이면 나중에 그게 벌어져요. 사이가 벌어지면 아름답질 못허지. 그래서 그걸 한 장처럼 이중감 없이 정밀하거 붙이는 것도 많이 연구를 했지. 초창기 때는 먹고 살라고 연구를 많이 했지만, 근래에 와서는 여러 가지 부채를 연구허지. 부채살을 좀 퉁겁게도 허고 가늘게도 허고 한 개짜리로도 만들어보고 회화기법도 해보고 여러 가지 것을 허는 거죠, 지금. 그래도 우리나라 얼굴 역할은 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인자 부채를 헌 지는 30년이 좀 넘었죠. 박대통령이 79년돈가 사건 나고 그때에 인자 눈을 뜬 거지요. 그러니까 인자만 30년은 넘었지요. 83년, 4년부터 공예품 경진대회 겉은데 출품을 해보고 그랬어요. 그래서 86년도에 전라북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지요 말허자면. 그러니까 나는 빠른 시일 내에 저기를 헌 거예요. 그래가지고 인자 86년도, 88년도 올림픽에 납품허면서 유명해졌지요. 올림픽을 유치를 허면서 전국적으로 인자 공예품 지정업체를 정했는디, 전국에서 14개 업체를 지정했는디 호남지역에서는 나 혼자 된 거여. 3년동안 경진대회에서 입상한 사람 위주로 해가지고 종목별로 심사를 해서 지정을 했는디, 그 3년간 상을 내가 다 받아가지고 경쟁할 다른 사람이 없었어 말하자면.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그때부터 선수단들이 부채를 들고 나간 거야. 그때 내가 부채를 만들기는 만들었는디 납품은 못했어. 그때는 기념품 전문으로 파는 장사꾼이 갖다가 납품을 헌 거여. 내가 지정업체가 되면서 나한테 다이렉트로 계속 헌 거지. 그러니까 인자 그 올림픽 아시안게임 U대회 허면서 남북한 선수 동시입장 허면서부터 내가 직접 납품 헌 거여. 그 뒤로 인자 이래저래 거의 20년 동안 내가 상을 거의 다 받다시피 해 버리니까 딴 사람한테는 기회가 안 주어졌지 이를 테면. 태극선 만드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그냥 일상적인 것이여. 삼색도 옛날에 했던 것 그대로만 허고, 말하자면 변화가 없어. 처음에는 내가 잘 만들었다고 볼수는 없는디 점차적으로 태극무늬도 연구허고 저 뭐랄까 답선이라고 꽉 눌르는 데 대나무 골이 쭉 서거든요. 부채를 보며는. 딴 부채는 골이 슨 데가 있고 안 슨데가 있고 그러는디 그런 것들은 안 좋아요. 그러니까 내 부채허고 점차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는 거죠. 거그다가 내가 상을 받고 그러니까. 우리도 말하자면 라면 하나를 사더라도 알아주는 데를 사잖아요? 실력도 차이가 있지만 몰리는 데로 가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뭐 돈은 많이 벌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얼굴 역할은 했다,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아름다움이라고 허는 것이 뭔가 예전에 교육청에 교육위원인가 누군가는 몰라도 교육 자료를 만드는 선생님이 계셨어. 내가 올림픽 공식지정업체가 됐다 그니까 그 신문을 보고 찾아와 가지고‘태극선은 나의 영혼’이라고 허는 것을 갖다가 실었어. 현장에서 힘들게 일허는 사람들을 위주로 해가지고 그것으로 책을 한 권 만들었어. 학교 선생들의 교재용으로 말허자면.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못된 것이 있어요. 나는 실질적으로 어렵게 어렵게 허기는 했는디, 그 분은 좋게 쓰기 위해서 머시 어뜨케 첨부터 뜻을 가지고 했다고 썼는디, 첨부터 내가 뭐 뜻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거든, 허허! 작가들이 글을 쓰면 대부분 어느 정도는 미화를 해서 쓰더라고. 허허! 그러다 보니까 거의 한국관광공사허고 연계가 되고 해가지고 뭐 좀 나중에는 먹고 사는 것보다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나도 할 일이 있어야겠다는 거지. 아름다움이라고 허는 것이 뭔가, 그런 생각을 헌 거지. 부채를 만드면서도 어 좀 모든 면에 정성을 다해서 아름답게 만들어야되지마는, 마음도 아름다워야된다.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이라고 허는 것은 뭐라고 생각을 허느냐? 우리가 폭넓게 생각허며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 제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아름답다는 거지. 사람의 행실도 지탄받는 일, 쩍은 일이라도 손가락질 받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못 배우고 힘들게 살았지마는 정직허게 살며는 이 세상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는, 그런 사례를 남기고 싶어. 그래서 나름대로 의미있게 살라고 철학공부를 혼자 하는 거여. 