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 |
[명인명장] 판소리 고법 명인 - 주봉신
관리자(2010-12-02 17:38:49)
판소리 고법 명인 - 주봉신
주봉신 명인 걸어온 길
1934년 완주군 조촌면 장동리
(현 전주시 동산동 정암마을) 출신
1946년 조촌초등학교 졸업
1954년 김재선 선생 문하에서 수업
1957년 국창 임방울 선생 문하에서 수업
1964년 국창 김연수 선생 문하에서 수업
1966년 군산국악원 강사로 7년 동안 활동
1972년 강경국악원 강사로 7년 동안 활동
1978년 인간문화재 5호 박동진 선생 지정고수로 활동
1992년 제12회 전국고수대회 문화부장관상
대명고수부문 수상
1993년 제13회 전국고수대회 문화부장관상
대명고수부문 수상
1994년 제14회 전국고수대회 대통령상 국고부대상 수상
1996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9-2 판소리장단 보유자 지정
“내 마지막 소원은 하나야. 판소리 명창들을 잘 모시는 것…”
불운했던 시절, 당대의 명인명창과 호흡하며 민중의 삶과 아픔을 위로해주던 이가 있습니다. 평생을 소리와 장단에 바쳐 온 주봉신 명인(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9-2호 판소리장단 보유자)입니다. 주 명인은 희대의 명창 임방울, 김연수에게 소리를 사사, 이만암, 박창을, 이정업 등 명고수에게 장단을 배우며 고수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습니다. 특히 주 명인은 당대의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움으로써 그 음악성이 뛰어나다는 평입니다. 때문에 수많은 명창들이 그의 장단에 맞춰 노래하기를 원합니다.또한 오랜 세월 명창 박동진의 지정고수로 활동하며 판소리의 부흥을 이끌기도 했습니다.이제 여든을 앞둔 나이. 주 명인에게는 딱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합니다. 전북의 판소리를 빛낸 명창들의 비를 건립해 전북판소리를 정리, 더욱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또 다시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주봉신 명인의 걸음에 함께 했습니다.
명창 임방울과의 만남
나는 34년에 여기 동산동 정암마을에서 태어났어. 월드컵경기장 바로 옆에. 우리가 6남매였는디 내가 막둥이었거든.그런디 내가 열네 살에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열여섯 살에 아버지가 또 돌아가셨어. 그래서 인자 형네 집에 가서 형수 밑에서 있었지. 그런디 거기는 순 촌 아니여. 날마다 일만시켜. 그래서 내가 그냥 나갔어. 무턱대고 서울로…. 서울에우리 아버지 친구 분이 계셨거든. 상선 씨라고. 여튼 서울에서 한동안 밥 얻어먹고 댕기다 그 양반이 여비 줘서 도로 내려왔어.그랬더니 누가 나보고 그려. 군산에 좋은 선생 있으니까 거기 한 번 가보라고. 거그에 이만암 선생님께서 계셨던 거지.그래서 이만암 선생님 밑에서 심부름 다 해줘가면서 한 1년배웠어. 아 그런디 1년 배우다 보니깐 그것도 한 두 번이지안되겠더라고. 그래가지고‘함라’라고 하는 디를 갔어. 거기가 부자들 많이 산다고 해서…. 거기에 만석꾼이 셋이나 사는 고을이 있었어. 가니깐 이배원이라는 분은 권세가 있고,김안균은 아들자랑, 조해영은 놀기 좋아하고 풍류하는 사람이여. 그렇게 셋이서 있는디 그 중에 조해영 씨네 집에는 가객들이 끊이지 않았어. 그 사람들하고 신선놀음하면서 즐기더라고. 그랬더니 누가 나보고 그러더라고. 너 이것 좀 할 줄아냐고. 소리할 줄 아냐는 얘기지. 그래서 내가 조금 할 줄안다고 하니까 조해영 씨가 이 양반들하고 같이 있으라고 하더라고. 그때가 열아홉 먹던 해였어. 그래서 거기서 먹고 지내면서 소리를 좀 했지.아 그런디 그때 유명한 임방울 선생님이 거기를 온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때 처음 거기서 임방울 선생님을 만났어.아 임방울 선생님이 거기 오니깐 안 그래도 사람 많은 집에사람이 더 몰리더라고. 임방울 선생님 소리 들을라고.임방울 선생님하고 조해영 씨하고 왜 친하냐면 이 양반이당시에‘쑥대머리’하나만 가지고 이름 날리니깐 넘들이 하는 얘기가 임방울은 쑥대머리만 하는 가벼 이랬나봐. 그래서임방울 선생님이 다시 공부를 하러 들어갔는디. 밥도 못 먹고 있응게 조해영 씨가 임방울 선생님 방 하나를 얻어주면서거그서 공부하라고 했어. 숭림사라고. 조해영 씨 집에서 얼마 안 되야. 한 십리면 돼. 숭림사 절 방을 얻어줘서 거그서임방울 선생님이 공부하는디 아 조해영 씨가 하인을 시켜서일주일에 세 번 닭에다 삼 넣은 것을 임방울 선생님께 준 거여. 그 절에서는 못 먹고 절 갈라믄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디고개에서 만나서 거기서 잡숫고 한 거지. 그러니깐 임방울선생님이 그 은혜를 못 잊어서 조해영 씨가 오라고 하면 항시 와가지고 조해영 씨 집에서 한 철 지내고 가고 그랬어.
