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 |
[테마기획] 극장을 추억하다 2
관리자(2010-12-02 17:40:06)
극장을 추억하다 2
일탈의 공간에서 재생과 회복의 공간으로
- 이영호 전북독립영화협회 이사장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군산은 일제식민지배의 미곡 수탈의 중심도시로 일본인 거주지역과 본래 군산 사람들이 사는 거주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미곡창고와 세관, 은행이 서 있던 선창가 거리, 행정거리인 중앙로, 상가가 밀집된 영동거리, 법원거리와 주택지들이 군산항만을 바라보며 둘러싸듯 모여 있고낮은 산과 언덕 기슭 쪽으로 본래 군산 사람들의 거주지와 시장 거리가 있었다.
오래된 극장이 사라진다
그 경계지역인 좁은 골목길에 두 곳의 극장이 있었다. ‘전북 영화사’에 관한 조사에 의하면 이 극장들은 일제 때부터조선 사람들과 일본인 자신들의 여흥을 위하여 개관한 현대식 극장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극장사업은 그 생성과 소멸의변동이 많아서 시대 문화적 자취로서의 실상이 분명하지 않다. 극장 사업자 자신들의 기록이 전무하던 시대로 미루어이 지역의 극장의 모습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80년대 들어서서 전북 지역의 극장 현황은 그 명멸이 불확실 하지만 전주시만 하여도 (멀티플렉스 영화관 이전) 12개극장이 명멸하였다. 내 어린 시절 군산의 두 극장이 근래에5곳이 넘는 극장으로 개관 휴관의 길을 걸었고 익산은 최근까지 9곳의 극장이 명멸했다. 남원시에 5곳, 정읍시와 김제시는 한곳의 극장들이 유지되어왔다. 시대의 변천 특히 영상문화의 발전으로 다른 연예물의 공개가 분화되면서 극장은단일연예라 할 수 있는 영화 상영 장으로서만 유지 발전하게되었다. 복합적인 대형 공연장 아니면 연극 전문 공연의 이러한 극장 현실은 다각적인 조사와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같다. 통계적인 조사 연구는 잠시 접어 두면서 나의 어린 시절 그 때의 극장을 그려볼 셈이다.
4~50년대 극장의 풍경
일본인들이 물러간 주거지역에서 두 불럭을 가면 개복동지역이다. 이곳은 주로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극장이라고 알려진‘희소관’이라는 극장(후에 남도 극장으로 개명)과‘군산극장’이 있었다. 두 곳 모두 해방 전에 세워졌던 이층 건물의 극장으로 당시로는 제법 큰 대형 극장이었다.나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40년대 말에서 50년대 초, 초등학교 시절과 50년대 중반, 중학교 시절, 두 극장은 나의 행동반경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극장과 내 집 사이에 있던 일본인의 사찰에서 예배를 드리던 작은 교회, 주일교회학교의 담임선생님께서 어린 우리들과 매우 가까운 사이로 지나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희소관’과‘군산극장’의 광고미술을 담당하신 분이었다. 선생님을 따라 극장에 들러 유명한 배우들의 대형 얼굴이 그려지고있는 미술 작업실에서 놀기도 하고 선생님께서 허락하시면살그머니 극장 안으로 들어가 상영 중인 서부영화도 볼 수있었다. 자연스레 중학생 시절까지 선생님을 뵈러(?), 영화를보러(?) 자주 극장에 들락거리는 일이 많아졌다.우리 가족은 조부모로부터 대대로‘굿거리’를 즐기는 혈맥을 타고 났다. 일본 코오베(神戶)에서 사셨던 어머님께서 당시 오사카에 있던 요즈음의 멀티플렉스 식 극장 이야기를 하시며 즐거워 하셨던 일이 기억난다. 젊은 고모들은 사법기관이 특별하게 사용할 수 있는 페스포트를 가지고 극장을 들락거리고 자주 그 특권을 나도 함께 누리기도 하면서 극장은나의 어린 시절, 일탈의 공간이었다. 그 때의 극장 안은 삼엄했다. 아마 80년대까지 이어져 왔을 극장 안팎에 임검석이있어 그 자리에는 파견 경찰과 교육청 파견 교사들이 감시를하고 있어 미성년자들의 출입이 쉽지 않았다.당시의 극장은 다양한 연예물들이 공연되고 영화가 상영되었다. 50년대 중반까지 여러 가지 공연물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무용 서양무용 등의 발표공연, 독창발표회, 판소리보다는 여성창극, 영화와 연극이 섞여진 공연, 무성영화‘( 희소관’의 변사 마정봉 씨가 유명했다), 그리고 유치진의 <원술랑> 같은 우리나라의 창작 연극 무대 등은 지금도 기억이뚜렷한 극장 경험이었다.