이를테며는. 내가 무슨 칸트철학을 허고 니체철학을 허고 그런것이 아니라 중요헌 것은 자연의 이치, 섭리대로 살아야 헌다는 것이지. 너무나 자연을 훼손하고 역행하고 그러면 안된다는 것이여. 요즘 너무나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정치인이나 행정가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박경리 선생님은 우리가 소모허는 것은 자연에서 얻은 것의 이자만큼만 소비허라고 했거든. 너무 아까운 거여. 그래서 순환할 수 있고 자연에 훼손이 안 가는 것이 뭘까 했더니 그것은 대나무배끼 없어요. 대나무는 3년 정도만 지내며는 다 여물어가지고 자재로 쓸 수 있고, 5년 정도 지나면 죽어요 그게. 그러니까 고것을 잘라주고 쓰고 그러면 또 나가지고 복구가 되고. 가장 자연친화적인 것이 대나문디,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대나무밭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애물단지라 그래. 요것을 나 겉은 사람이 주장해가지고는 미친놈이라 헐 것 같으고, 좀 이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이 대나무 소비운동을 일으켰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좀 들어가거든요. 다른 소나무 겉은 것은요 좋은 것들은 목재로 쓸라면 100년도 더 걸려요. 쪼그만 거 쓸라면 한 50년 걸리겠지마는. 대나무는 짤라주면 자연에도 좋고 쓸 용도도 많은디 쓰지를 않고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거든요. 좀 비싸더라도 제도적으로 우리것을 사줘야 되는디 부채를 만들 때 작품허고 상품허고는 틀려요. 작품이라고 허는 것은 납품시간이나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허는 거죠. 예를 들어서 일주일이 걸릴 수도 있고 한 달이 걸릴수도 있고 일 년이 걸릴 수도 있고 기한이 없는 건디, 상품이라고 허는 것은 만들어가지고 소득을 안 내면 필요가 없는거여. 그러기 때메 상품으로 허는 것은 내가 자재를 다 맨들어서 허면 상품이 안 되어요. 왜냐, 그렇게 만들면 하나에 백만 원 정도 받아야 허는디 상품을 백만 원 달라고 하면 누가사겠어요 그걸 갖다가? 상품은 시장의 논리에 의해서 해야되는 거신디, 우리가 도매로 나가는 것이 3천 원 정도 되면, 중국에서 재료 갖고 와갖고 조립만 해가지고 팔면 그것이 더 싸니까 관청에서 그것을 사주면 속상할 때가 많이 있어요.근디 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혼자 다 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서 현대자동차가 나사 만들고 부품 다 만들어서 한다고 허면 그것이 장사가 되겄어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헌다고 치면 5만원을 불러도 답이 안 나와요. 하루 종일 해봤자 10개를 못 만들어요. 그러니까 살 놓는 사람은 살 놓고 문양 오리는 사람은 문양 오리고 그렇게 허니까 하나에 몇 천 원 허는 거죠. 그런디 중국에서 완성된 것이 500원에 들어와요. 그러니 답답헐 일이지. 관청에서라도 우리 문화를 지키고 살리려면 쫌 비싸더래도 제도적으로 이것을 사줘야되는디, 예산 없다고 그냥 길바닥에서 싸게 파는 것을 해버리면 우리것이 보존이 되겄냐 그말이지. 긍게 고런 것이 좀 시정이 되어야지. 첫째가 장인, 그 다음이 작품이여 내가 지금 디자인 해놓은것들이 많아요. 근데 디자인만 해놔 봤자 필요가 없는것이, 보통 작품이 빨라야 한 달이고 보통 두세 달 걸리는데 먹고 사는 것이 보장이 안 되면 못 허잖아요? 그래서 우선 주문 들어온 거, 거래처 뺏기기도 아깝고 그러니까 그것에 매달려가지고 정작 허고 싶은 것은 못허다 보니까 안타까움이 많은 거죠 지금. 원래 내 목표는 살아 있을 적에 한 500작품 정도 남기고 싶은 것이 목표예요. 어느 나라 어느 사람이 와서 보더래도 참 감탄할 만한 그런것을 헐라고 했었죠. 근데 지금 부채문화관이다 해가지고 문 열어노면 우세 사요. 누가 모르는 사람들은 건물 좋고 그런다고 허지만 좀 아는 사람들은 그거 보고 우세시키는 거여. 첫째는 인본주의로 가야 돼. 부채 만드는 장인이 누가 있고, 접부채는 누가 있는디, 전주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기능장이다, 그렇게 띄워야 되는 거여. 그렇게 뒷받침을 해서 만들어야 되는 거여. 그 다음이 작품이여. 이 세계적인 사람이 만든 작품이 이 작품이다, 이렇게 내놔야 되는 거여. 일본이나 중국에 미치지도 못 허는 것을 내놓으면 그게 황당한거여. 누가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인정할 만한 것을 내놔야된다 이거여. 백 원짜리 일을 해야 하는데 1원짜리 일을 하고 있으니... 그런 것을 생각을 안 허고, 장인들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 아니고 훼방을 놓기만 허니 뭔 발전이 되겄어. 