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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8 | [문화저널]
제88회 백제기행-부안일대 백제문화권 아름다운 '저항'이 숨쉬는 땅
최준영 이리남중 교사(2003-09-06 10:00:40)
아침 일찍 바삐 서둘러 전주로 향하면서도 변산 반도 일대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을 두 눈 가득 담아 올 생각을 하니 찌뿌린 날씨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예전에 너무 좋은 느낌으로 다녀왔던 내소사를 다시 찾을 생각을 하니 내 마음은 벌써 내소사 경내를 거니는 듯 했다. 약속장소에서 버스에 올라 오늘 처음 만났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사람들과 정답게 인사를 하고 웃고 떠드는 사이 금새 모두가 친숙해졌다. 선생님의 쉴 새 없는 가르침을 꼼꼼히 챙겨 듣다보니 우리가 탄 버스는 네모 반듯한 도시의 모습들을 뒤로 하고 구불구불 푸르른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 부안으로 들어선 우리는 '서문안 구경하고 '개암사(開巖寺)'를 향해 달렸다. 개암사는 불끈 솟은 울금바위 아래 자리잡은 단아한 절로 주변 풍광과 아주 잘 어울려 날아갈 듯한 예쁜 처마를 가진 대웅전이 인상적이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과 자연석으로 만든 '덤벙주초'에 '그랭이기법'으로 기둥을 올렸는데, 가파른 경사면에 세워졌기 때문인지, 건물 규모에 비해 다소 굵은 기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울금바위를 뒤로하고 우뚝 선 장중한 멋을 가진 건물이었다. 울금바위 주변은 삼국통일 후 신라와 당나라에 거세게 저항했던 '주류성'으로 확인되고 있다. 백제부흥전쟁 당시 주류성의 연합세력들은 '부여풍'의 왜군이 합세하면서 오히려 갈등을 빚었는데, 결국 주류성 밑 동굴에서 병을 핑계로 피해있던 '복신'을 제거했다고 한다. 실제 울금바위 아래에는 '원효방'이라 부르는 굴이 남아있다. 백강구 전투에 대한 일본서기의 정황 기록 등을 참조할 때에도 울금바위 주변의 성곽 흔적이 과거 주류성일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개암사를 뒤로 하고 '호암굴'로 향하던 우리는 차창 밖으로 '흑무대왕사당'을 보게 되었는데, 이곳은 삼국통일의 일등공신 김유신을 모신 사당이다. 변산반도에는 '의상봉', '원효방' 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신라의 쟁쟁한 위인들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이는 삼국통일 후 신라에 저항하는 백제의 유민들을 위협하고 포섭하기 위한 정책들이 이곳에 시행되고 그 흔적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제부흥전쟁에서의 패배는 백제 유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시켰고 절망은 깊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비틀어지고 뭉개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일어선 이는 '진표율사'였다. 풀잎에 허리를 꿴 개구리를 가지고 놀다가 개울가에 잠시 놓아둔다는 것이 그만 해를 넘기고 말았는데, 이듬해 봄 근처를 지나다 구슬픈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서 달려 가보니, 작년 그 개구리들이 빈사상태로 울부짖는 모습에 깨달음이 있어 출가를 한다. 울부짖는 개구리를 멸망한 백제 유민이라고 생각하면 진표율사가 무엇을 보고 무슨 일을 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는 의상봉 '부사의 방'에서 관음·미륵보살을 친견하고 점찰경을 얻은 후 민중교화와 구제에 나서게 된다.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가는 숲길을 헤치고 호암굴을 찾아 올라갔다. 지금이야 도로 한켠에 차를 세워두고 설렁설렁 오르는 길이지만, 옛날이었다면 깊고 험한 산길을 구비구비 지나서야 다다를 길이었다. 우리 눈에 나타난 「호암굴」은 박쥐들이 보금자리를 삼을 만큼 규모가 꽤 컸다. 한때 빨치산들이 살았으며, 그 이전에도 이름 모를 도적 떼들이 거처로 삼았을 이 굴은 밥을 지으면 그 연기가 반대편 산기슭으로 흩어진다고 한다. 변산은 지형적으로 매우 특이한 곳이다. 산세가 뚝뚝 끊겨 외로운 섬마냥 오밀조밀한 산들이 모여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보는 방향에 따라 제 모습을 드러내기도 감추기도 한다. 쫓기는 자의 입장에서는 숨기에 최적의 입지를 가진 땅인 것이다. 이러한 지형에 호암굴 같은 곳이라면 도적이고 의적이고 간에 한 번쯤 활개칠만한 곳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호암굴이 있는 우반동 일대에는 조선사회의 개혁을 부르짖던 반계 유형원 선생이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던 유적지가 남아 있으며, 조선시대의 이단아 허균이 홍길동전을 집필한 곳도 이곳에서 멀지않은 선계폭포 근처 정사암이라고 한다. 호암굴 견학을 마치고 우리는 부안의 먹거리 젓갈백반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어리굴젓, 낙지젓, 오징어젓 등 다양한 종류의 젓갈과 푸짐하면서 정갈한 찬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많이 걸어다니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많고 땀을 많이 흘리는 답사길에는 딱 알맞은 식사였다. 부안이 젓갈로 유명해진 것은 무엇보다도 소금 때문이다. 마침 식당 맞은 편으로 옛날에 비할 바 아니지만 그래도 꽤 넓은 염전이 펼쳐져 있었다. 