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 |
[테마기획] 극장을 추억하다 1
관리자(2010-12-02 17:40:17)
극장을 추억하다 1
눈물겨운 감동의 추억, 그 공간
좁은 객석과 허름한 매점 하나, 그리고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구식 영사기가 전부였던…. 여름이면 비 오듯 땀을 흘리고, 겨울이면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우리는 그 좁은 사각 공간 안에서 한편의 영화와 더불어꿈을 꾸었다.붓으로 직접 그려 페인트 원색의 물감이 금방이라도 튀쳐나올 것 같은극장 간판과 냄새 풀풀 풍기는 오징어와 사이다, 좋은 자리를 맡기 위한 치열한 자리싸움 조차도 정겨운 풍경이었다. 표를 구하기 못해 발을동동 구를때면 어디선가 나타나는 암표상들과의 밀회(?)로 극장 입장에성공했을 때의 기분은 또 얼마나 짜릿했던가.우리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오래된 영화관들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에게 꿈과 희망, 삶의 위안을주던 오래된 영화관은 이제 추억이 되었다.1990년대 말 부터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하나 둘 문을 열면서 오래된 영화관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전라북도의 수많은 영화관 역시 이미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변했거나 문을 닫았다. 그 시절의 추억 가득한 영화관은 이제 우리에게는 아련한 추억이다.가슴 뛰게 했던 그 사각 공간. 이번 테마기획에서는 그때 그 시절, 추억의 영화관을 돌아봤다.
관객의 욕망 분출해낸 근대의 산물
- 박노현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극장(劇場)은 하나의‘공간’이다. 또한 극장은 하나의‘장소’이기도 하다.공간으로서의 극장이란 전대와 구별되는 새로운 건축물의 등장을 지시하고, 장소로서의 극장이란 그로 인해 생성된 문화적 심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극장은 온전히 근대의 산물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현재와 같은 개념,즉 상연 혹은 상영을 목적으로 하는 실내 전용 공간으로서 극장의 역사는—‘극’의 역사와는 달리—대략 백 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근대의공간이 비단 극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극장과 더불어 교회와 학교 등은개화기 조선에 나타난 근대의 대표적 공간이다. 이러한 세 공간은 각기 상연/상영, 신앙, 학습의 공간으로 갈라지지만, 한편으로 이전의 유교 윤리에서는 쉽사리 상상할 수 없었던 이성(異性)의 집합소라는 점에서 연애의장소라는 공통점을 지니기도 하였다.
근대적 극장과 근대적 관객-대중의 형성
그런데 근대적 공간이자 장소로서 극장이 지니는 의미는개인의 욕망이라는 측면에서 교회나 학교에 비해 좀 더 각별하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신성(神聖)과의 대면을 주조로 하는 절제의 공간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학교 역시 사회화를위한 이성(理性)의 습득을 중핵으로 하는 통제의 공간이라고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와 학교는 예배와 수업이라는 의식(儀式) 혹은 규율이 지배하는 공간인 것이다. 이러한공간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내밀한 욕망을 유보하거나 지연시킬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극장은 다르다. 교회와 학교가욕망을 감추는 방법을 배우는 공간이라면 극장은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을 알려준다.어두운 객석에 앉아 무대 혹은 스크린 속 허구의 인물을훔쳐보는 현실의 관객은 오래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했던 것과 같이 욕망의 발산과 해소를 기대하게 마련이다. 극장 밖의 고단한 현실에 머물던 사람들이 극장 안으로 입장하는 순간 상상과 환상이 마련해 놓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고들음으로써 억압된 욕망의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극장 안에서는 욕망의 유보와 지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극장은 무대와 스크린이 재현하는 세계에 대해 웃음과울음, 기쁨과 슬픔, 공감과 반감 등의 정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 허락되는 유일한 현실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극장이라는 근대적 건축물은 실외와 실내를경계로 현실과 상상의 자유로운 이동을 체험케 하는 마력(魔力)의 공간인 셈이다.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은 1902년 황실에서 설치한 협률사(協律社)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국립 극장이라고 할 수있는 협률사는 애초에 황제의 공간으로 설립되었다가 황실재정 확보를 위한 영리 추구로 용도를 변경하면서 대중(public)의 공간이 되었다. 이를 필두로 광무대·단성사·연흥사(1907년), 원각사·장안사(1908년) 등의 극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대인들에게 극장이라는 공간은대단히 낯설고 신이한 곳이었다. 극장이 형식이고, 그 안에서 행해지는 상연/상영의 레퍼토리를 내용이라고 했을 때,당대인들에게 형식은 내용만큼이나 아니 내용 이상으로 흥미롭게 다가왔다.극장의 한자 조합을 그대로 풀어쓰면‘극마당’인 것처럼근대적 극장이 들어서기 이전의 행연(行演)은 주로 마당, 즉궁궐이나 시장터에 마련된‘임의’의‘실외’에서‘자연광’을이용해 이루어졌다. 근대적 극장의 탄생은 이러한 조건의 전복을 의미한다. 극장은 (극)마당과 달리‘고정’된‘실내’에서‘인공광’을 통해 상연/상영하기 때문이다. 마당에서 극장으로의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공간 이동을 뜻하지 않는다.마당이라는 공간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으로의 이동은 문화생산과 소비의 주체인‘대중’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바, 그것은 곧 극장에 대한 장소성의 부여를 전제로 하기때문이다. 즉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정서적 장소로서 인식되는 것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일련의 문화적 학습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이는 곧 근대적 극장에 걸맞은 근대적 관객-대중의 형성을 의미한다.
