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 |
[테마기획] 극장을 추억하다 6
관리자(2010-12-02 17:39:28)
극장을 추억하다 6
아릿한 청춘의 그때 그 곳
- 김광오 동아일보 호남본부장, 사단법인 마실길 이사장
1971년 가을이었다. 내가 영화를 보고 처음 잠 못 이룬 것은. 전주로 유학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중학교 1학년. 붓으로 그린극장 간판에 홀려 들어갔다. 전주 코리아 극장. 지금 전주시네마자리다.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 1951년), 흑백영화였다.
“조지 스티븐스 감독. 몽고메리 크리프트, 엘리자베스 테일러.셜리 윈터스 주연. 가난한 시골청년 조지 이스트먼(몽고메리 크리프트 분)은 우연히 부자인 숙부를 만나 수영복 제조 공장에 일자리를 얻는다. 공장에서 비슷한 처지의 아리스 트립(셜리 윈터스)을 만나 깊은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나중에 만난 부잣집 딸안젤라(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다 전 애인이 실수로 죽게 되고 조지는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떠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밥맛도 없었다. 수업시간이고 뭐고 온통 그생각뿐이었다. 정확히는‘그녀’생각뿐이었다. 스무 살의 엘리자베스(리즈) 테일러. 눈이 부셨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3일 뒤다시 그 영화를 보러 갔다.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요즘말로‘리즈앓이’‘리즈폐인’이었다. 리즈는 이 영화에서 상대역을 맡았던 몽고메리 크리프트(애칭 몬티)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때문에 8번(9번인가)이나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고들 했다. 고등학교 때. 리즈의 남편이었던 배우 리차드 버튼이 한 인터뷰에서“리즈는 결코 미인이 아니다. 몸매에 비해 가슴이 너무 크고 다리가 짧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순간 살의(殺意)를 느꼈다. “그러면서 왜 두 번씩이나 데리고 살아. XXX”
6년간의 전주 극장 순례
나의 전주 극장 순례는 이렇게 시작됐다. 1971년에서1976년까지 6년 동안 전주에서 상영된 외국영화 가운데 내가 보지 않은 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중1에서 고3까지다. 자율학습이란 이름의 타율로 붙잡혀있던 학교도서관에서 저녁이면 책을 펴 둔 채 빠져 나왔다. 극장 안에만 들어오면 모태처럼 편안했다. 낮에는 졸렸다. 학생주임은 당초부터 그리 무서워하지 않았다. 학생이걸리지 않고 극장에 들어가는 법? 간단하다. “표를 산다. 들어간다.”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법과 비슷하다. 쭈뼛거리면 더 걸린다. 너무나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들어가니 극장주인 아들이 제 집 들어가는 걸로 봤는지, 교장 선생 아들이 아버지 만나러 온 걸로 생각하는지 거의 제지를 당한 적이 없다.기도라고 불리던 표 검사원은 반가운 체를 했다. 나중에는경찰이나 학생 주임 자리인 임검석에서 보기도 했다. 그때 극장에는 맨 뒤편에 경찰이 앉는 임검석이라는 높은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는 앞 사람 뒷꼭지에 가리지 않아 편했다. 경찰 아저씨들은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지, 간첩 잡느라 바빠서인지그 자리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학생이 영화 보는 걸 담배 피우기보다 더‘사악한 짓’으로 여겼던 옆자리 범생이는 혹시 병균이라도 묻어 옮을까봐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법조인이 된 그 친구가 지금도 그 때의 시각으로 세상을 단죄하지 않기를….1970년대 중반. 사회나 학교나 반 병영이었다.유신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종말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날이 많았다. 소풍날엔 요대 각반을 차고 행군을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지 말라고 바지 호주머니를 모두 꿰매도록 했다.극장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1970년대 국내 영화계는 정점을 넘어 내리막을 가던 시기였다.1960년대 화려한 시절을 지나 규제와 외화의 위세에 눌려 납작 엎드려 있던 시기였다. 하길종 이장호 배창호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겨우 호스티스 영화로 연명하던 시기였다. 제작된 지 10여년이 지난 미국의 종교영화와 서부영화, 할리우드 영화가 휩쓸던 시기였다.