답답헌 일이지. 내가 그런 계획을 한 것이 한 10년 전인디, 이런 공예는 70살 넘으면 못 헌다고 봐야 돼. 내가 먹고 사는 것에 연연해서 상품만 만들다 보니 신경질이 나는 거여.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을 못 허고, 백원짜리 일을 해야 하는데 1원짜리 일을 허고 있으니, 이런 실정이니까 어디에다 대화하고 의논할 사람도 없어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지만 아쉬움이 많이 있어요. 디자인 해놓은 것이라도 다 만들었으면 좋겄는디 그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자식들한테 전수를 헌다고 허고 있지만 다들 안 헐라고 그래요. 사회적으로 예우를 받으면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해도 다른 분야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고 살면 애들한테도 배워라 할 텐데, 거의 뭐 그런 희망이 안 보이니까 안 헐라고 그래. 여그서 죽도록 해봤자 나가서 직장생활 허는 것이 어떤 면에서 더 편하고 먹고사는 것이 나으니까. 그런 여건은 우리가 해라, 뭐대라, 그렇게 해봤자 소용이 없고, 이런 것을 허면 명예도 얻고 먹고사는 것도 보장이 된다는 것이 보여야 배우는 것이지. 말로만 그러지 안 배울라고 그래요. 아들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잘못 되어서 그런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탓 헐라고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면이 전부 다 학교 위주로 되어가지고 거기에는 수백만원을 쓰면서 기능장을 위해 쓰는 돈은 너무 적어요. 위에서는 홍수 났는데 밑에서는 말라 죽는다고 제가 혼자 30년간 공부해서 자력으로 문화재가 됐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거예요. 체계적으로 전수를 받아서 해야는디, 그동안에 그런 것이 없었으니까. 그러면 이제라도 후대 사람들이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놔야 허는디, 지금은 젤로 경쟁력이라고 허는 것이 말 그대로‘전통’이에요. 일본 겉은 디는 400년, 500년 그러는디 나는 300년 될라면 얼마나 더 지나야 돼요? 지금이라도 쌓여가야 되는디 내가 죽어가지고 우리 아들이 안 헌다고 허면 여그서 딱 끊기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전혀 보장이 안 돼 있어요. 그래서 국가에서 해야 헐 일이 현재 공예업을 유지허고 있으면서 그 지역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최소한의 보장을 해줘야 돼요. 그 사람들을 편히 먹여 살리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활이 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줘야 돼요. 그래야 유지가 되지 안 그러면 유지가 안 되거든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좀 키워줘야 돼요. 기능장들이 대부분 허는 소리가 나만 고생하면 됐지, 멀라고 자손들한테 이 고생 물려주냐고 그래요. 그게 일반적인 대답이에요. 현실을 깨뜨리지 못해요. 기능장들도 합심을 해서 한목소리를 내야허는디 다들 자기 분야에만 갇혀 있으니까 합심이 안 돼요. 상당히 배타적이에요. 자기하고 해당사항이 없으면 협조를 안 헐라고 그래요. 얼른 이 구조가 바뀌어져야 할 텐데 바뀌지가않고... 옛날에 비해서 문화예술 쪽에 엄청나게 예산을 쓴다고는 해요. 근데 위에서는 홍수 났는데 밑에서는 말라 죽는다고, 우리는 전혀 못 느끼는 거여. 가뭄 들어가지고. 비교를 허자면 그렇단 말이여. 예산을 많이 쓴다면 우리들헌테도 물방울이 좀 흘러와야 헐 것인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거여. 다 중간에서 없어져. 구조가 그렇게 돼있어. 아직은 내가 힘이 부족해가지고 제대로 하는 것은 없지만. 나는 무슨 공모전 심사위원도 아니고 아무 힘도 없지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나는 배운 것은 국민 학교 5년 다닌 것밖에 없지만 나름대로 자연을 생각하면서 이치를 깨우치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세상에 공짜라는 것은 없어요. 내가 먼저 덕을 베풀면 내가 생각지 않아도 나한테 다 오는 거여. 내가 주장하는 것은 뭐냐면 좁게는 먼저 우리 전주가 잘 돼야 해. 글다 보면 전라북도가 잘 되고 대한민국이 잘 되는 거여. 글다 보면 그 일부가 나한테로 돌아오는 거여. 그것이 세상이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