과거에는 '천일제염'보다 가마솥에서 구워내는 '도염'이 더 일반적인 제염법이었는데, 부안의 특산품 개암죽염은 스님들이 산중에 숨어살던 도적을 양민화시키기 위해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한다. 마침 운전기사 아저씨의 호의로 맛본 개암죽염은 삶은 달걀 냄새가 연하게 나면서 짜지 않았다. 그래서 개암죽염은 더운 여름날 먼거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준비물이라고 한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나서 우리는 내소사(來蘇寺)를 찾았다. 내소(來蘇)란 뜻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찾아왔다'는 뜻으로 풀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을 찾아오다'로 풀기도 한다. 다른 유명 사찰들처럼 아스팔트에 파묻히지 않은 예전 그대로의 흙길과 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높다란 전나무 숲이 그때 그대로여서 고마웠다. "나무를 올려다 보면 내 키가 커지는 것 같다"는 선생님의 말씀엔 모두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숲길을 걸었다. 벚꽃이 피었을 때와 단풍이 들었을 때에도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겨울날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이 전나무 숲길에서 저녁 예불 종소리라도 만나게 되면 내소사의 고즈넉한 매력에 푹 빠져들고 말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에는 다시 겨울 산길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내소사는 완만한 공간적인 상승감으로 불국토의 이미지를 멋들어지게 표현한 절로, 무엇보다 주변 관음봉의 아름다운 풍광과 잘 어울린다. 그 아름다움의 출발점이자 인간계와 불국토의 경계가 바로 사천왕문이다. 내소사를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해 볼 일은 사천왕문을 프레임 삼아 경내를 들여다 보는 것이다. 찾는 이의 계절에 따라 어느 때는 울긋불긋한 꽃 속에서, 어느 때는 하얀 눈 속에서 절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찾은 유월은 연두빛 초록빛으로 푸르름의 절정을 보여주는 나무들 속에 수줍은 듯 그 고운 자태를 살짝 여민 내소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완만한 계단을 통해 부처님의 삼십삼천 세계가 표현되고 마지막 계단 위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무색계가 펼쳐진다. 내소사의 자랑인 대웅보전이 위치하는 것이다. 경내 탐색이 끝나면 문턱을 너머 한 걸음 내딛어 다시 멈춰 서서, 시야를 크게 하고 주변을 둘러 볼 일이다. 감각이 무딘 사람도 경내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갑작스레 툭 터지듯 절 너머의 관음봉 산자락이 한 눈에 들어올 것이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는 산자락이 절을 포근히 감싸는 느낌이 들 것이다. 봉래루(蓬萊樓) 역시 덤벙주초에 그랭이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높이가 제각각인 자연석 주춧돌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워 누대 마루의 높이에 맞춘 지극히 자연스러운 건물이었다. 이렇게 크기도 높이도 제멋대로인 주춧돌과 길이가 모두 다른 나무 기둥들은 기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공장에서 기계로 깍아 만들어 모든 것이 규격화된 현대 건축과 달리 자연을 그대로 담아내려는 우리 선조들의 멋스러움 때문이다. 봉래루에 나붙은 플랭카드가 옥에 티로 여겨져 아쉬웠지만, 평범하면서도 전혀 평범하지 않은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내소사의 아름다운 창살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꽃이 활짝 피어나는 형태이다. 그런데 이 창살은 조각 그 자체보다 햇살에 의해 생기는 안쪽 그림자가 훨씬 더 아름답다고 한다. 부처님이 온통 꽃그림자로 뒤덮여 꽃으로 묘사되는 화엄경의 세계가 내소사의 대웅전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또 재미있는 것으로 대웅보전의 괘불탱화는 해수관음을 표현한 것으로 천장의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과 함께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는 변산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걸어가며 바라보면 보살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데, 착시현상이지만 옛사람들은 자연스레 부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서 자신들의 삶을 더욱 건강하고 성실하게 꾸려 나갔을 것이다. 관음봉 자락을 따라 청련암까지 올라가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내소사와 그 너머 바다까지 굽어보게 되는 그 그림이 또한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수성당(水聖堂)」으로 발길을 돌렸다. 적벽으로 향하는 해변도로에는 아득한 서해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아침과 달리 밖의 기온은 뜨겁기만 한데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뭔가가 바다에 가득해서 멀리까지 볼 수는 없었지만, 도시에서 집과 직장을 오가며 보게 되는 건물, 자동차, 또 건물, 자동차로 이어지는 삭막한 풍경에 비하면 시원스런 광경이었다. 