임방울 선생과의 추억
암튼 그래서 조해영 씨 집에서 이 양반을 만났는디 이 양반이 인자 서울에 간다네. 그러더니 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어. 그래서 나도 공부도 할 겸 선생님 따라 갔지. 가가지고선생님 심부름하면서 공부하는디 아 잘 디가 있어야지. 아그런디 그때 박귀희 씨라고 있었는디 우리 선생님이 그 양반하고 살았었는디, 선생님이 그 집 가서 심부름 좀 해주고밥먹고 있으라고 했어. 그래서 그 양반 집 가가지고 심부름해주고 청소해주면서 밥 얻어먹었지. 그때 우리 선생님은 서울 초동에 살았는디, 박귀희 씨 집에서 초동까지 가려면 한참을 가야 혀. 그렇게 다니면서 소리 공부를 배우는디 아 선생님한테 가서 막 공부 좀 하려고 하면 전화가 계속 와. 우리선생님 보고 어디 좀 나오시라고…. 그러니깐 한 5분이나 10분밖에 못 배워. 그러다 보면 소리 한자락 배우는데 한 달도가고, 두 달도 가고 그렸어. 그리고 나는 맨날 선생님 가방가지고 따라다녔지.그러다 거기서 김재선 씨를 만났어. 선생님 때문에 우연히만났는디 그 양반이 내가 소리를 하고 북을 치고 있으니깐쬐깐한게 잘한다고 하면서 귀여워해주더라고. 그때 그 양반이 북 치는 법을 가르쳐줬어. 김재선 씨는 참 키도 크고 북도잘 치시고 멋있었지. 암튼 그래서 한창 김재선 씨한테 북치는 법 배웠는디 아 우리 임방울 선생님이 소리하는 놈이 북치면 소리공부 안 된다고 너 나한테 소리공부 그만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북 안쳤자너.그래가지고 다시 소리를 열심히 하는디 그때 군대를 가게됐어. 그때가 21살 때였어. 그서 인자 군대를 갔는디 내가 2사단 31연대여. 지금으로 하면 강원도 철원에서 있었는디 도무지 안 되게 생겼어. 군대생활이 너무 혹독해서. 그때 거리에서 고구마 쪄서 파는 사람이 있었는디, 인자 내가 그 사람에게 돈을 쪼깨 주면서 편지 한 장 써서 선생님한테 보냈어.그랬더니 그것이 용케 선생님 손에 들어갔나봐. 선생님이 그편지 보셨던가 암튼 어느 날 내무반에 난리가났어. 나를 찾길래 나 여기 있다고 하니깐 복무기록 카드를 가지고 나오라고 하는거여. 그래서 나갔더니 우리 선생님하고 일군 사령관이같이 있더라고. 아 일군사령관이면 최고 아니여. 암튼 그 양반하고 둘이 있네. 근데 내가 시커멓게 타 있응게 차 타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앞에 타고 있으니깐 나를어디로 갔다 놨냐면 온양온천에 갔다놨어. 그때 군에 가서 팔·다리못 쓰고 아주 군인생활못하게 생긴 사람들 거기가 갔다놓고 그랬어. 그래서 나도거기 회복실에서 생활하다가 제대했어.그래서 인자 제대하고 다시 선생님한테 가서 공부했지. 그때 부산에서 우리 선생님을 한 번 모시겄다고 해서 선생님하고 부산엘 가게 됐어. 지금이야 별 차가 다 있지만 그때는 특별차라고 해서 기차 그것 밖에 없었어. 그래서 부산에 딱 내렸는디 아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는 거여. 그러니깐 선생님이 야 다시 올라가자 해서 차표 끊어서 바로 올라갔지.근디 올라가고 있는디 기차가 대구역에서 정차하고 안 떠나네. 한참을 그러고 있길래 왜 그러냐고 해서 봤더니 선생님다시 올라갔다는 얘기 듣고 난리가 난거여. 그때 사람이 셋오더니 그 중 한 명이 자기가 부산 소방대장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그 당시에는 삐뽀삐뽀하는 것을 정부에서 안주고 시에서 직접 마련해야는디 그것을 마련해가지고 축하공연하려고 선생님 모셨나봐. 그랬는디 선생님이 다시 가셨다고 하니깐 난리가 난거여. 그러면서 그 소방대장이 죄송하다고 하면서 어쩌다 보니깐 조금 늦었는디 선생님 꼭 다시모시고 부산 가야겄습니다 하더라고. 그러니깐 우리 선생님이 어차피 내일 공연이니깐 서울 갔다가 내일 다시 내려오겄소 하더라고. 그렇게 고집이 쌨어 우리 선생님이. 그때 이영순이라는 아가씨가 있었어. 아 그 아가씨가 무용을 잘했는디, 암튼 우리 선생님 시중 다 들어주고 했어.암튼 부산에서 공연을 하고 올라왔더니 임춘영이라고 여성국극단 오야지가 있었는디 일본을 가자고 하더라고. 그래서‘견우직녀’라는 작품을 가지고 일본에 가게 됐어. 그때 무대 뒤에서 소리하는 것을 도창이라고 하는디 선생님이 그것을 했거든. 그때 나는 여관에 가서 일해주고 밥먹고 있는 판이여.