그 때 그 시절 일탈의 공간
차츰 우리들의 극장에서 공연물인 연극이나 무용, 성악발표들이 물러나면서 극장은 문자 그대로 영화 상영을 위한 영화관으로 변전되었다. 아마도 70년 중반에 전주의 코리아극장(오늘의 시네마타운영화관)의 큰 무대에서 본 뮤지칼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전주 출신 현대무용가 육완순교수의 안무)가 공연된 것이 극장의 복합 기능 역할을 마지막으로 한 것이 아닌가 여긴다.요즈음,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의 홍수로 유럽 여러 나라의좋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물다. 50년대 어린 시절,나는 지방 극장에서 세계영화 100년사에서 빛나는 명화들을감상할 수 있었다.프랑스의 영화, 장 꼭또의 <미녀와 야수>, 마르셀 까르네의 <인생유전>, 장 들라노아의 <전원교향곡>, 줄리앙 뒤비비에의 <망향>, 이태리 감독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등 그리고 중학교 시절 변장을 하고 고모님과 함께 보았던 데시카 감독의 <종착역>, 제니퍼 존스 몽고메리 크리프트가 출연한 영화, 열차 터미널 열차 칸 안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키스신은 내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일탈의 공간이었다.수도 없는 영화들은 학교 수업이 자유로웠던 그 시절이었기에 장벽 없이 일탈의 시기를 즐기던 소년의 감성에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주일학교 교사의 너그러운 품속에서 자유롭게 즐겼던 영상 세계는 그 시절 고급화된 천연색자동 복사 인쇄술이 도입되기 전, 대형 간판이 극장 홍보의중심이었기에 가능했다. 소년에게 아름다운 꿈의 기회를 주셨던 그 선생님은 몇 해 전 하늘로 가셨고, 그 소년은 노년이되어서야 그 꿈을 향기롭게 먹으며 살고 있다.허술했던 그 시대의 극장은 마치 교도소의 벽처럼 높은 담으로 닫혀 있었지만 그 담들을 들락거리며 일탈을 즐겼다.한번쯤은 극장 앞에서 임검을 하던 훈육선생님께 발각되어몇 놈의 중학교 친구들이 집단으로 훈육실이라는 곳에서 몇날을 무릎 꿇고 반성하던 때도 있었다. 조금은 부끄럽고 즐거움은 많았던 극장소년 시절 그러다 보니 <시네마 파라다이스>가 떠올린다. 선생님을 통해 어렵게 들어갈 수 있었던극장의 영사실은 꿈의 장소이었다. 둥근 필름말이(릴)가 돌아가며 작은 유리들창 밖으로 쏟아져 나가는 신비스런 광선은 나의 꿈의 세계이었다. 영사실 바닥에 잘려 나와 흩어져있는 35mm 필름 조각들은 나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었다.주어온 필름 조각에서 천연색 영화의 한 장면이 나오면 더말할 것이 없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오는 필름조각은오래도록 내 책상의 가보였다.서울에서 고교시절을 지나는 동안 역시 극장은 여전히 고서점과 함께 일탈의 공간이요 꿈의 어두운 공장이었다. 줄리앙 뒤비비에의 <나의 청춘 마리안느>를 보고 나오던 중 입구에서 검문하던 지도교사에게 모자를 빼앗긴 채 남영동의성남 극장 앞에서 줄행랑을 쳤던 때도 있었지만 어느 땐 단성사나 스카라 같은 시설 좋은 극장으로 허락된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아란 랏트가 멋진 권총 쏘기의 연기로 유명한 <셴>이나 르네 끌레망의 <금지된 장난>은 그 시절 나의 극장공간이었다.스탠더드, 비스타비전, 시네마스코프, 시네라마 형식의 대형(70mm 필름을 위한) 스크린으로 우리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압도되기도 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거대한 어둠상자(Obscura)인 극장공간의 변천이 있기 전 나의 소년 시절에동료 친구와 함께 교과서에 나와 있는 영화 시나리오를 만화로 완성해보기도 하던 시절, 고물상 가게에 있던 조그만 환등 영사기를 발견하고 겨우 빌려 즐기던 나의 작은 방은 어둠상자(obscura)이었다. 등잔불에 비추어 반사되는 빛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환등기였다. 서너 명의 친구들이 둘러 앉아한 플레임씩 천연색으로 인쇄된 종이 필름말이(약 2분길이)를 돌리며 감상하던 그 신비로움은 우리들의 가슴을 조용히두근거리게 하였다. 마치 잉마르 베리만이 어린시절‘시네마토그라피(환등 영사기 종류)’를 즐기던 신비스런 감성의 극장이기도 하였다.
부정적 공간에서 창조적 공간으로의 변화
오랜 기간 우리들의 삶에서 극장은 관습적 가치사회 안에서 인정받는 공간일 수 없었다. 전래해 온 종교적 윤리적 상식에 따라 근접해서는 아니 될 부정적 공간이었다. 그래서그 시대 극장은 일탈의 공간이 되었다. 일탈의 경험이 긍정적으로 살아나 극장 -영화관- 은 선택적이기는 하지만 이제오히려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중심 공간이 되었다. 세상을 인식하고 세상과 함께 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공간이되어가고 있다. 거대한 어둠의 상자-영화관으로서의 극장-는 재생과 회복의 공간이 되고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일탈의 시기에 맛보았던 문화유산들이 더 귀중하게 여겨진다.
이영호 한일장신대 총장을 역임한 바 있다. 현재 전북독립영화협회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