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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 | 연재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독어권 한국영화 순회상영 1
관리자(2011-02-14 11:22:03)

독어권 한국영화 순회상영 1 조용한 아침의 나라, 영화로 만나다 - 임안자 영화평론가 


1994년에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실행된 <독어권의 한국영화 순회상영>은 내 구상을 바탕으로 개발된 필자의 일곱 개 프로젝트의 첫 번째였다. 1989년 한국영화와 인연을 맺은 이후 나는 4~5년 동안 적지 않은 한국감독들의 해외 회고전에 참가하면서 이 방면에 남다른 경험을많이 쌓을 수 있었다. 그러다 1993년에 들면서 문득‘스위스에서 한국영화의 회고전을 할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해외 회고전은 엄청난 경비와 많은 전문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현지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던 터라,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저 잠깐 스쳐가는 개꿈이겠지 하고 잊으려 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내 마음은 한번 해보자는 쪽으로 굳어졌다. 


스위스에 한국영화를 소개하다 그때만 해도 보통 해외 한국영화 회고전 하면 국제영화제의 대표자들이 한국에 들어와 일정 양의 영화를 보고 그 가운데서 뽑은 것들을 가져다 현지에서 보여주는 식이었는데,나는 그 반대방향을 생각해본 것이다. 외국인들의 시각을 떠나 진정 한국영화인들로부터 가치성을 인정받은, 유행성을타지 않는, 그런 작품들을 외국의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그러려면 아무래도 내가 40여 년 동안 살고 있는 스위스가 가장 알맞은 곳으로 비춰졌다.90년대 중반은 한국의 젊은 세대 감독들이 다수 등장하여군정의 종말과 함께 그때까지 금지됐던 정치적으로 민감한테마와 실험성의 새로운 형식에 과감히 도전하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던 때였고, 이들은 베를린, 로카르노, 낭트, 뮌헨, 페사로, 아미엥, 라 로셀 등의 영화제에서 질적 수준을 이미 충분히 검증 받은 뒤라서 프로그램 짜는 데는 자신감이 있었다.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하려니까 어떤 방법이 좋을지 그저막연하기만 했다. 우선 스위스 영화계의 친구들에게 물어봤으나 모두“한국영화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스위스에서 그건불가능한 일이다”며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표정들을 지었고, 그때까지 내 일이라면 열심히 도와주던 남편도 이번에는“실패할 위험성이 너무 많다고”내 계획을 말리며 반대했다.


그럼에도 나는 주저앉지 않고 방법을 계속 찾았다. 원래무엇을 한번 마음먹으면 기어코 해내고 마는 내 타고난 왕고집이 또다시 내 마음을 들썩거리며 괴롭혔다.그러던 가운데 1993년 7월에 내 꿈을 해결해줄 수 있는로버트 리흐터를 우연히 시내의 전차 안에서 만났다. 리흐터는 스위스의 여러 주요 일간지에 글을 쓰는 영화평론가로서1989년에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본 뒤부터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은동료였다. 그는 나를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최근에 한~두 영화제에서 한국영화를 몇 편 봤는데 모두 좋았다”며먼저 말을 건넸다.


 나는 한국영화에 대한 그의 호평을 듣고는 바로 이때다 싶어, 그에게 내 프로젝트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는 전차 안에서 할 이야기가 아닌것 같다며 나를 근처의 카페로 데리고 갔고, 거기서 우리는두어 시간 정도 프로젝트에 대해 상당히 깊게 토의를 했다.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리흐터는“스위스의 한국영화회고전은 실현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상당히 낙관적인 전망을 점치면서“아주 매력 있는 프로젝트 같은데 자기도 참가할 수 있느냐”면서 그 자리에서 물었다. 그러고는“프로젝트의 성격상 스위스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느냐가 가장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스위스 이란영화 회고전>을 본보기로 하면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자기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스위스 이란영화 회고전>은 1993년 리흐터가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스위스 정부의 지원을 받고 진행됐던 최초의이란영화 회고전 프로젝트였으며, 그의 프로젝트가 스위스전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서 읽었던기억이 나서 나는 두말 하지 않고 그의 제의에 선뜻 동의하면서 잘해보자고 악수의 손을 내밀었다. 그것으로 내 꿈은프로젝트로써 자랄 수 있는 첫 움을 틔웠다. 


