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 |
[테마기획] 극장을 추억하다 7
관리자(2010-12-02 17:39:18)
극장을 추억하다 7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 정상권 새전북신문 뉴스콘텐츠연구소장
골라보는 재미 가져온 멀티플렉스 영화관
45억 원에 낙찰되어 한국화 중 가장 비싸게 판매된 그림‘빨래터’를 그린 박수근 화백과 제2차 세계대전의 주역 아돌프 히틀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그들은 한때 극장에서 영화간판을 그린 화가였다.요즘에는 극장에 내걸리는 영화간판도 모두 사진으로 실사 출력되는 시대지만 20~30년 전만 해도 영화간판은 극장화가들이 페인트 붓으로 직접 그려서내걸었다.영화의 거리와 가까운 곳에 살았던 나는 어린 시절 가끔씩 영화간판을 그리는 붓 끝에 넋을 빼앗기고 쪼그려 앉아서 김승호 박노식 최무룡 허장강 황정순 김지미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의 모습이 완성되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이제 극장 페인트로 슥슥 그려내던 영화 간판은 사라졌다. 영화간판을 그리던 극장화가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이 그리던 영화간판은 사진만큼이나 뚜렷한 실사출력으로 대체되었다.어디 극장 간판만 바뀌었을까. 연소자 관람불가영화를 보다가 단속에 걸린 중고생들의 모습도, 한꺼번에 두 편의 영화를 상영해주는 재개봉관도 사라졌다. 넋을 잃고 영화를 보다가 발아래로 지나가는쥐들 때문에 가끔은 깜짝 놀라야만 했을 만큼 음산했던 극장은 현대식 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멀티플렉스, 즉 복합상영관의 등장은 영화마니아들에게‘골라보는 재미’까지 안겨주고 있다.극장에 먼저 들어가는 순서대로 좋은 자리를 차지했던 풍경은 사라지고 요즘에는 입장권에 적힌 좌석번호를 찾아가앉는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울려 퍼지던 애국가에 맞춰 관람객 모두 기립해서 충성을 다짐하던 모습도 자취를 감추었고, 대 국민 홍보도구로 활용되던‘대한늬우스’도 없어졌고,마음 졸이는 장면에서 피워대던 담배연기도 사라졌다.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중에도 어둠을 뚫고 먹을거리를 팔던 모습도 옛 이야기가 되었다.70~8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가 한창 상영되고 있을 때도아무렇지 않게 극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영화의 중간부터보기 시작해서 다음 회에 다시 시작 부분을 보고 전체 스토리를 꿰어 맞추는 식의 영화 관람도 가능했던 것이다. 때문에 재미있는 영화는 하루에 두 번 세 번 관람도 가능했다. 이제 극장 입장과 퇴장을 철저히 관리하고 좌석제를 실시하고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의 영화 관람은 불가능해졌다.진북동의 공무원주택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전주비행장에서 이륙한 소형비행기가‘다다다다’소리를 내면서 영화 홍보 전단(우린‘삐라’라고 불렀다)를 뿌려대면, 동네 조무래기들이 한 장이라도 더 주우려고 열심히 달음박질치곤 했던 추억도 이젠 가물가물해졌다. 영화를 보면서 먹던 주전부리도바뀌었다. 70년대엔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다가, 80년대엔쥐포를 찢어먹었고, 이젠 팝콘과 음료수를 먹는다. 영화를상영하는 극장가에도 궁핍의 시대는 가고 풍요의 시대가 온것이다.