극장 문화의 변화
마당에서 극장으로의 공간 이동은 근대적 관객을 등장시켰다. 사방이 널리 트인 마당이라는 환경에서는관객과 비관객의 구별이 용이하지 않았다. 특히 주로커다란 장터에서 벌어지던 가면극과 탈춤은 관객과 상인과 행인(行人)이 혼재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극장은 실외에서 실내로 입장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통해안팎의 분명한‘경계짓기’가 이루어짐으로써 식별 가능하고 추산 가능한 관객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전대의 관객과 달랐다. 마당에서의 공연이 주로 공연 주체가 관객을 찾아 마을과 마을을 옮겨 다니며 행해졌다면, 극장에서의 상연/상영은 관람 당사자인 관객이 볼거리를 찾아오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즉 이들은 감상혹은 관람의 의지가 분명한 관객이라는 점에서 시장통을 오가다 잠시 눈길을 주는 관객과 구별된다. 더욱이 이들은 더 이상 낯익은 이웃들이 아니라 특정한 연극/영화를 보기 위해 서로 다른 곳에서 모여든 낱낱의개인이었다. 익명의 개인이 모여 어두운 실내에서 연극/영화를 함께 보며 무대/스크린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집단으로서 공유하는 것이다.마당-극장이라는 공간의 이동이 가져온 안팎의 경계짓기는 현재와 같은 극장 문화의 시원(始原)이라고할 수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분별’의 준거점을 마련하는 전초가 되었다. (밝은) 실외와 (어두운) 실내의공간 구분을 기본으로 하여 원형에서 장방형(프로시니엄)으로의 무대 변화와 이로 인한 무대와 객석의 선명한 분리는 무대/스크린의 세계가 지닌 환상성을 한층 강화시켰다. 당대인들은 극장이라는 공간에 진입하는 순간 각박한 현실에서 벗어나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직접’보여주는 황홀경을 경험하게 된것이다.그런데 이러한 극장 문화가 극장 탄생 초기부터 현재와 같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여가로 받아들여진 것은아니었다. 1910년대를 전후로 한 극장 관련 신문 기사는 극장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장소로서의 의미를 부여해가는 당대인들의 문화 학습 양상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폐쇄된 공간 안에서 익명의 남녀가 함께 본다는충격적 관람 행위는 엉뚱하게도—특히 남성들로 하여금—시선의 방향을 무대의 인물에서 객석의 이성으로향하게 하였다. 또한 화장실을 함께 쓴다는‘공중’과‘위생’에 대한 관념이 부재하던 당시에는 극장에 설치된 공중 화장실에 대한 거부감에 요강을 들고 입장하는 여성 관객 역시 적지 않았다. 어쩌면‘영화 보러 가자’의또 다른 표현인‘극장 구경 가자’의 기원은 이처럼 극장 그자체를 흥미로운 구경거리로 여겼던 1900~1910년대로부터연원한 것인지도 모른다.하지만 이러한 극장 초기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풍경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10년대 중반을 전후로 한 시기에 이르면 당대인들은 오히려 자발적으로 화장실의 청결 문제, 정숙한 관람 태도, 레퍼토리에 대한 요구 등과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놀라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관극 문화를 정착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객석의 이성을 흘낏 거리던 관객의 시선은 다시 무대의 인물(배우)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무대/스크린이 보여주는허구의 세계를 함께 바라봄으로써 감정과 정서를 공유하고,세계와 사회에 대해 배우며, 현실의 세계에 대한 담론을 형성해내는 관객, 즉 문화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대중으로 성장하였다.
극장 탄생 초기의 솔직함을 추억하며
어릴 적 극장(영화관)에 가면 항상 두 번의‘기립’을 했던기억이 여전히 또렷하다. 한 번은 영화의 시작에 앞서 스크린을 가득 채운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며 애국가를 따라 부르기 위해서였고, 또 한 번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영화가 전해준 내밀한 울림을 참지 못해 박수를치기 위함이었다. 전자가 애국을 강요하던 시대의 웃지 못할 해프닝이라면, 후자는 한 편의 극(劇)과 주고받은 교감에대한 자발적 반응이었다.하지만 요즘의 극장에선 소위‘에티켓’으로 포장된 타자의시선에 대한 경계로 인해 박장대소와 대성통곡과 기립박수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인 듯하다. 타인에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정서를‘들키는’것이 위험한 시대가 되어버린 요즘, 극장탄생 초기의 왁자지껄함이 새삼 부러워지는 것은 왜일까.
박노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같은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2008년〈텔레비전 드라마 미학 연구-한국 미니시리즈의 극문학성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과 한국극예술학회 연구이사로 재임 중이다.저서로는『드라마, 시학을 만나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