프로젝트가 실현될 때까지 나는 6월초 리흐터와 첫 모임이 있은 뒤 그를 두어 번 만나 회고전 계획을 세웠다. 스위스에서 행사를 공식화하기 위해서는 스위스 정부와 영화계가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조직체와 이를 움직이는 전문 인력이 요구됐다. 다행히 리흐터의도움으로 나는 같이 일할 수 있는 두 전문직 여성을 어렵지않게 찾았다. 바젤의 르 봉 필름(Le Bon Film) 시네클럽의경영자 코린느 시그리스트와 스위스의 비상업 영화관 조직체인 시네리브르(Cin?libre)의 비서 크리스틴 라인더가 프로젝트에 가담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넷은 각자의 능력과 경험에 따라 그에 알맞은 역할을 나눠가졌다. 리흐터는 정부에지원요청과 미디어 접촉, 시그리스트는 프로그램과 상영일정을 짜고, 라인더는 스위스 시네리브르의 배급과 영화관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나는 프로젝트의 회고전 총책임자로서 먼저 한국과의 접촉을 맡음과 동시에 동료들의 일에 협조했다.우리는 먼저 회고전 조직의 이름을‘시네리브르’로 정한뒤 열두 편 안팎의 영화로 프로그램을 짜기로 했다. 그리고상영장소는 구태여 따로 찾을 것 없이 크리스틴이 직접 관여하고 있는 시네리브르의 전국적인 배급망과 그에 딸린 아트하우스를 이용하기로 했다(비상업성의 영화 클럽 시네리브르(Cin?libre)에 대해서는 문화저널 2010년 7월의 이장호감독의 회고전에 대한 글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상영기간에 관해서는 두 달로 잡았다.


애초 나는 취리히, 제네바, 바젤, 베른 등에서 자그마한 회고전을 할 예정이었으나 시네리브르와 연결되면서 자동적으로 전국의 18개 시네리브르 상영관을 돌아야 했다. 흔히 아트하우스로 불린 시네리브르 상영관은 일반극장에 비하여값이 저렴한데다 설령 운영에 적자가 난다 하더라도 각처의 시의회로부터 지원을 받게 돼 있어 우리에겐 이상적이었다그런 한편 동료들은“이왕 회고전을 하려면 상영 프로그램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까지 늘리자. 시네리브르에 독일의‘콤뮤날레스 키노(Kommunales Kino)’와 오스트리아의‘악지온 필름 외스터라이흐(Action Film ?sterreich)’를 포함시켜 독어권 세 나라의 이름으로 행사를 하면 회고전의 의미가 더욱 빛나지 않겠느냐”는 전혀 새로운 전망을 건넸다.특히 이 방면에 경험이 많은 리흐터는“<이란영화 회고전>때도 그렇게 해서 좋은 성과를 거뒀다”면서 적극 나섰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쪽에서도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우리와 합쳤다.물론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참가하면서 순회상영의 상영기간은 몇 배로 늘어났다. 우리는 한 나라에서 두 달 정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모두 6개월을 계획에 넣었다. 예를 들면스위스는 1994년 10월 20일에서 12월, 독일은 1995년 1월부터 3월 중순까지, 오스트리아는 3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로 정했는데 실제 한 치의 차이도 없이 계획한대로 실행됐다. 


한국과 스위스 정부의 지원 나는 1993년 7월 초 한국의 문화체육부(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에 시네리브르를 대신하여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요청을 냈다. 그러나 반년이 다가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11월 초 뜻밖에도 제네바에 상주하는 한국해외공보처(KoreaOversee Information Center)의 김창호 문화담당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외무부를 대신하여 그가 보낸 편지에는“시네리브르에서 보낸 요청에 관해 대한민국의 정부는 <독어권 한국영화 순회상영>에 필요한 독어와 불어자막이 들어있는 영화의 프린트를 무료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영화의 지원은 12~15편 정도가 가능하며, 우리 정부는 스위스 외에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회고전이 순회상영되는 데에 반대하지 않는다. 선정된 영화의 프린트 수송문제에 관해 스위스편 왕복 비용은 한국 정부에서 부담한다. 그러나 스위스에서독일과 오스트리아까지의 왕복 수송비는 시네리브르에서 책임진다. 그밖에 책자에 필요한 사진 자료와 회고전의 포스터등은 한국정부에서 제공한다”등의 지원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들어있었다. 무소식에 애를 태우던 6개월의 기다림이 싹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제네바의 김창호 문화담당관에게인사를 할 겸 감사의 전화를 했다.