궁핍했던 시대의 영화관람
즐길만한 여가거리가 별로 없던 70년대 언저리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라면 기억이 날 것이다. 학교 생활기록부에 적어냈던 취미와 특기라고는 고작해야 독서, 영화감상,펜팔, 운동, 노래 부르기가 전부였다는 것을 말이다. 영화감상이 취미라고 적어낸 사람도 그저 영화감상을 좋아한다는것을 표현한 것이었지, 마음껏 영화감상을 즐기고 있다는 뜻으로 적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기때문이다.그래도 영화가 나는 곧잘 영화를 보았다. 미원탑 부근에있던 공보관이나, 문화촌 자리에 있던 공설운동장, 그렇지않으면 집과 가까운 전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곧잘 무료영화가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반공영화나 계몽영화들이었지만 영화가 상영되는 날이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위해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집을 나서곤 했다. TV조차 흔하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무료영화는 언제나 만원사례였다.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단체 영화 관람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1년에 서너 차례, 대부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 실시하던 단체 영화 관람을위해 우리들은 학교에서부터 줄지어 극장으로 향하곤 했다.내 기억에 남아있는 최초의 단체 관람 영화는 반공영화였던<돌무지>였다. 개발도상국이었던 우리나라가 발전해가는모습을 담았던 일종의 계몽영화 <팔도강산>, 전남 신안군사치분교 농구팀이 소년체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것을 극화한 <섬개구리 만세>도 단체로 관람했던 영화였다.중·고등학교 시절 단체 관람했던 영화는 불후의 명작들이었던 <벤허>, <십계>, <러브스토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이었다. 단체 영화 관람 날이 다가오면 남학생들은영화제목보다도 어느 학교와 함께 영화를 보느냐에 더 큰관심을 쏟았다. 혹시라도 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단체 관람이 겹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괜시리 환호성까지 질러댔던 것이다.
몰래보던‘뚜룩 영화’와 청소년관람불가
가끔씩 우리는‘도둑 영화’도 보았다. 담을 넘든 개구멍을통하든 몰래 극장에 숨어들어 보는 도둑 영화를 우린‘뚜룩영화’라불렀다.‘ 뚜룩’은‘훔치다’는의미를지닌전라도사투리였다. 또 우리들은 뚜룩 영화를 보려고 극장에 숨어들어가는 것을‘쎄코 뚫는다’는 은어로 표현하기도 했다.전주에는 공보관과 전주극장, 코리아극장, 삼남극장, 제일극장 등이 있었는데, 제일극장은 영화 두 편씩을 상영하는재개봉관으로 시설도 가장 낙후되어‘빈대극장’이라는 별칭을 지니기도 했다. 지금의 관통도로 풍패지관옆에 있던 전주극장에서는 영화뿐 아니라 연극공연이나 리사이틀이라는 이름으로 가수들의공연이 자주 벌어졌다.한국영화의 침체기였던 70년대엔 홍콩의 제작사‘쇼 브라더스’가 만든 중국 무협영화와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가 인기였다. 아직 성룡이 나오기 전이었지만 <외팔이>와 <용호의결투> 의 왕우와, <정무문>과 <용쟁호투>의 이소룡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숀 코너리에 이어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007시리즈도 관객을 불러 모았다.한국영화 중에서는 이덕화, 임예진, 이승현, 김정훈 등이주연했던 하이틴영화 <여고졸업반>, <진짜 진짜 잊지마>,<고교얄개>, <푸른 교실>, <땅콩껍질 속의 연가> 등이 만들어져 청소년들을 극장으로 모여들게 만들었다. 영화의 재미에 빠진 청소년들은 윤정희 문희 남정임 등 여배우 1대 트로이카와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 등 2대 트로이카들이 주연으로 나오던 멜로영화를 보고자 했지만 대부분은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였다. 그렇다고 영화의 재미에 푹 빠진 청소년들이 이른바‘19 금’영화의 관람을 쉽게 단념했던 것만은아니었다.남학생들은 짧은 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쓰고, 여학생들은 단발머리를 풀어 제치고 교복 대신 사복차림으로 극장에 가서, 잠복(?) 근무하고 있을지도 모를 생활지도 담당 선생님들의 눈치를 살펴가면서 표를 끊고 극장에 들어가곤 했다. 설사 이렇게 해서 무사히 극장에 들어갔다고 해도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 영화관람 도중이거나 영화가 끝나고 나오다가 생활지도 선생님께 걸리기라도 하면, 다음날 생활지도부실에 불려가서 정학처분을 당하거나 최소한 엉덩이 몇 대쯤은 맞아야 무마될 수 있었던 탓이다.
정상권 한국대학신문 편집장과 (주)유니쿱 광고사업본부장, 전주세계소리축제 홍보사업부장, 전주대 객원교수, 변산서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새전북신문 뉴스콘텐츠연구소장(논설위원)과전주경실련공동대표로활동하고있다.‘ 디자인경영리더십’,‘ 맛있는전주’,‘ 정상권의전주문화읽기’등의책과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