적벽강 절벽 위에서 바다를 향해 서있는 수성당은 칠산 바다를 관장하는 '개양할미' 혹은 '수성할미'의 집으로, 정월 보름에 사람들이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어를 비는 수성당제를 지낸다. 수성당 주변을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은 선사시대 이래 바다에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이 확인되었다. 절벽 주변에는 동백나무와 시누대가 무성한데, 그 아래로 해식동굴이 있다. 파도가 심한 날에는 바다가 울부짖는 소리를 낸다고 한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이 소리는 바다 소리의 원천이며 두려움의 대상이기에 미당 서정주도 칠산바다 울음소리를 시로 남겼다고 한다. 예전에는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는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함부로 버린 쓰레기 더미가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적벽의 넓은 해안을 온통 우리 기행팀이 차지하여 물수제비를 띄우고,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우다 거북바위마을이라는 뜻의 '구암리(龜巖里) 고인돌'을 찾았다. 고인돌은 고여있는 돌, 굄돌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도 지석묘(支石墓)는 받침이 있는 무덤을 뜻한다. 고인돌의 한 가운데 밑은 사람이 누울만한 공간이 있고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이 무더기로 나왔다고 한다. 우리가 찾은 시간에는 근처 인가에서 보릿대를 태워 매쾌한 연기가 가득히 퍼지고 있었다. 조금 더 늦은 시간이어서 붉은 저녁놀이라도 하늘에 물들었었으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체취까지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깔끔하게 조성된 고인돌 무더기가 주변의 민가들로 포위되어 마치 마을 속의 공원같은 느낌이었다. 고인돌 유적에 대해 과분하리 만치 친절한 설명을 해주신 문화해설사 선생님을 뒤로 하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부안읍 서외리 당간을 찾았다. 여정에 없던 코스로 원래는 서문안 당산을 보며 차창 너머로 간략한 설명만 들었던 것이지만, 당간으로서 드문 형식의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기행팀 모두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하여 들른 길이었다. 재난이 닥칠 때면 깃발을 달고 제사를 지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 이 당간은 몇 토막의 화강암 기둥을 철대로 연결시킨 것으로, 용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모습이 당간 꼭대기까지 새겨져 있다. 대개 줄다리기가 끝난 뒤 용을 상징하는 동아줄을 감아놓고 해마다 교체하는 것인데, 이곳에서는 아예 돌에 새겨놓은 것이 특이했다. 서문안 당산의 솟대처럼 당간 끝에 오리나 봉황과 같은 새가 있었다고 추정되는데, 형식은 소박하지만 그 스케일만큼은 하늘까지 닿아있었던 옛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고참 선생님들은 백제기행의 진수는 우중답사(雨中踏査)라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오늘 찾아갔던 곳에 비가 내렸더라면 변산반도 그 눈부신 곳들이 빗물에 윤기를 발하며 더욱 깨끗하고 싱그러운 자태를 보였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아름다운 장면 뒤로 배어 있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었다. 변산(邊山)의 변(邊)은 가장자리를 뜻하는데, 역사 속에서도 가장자리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중심에서 소외된 아웃사이더들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혁과 개혁을 꿈꾸었던 것일까! 백제부흥전쟁의 복신과 부여풍, 미륵신앙으로 백성을 제도한 진표율사, 우반동의 반계 유형원과 홍길동의 허균. 예전에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공자(孔子)께서 '부모에게 효(孝)를 행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효를 행해야 하는 당위(當爲)를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 효를 행하지 않는 현실을 고발한 것으로, 정면(正面)이 있으면 반면(反面)이 있고, 모든 당위들의 반면에는 그렇지 못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변혁과 개혁이 필요했던 당시의 급박한 사정이 지금 우리에게는 한갓 이야기거리에 불과하지만, 그릇된 일들에 고개를 치켜 들 수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만큼은 반드시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변혁과 개혁의 시도가 비록 불발로 그쳤다 하더라도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들의 멋이 이 땅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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