내가 대한민국 정부에 감사한 건 아마 그 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아무튼 우리는 한국 정부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협조에용기를 얻고는 곧바로 스위스 정부에 지원요청서를 보냈다.허나“예산부족으로 도와줄 수 없다”는 실망적인 대답이 왔다. 그런데 리흐터는“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란영화회고전때도 첫 번째에는 거절됐지만 나중에는 도움을 받았다”고 하면서 좀 더 기다려 보자며 태도였다. 그런 뒤 두 달쯤 지나서우리는 좀 더 정성을 들여 쓴 지원요청서를 문화부에 다시띄웠다. 1989년 배용균 감독이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로카르노에서 대상을 받았던 점과 90년대 이후 페사로와 퐁피두센터 등 주요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을 대대적으로 열고있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고는 한국 정부에서 이미 선정된 영화의 프린트 확보와 수송 등을 약속했다는 것도 덧붙이면서 스위스의 한국영화 회고전은 한-서간의 문화교류의차원에서 중요한 이벤트가 될 것임을 다짐했다.그러고 나서 1994년 2월 21일 우리는 스의스 정부의 문화부장 대비드 스트라이프로부터 지원의 약속이 담긴 답장을 받았다. “우리는 한국영화 회고전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 지원요청은 영화과의 일부 직원이 바뀌는 과정에서 실수가 생겨 탈락됐는데, 이점 여러분의 이해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휴우! 편지가 오던 날 우리는 르 봉 필름의 사무실에 모여 있다가 지원의 소식을 듣고는 너무 감격한나머지 분더바(Wunderbar:독어로 매우 좋다, 멋있다 라는뜻)를 연거푸 외쳤다.여기서 잠깐 지원의 배경에 대해 말하자면, 스트라이프 문화부장은 1989년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 대상을 안겨준 전 로카르노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서, 배 감독의 수상을 계기로 나는 그와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다. 스트라이프는 로카르노 이후 스위스 정부의문화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스위스에서는 문화부가 따로없이 내무부에 딸려 있기 때문에 문화부장관 대신에 문화부장으로 불린다).그리고 문화부 내의 영화과의 과장 이본느 렌즐링은 한때스위스의 주간지(WOZ)에서 글을 쓰던 영화기자 출신으로서, 한동안 우리 집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끔 길에서 만나면 한국영화에 대해 의견을 나누곤 했던 친지였다. 그런까닭에 우리 팀에서는 나의 개인적 관계를 고려하여 지원을한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으나, 그들도 그것을 진짜 믿고 한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든 말든 두 분의 결정을 거쳐 받은 지원금이었다. 어찌 그 고마움을 잊으랴! 스위스 정부의 지원금은 우리가 애초 요청한 4만 5천 프랑보다 1만 프랑이 적은 3만 5천 프랑이었다. 그에다 스위스의 법에 따라 지원금의 10%는 정부에 다시 돌려주게 돼있어서 남은 건 3만 1천프랑이었다. 하지만 90년대 하반기는 스위스 전 나라가 경제적 위기에 몰려있던 때라서 지원을 다시 요청을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고, 문화부의 예산 부족으로 같은 시기에스위스 예술가들에게 주어져야 할 지원금이 많이 삭감되었거나 아예 탈락됐던 것을 고려하면 우리의 처지는 그래도 훨씬 나은 편이었다. 3만 1천 프랑은 자료수집, 책자의 편집과출판, 프레스 홍보비, 프린트와 영화재료들의 수송비 그리고팀의 인건비로 책정됐다. 그리고 한국감독들의 개막식의 참여를 비롯하여 5박 6일간의 초청 비용은 스위스 정부에 소속된 해외 문화교류협회 프로 베치아(Pro Helvetia)에서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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