‘젊은이의 양지’에서‘솔로몬과 시바’까지당시 전주의 극장은 지금의 CGV인 삼남극장과 전주시네마가 된 코리아극장 양강 체제였다.두 극장은 일단 규모가 가장 컸고 개봉관이었다. 요즘은모든 극장이 개봉관이지만 당시는 새로 개봉하는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제한돼 있었다. 나머지는 재개봉관 이거나 재재개봉관이었다. 뮤지컬‘남태평양’과 같은 대형영화는 화면이큰 코리아나 삼남에서만 상영이 가능했다.70년대는 쇼의 시대였다. 코리아와 삼남극장에서는 수시로 쇼를 했다. 주인공은 남진 나훈아 하춘화 최희준 김세레나 후라이보이 등이었다. 막 데뷔한 혜은이가 코리아 극장에서 리사이틀을 하던 날 한 친구는 아침부터 접이의자를 들고줄을 섰다. 경원동 전북예술회관 맞은 편에 있던 아카데미극장은 외국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당연히 내가 가장 많이 찾은 곳은 삼남과 코리아 아카데미였다.벤허(윌리암와일러), 십계(찰톤헤스톤, 율 브린너), 쿼바디스((데보라 카), 기적(로저무어, 캐롤 베이커) 등 장엄, 거룩모드의 종교영화를 본 곳도 그곳이었다. 애수(로버트테일러), 카사블랑카(험프리 보가트), 졸업(더스틴 호프만), 피서지에서 생긴 일(산드라 디), 초원의 빛(나탈리우드), 남과 여(아누크 에메)도 이곳에서 봤다. 알라모(죤 웨인), 셰인(앨런래드) 등 서부영화,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갱들, 석양의 무법자(클린트 이스트우드)등 마카로니 웨스턴, 용호의 외팔이 시리즈와 이소룡의 빅4(당산대형 정무문 용쟁호투 맹룡과강)는 여전히 얼마 전 본 영화처럼 생생하다.방화는 애국심으로‘봐줘야’하는 영화였다. 극장은 손님이 드는 외화를 상영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방화를 상영해야했다. 방화 의무상영 쿼터는 그 후 30여년이 지난 뒤에야 폐지됐다. 애국가, 대한늬우스, 문화영화, 정부홍보영화까지본 영화를 보기까지 반드시 봐야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한늬우스나 문화영화, 정부홍보영화는 한 두 달 만에 바뀌니 내용을 외울 만큼 여러 번 봐야했다.코리아극장 옆 제일극장은 한 물 간 한국영화(방화)를 주로 상영했다. 제일극장 안에는‘방화를 사랑하자’는 포스터가‘쥐를 잡자’와‘간첩을 때려잡자’는 포스터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호스티스 영화인‘영자의 전성시대’와 속편‘창수의 전성시대’를 본 것은 제일극장이었다. 여배우 염복순이호스티스 영자로, 지금은 원로배우가 된 탤런트 송재호는 창수였다. 목욕탕 신에서 젊은 송재호의 엉덩이가‘통째로’나온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영화다. 불량기 있는 여학생들도얼굴을 붉히고 손가락 사이로 봐야했다.남부시장 옆 성원오피스텔 자리에 중앙극장이 있었다. 바로 옆에 시외버스터미널인 남부배차장이 있어 버스 시간이맞지 않을 때 가끔 들렀다. 고사동 전주백화점 골목에 있던전주극장은 정작 영화관보다 튀김골목으로 유명했다. 머리긴 디제이가 엘비스 프레슬리나 톰 죤스, 클리프 리챠드의팝송을 틀어주는 튀김집이 몰려 있던 전주극장 골목은 학생출입 통제구역이었지만 언제나 학생들로 붐볐다.오거리 우신여관 자리에는 박노식 나오는‘마도로스 부르스’같은 철 지난 한국영화를 동시에 두 편 씩 틀어주는 시민극장이 있었다. 오래된 필름 때문에 화면에서만 비가 오는것은 아니었다. 비가 오는 날엔 실제 천정에서 비가 샜다. 의자도 서너 개 가운데 하나는 부서져 있었다. 쥐도 많았다. 발등 위로 지나가는 쥐 때문에 여성들이 영화를 보다 비명을지르는 경우는 흔했다.두 극장에서 필름을 번갈아가며 동시에 같은 영화를 상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삼남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한 뒤 곧바로자전거에 필름을 싣고 달려가 아카데미극장에서 틀었다. 상영 시간이 긴 대작 영화는 중간이 10~20분 씩 휴식시간이있었다. 시간이 길지 않은데도 중간에 쉬는 경우가 있었다.필름 두 통 가운데 한 통을 한 극장에서 돌린 뒤 자전거로 필름을 옮기다 미처 도착하지 않은 경우였다. 휘파람 몇 번 불다 마냥 기다렸다.6년 동안의 전주 극장 순례는 1976년 겨울 끝났다. 1976년 12월 어느 날 대입 예비고사 보기 바로 전날, 경원동 아카데미극장. ‘솔로몬과 시바’. 약간의 주저는 있었지만 결국극장으로 향했다. 다음날 시험 내내 솔로몬 왕(율 브린너)을유혹하는 시바여왕(지나로로 부리지다)의 밸리댄스만 떠올랐다.나의 극장 순례기(혹은 여배우 편력기)는 이후 서울 경복궁 앞 프랑스 문화원으로, 2000년 이후‘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관’멀티플렉스 메가박스로 지금까지 40년 동안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며칠 전 롯데시네마에서 더스틴 호프만의‘하비의 마지막로맨스’를 봤다. 세월을 실감했다. ‘졸업’에서 20대의 뽀송뽀송하던 더스틴 호프만이 얼굴에 온통 주름이 자글자글한70이 넘은 모습을 보면서 자꾸 눈물이 났다.그립다. 70년대 전주의 옛날 극장, 내 젊은 날의 소도(蘇塗).
김광오 동아일보 호남본부장이자 사단법인 마실 길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