스승을 보내고…
아 근디 그때부터 우리 선생님이 잘못 될라고 했나 선생님이 일본에 가니깐 김일성 씨가 조선의 국창 임방울이 일본에왔으니 어떻게든 매수하라고 했나봐. 그래서 일본에 있던 북한 사람들이 와가지고는 선생님께 돈을 주고 갔어. 지금으로말하자면 억대를 준거여. 그때만 해도 그것 받아서 좋았는디얼마 안 있으니깐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우리 선생님을 모시러 왔어. 선생님이 나한테 나 뭣 땜에 그런가 모르겄다면서일단 갈텐게 나 안 오면 조선일보 방 회장님한테 연락하라고혔어. 돌아가신 방일영 회장님. 그 양반이 그렇게 국악을 좋아했거든. 예전부터 방 회장님이 선생님한테 한 말이 국창은어디가서 함부로 소리하는 것 아니라고 어디 갈라믄 나랑 상의해서 가라고 그랬었는디…. 인자 그때 우리 선생님은 남산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어. 인자 그 사람들이 누가 돈 줬는디받았죠 하고 물어보니까 우리 선생님은 엄청 거액을 받았거든. 그래서 난 모르오, 안 받았소 하고 막 뻗어버렸어. 그랬더니 증거랑 다 있는디 안 받았다고 한게 전기고문을 해버린거야. 전기고문이 얼마나 무서운건디…. 그래가지고 해까닥돌아버렸어.그래가지고 조선일보 기자가 방 회장님한테 연락한게 그때 청량리에 야전병원 있었는디 거기다 이 양반을 모셨어.거기서 잘 쉬면서 치료 받고 그러니깐 조금 회복이 되더라고. 하 근디 회복이 되던 판인디 느닷없이 김제서 우리 선생님 한 번 모셔야겠다고 한 거야. 김제소방서가 무슨 공연을연다고 오라고 한 거지. 음력으로 팔월 보름날. 그 사람들이소리 안 해도 좋으니 얼굴 한 번만 비춰달라고 하니 할 수 없이 선생님이 거기로 갔지. 다른 사람 소리 다 한 후에 선생님이 단가하고는‘수궁가’를 했는디, 아 느닷없이‘흥보가’를하는 거여. 그러더니 선생님이 혈압이 올라가가지고는 또 쓰러졌어.그래서 다시 선생님을 서울로 모셔갔지. 그 전에는 급행열차라고 있었거든. 그거 타고 또 그 병원을 갔어. 가니깐 축늘어졌더라고. 뇌졸중이래. 인자는 안 된다고 그러다가 음력으로 정월 스무날 돌아가셨어 아홉시에.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시면서 너 나 죽으면 어디로 갈래 그랬는디…. 그 말 한마디가 어찌나 서럽던지. 그래서 그 양반이 거기서 운명했잖어. 그때 선생님 집이 빚으로 잡혀있었는디 방 회장님이 이것 내가 해결한테니 여러분은 치상준비나 하라고 하더라고.그때 김소희하고 박초월 등이 빚내서 치상준비했어. 소리꾼서른 두 명이 소복입고, 상복입고 시민회관에서 마지막 작별한다고 거리제 지내고 그랬지.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었고,장면박사가 국무총리였는디 거리제를 하니깐 헌병들이 와서길 다 치워주고 그랬지. 그래서 거리제 지내고 서울 망우리에 모셨어.그런디 한 가지 재미있는게 선생님 돌아가시고, 추석날 아침에 우리 사모님하고 선생님한테 성묘를 갔는디. 아 누가먼저 왔다 간거야. 그래서 사모님이 이상하다고 하는디 나는누가 왔다 갔는지 알았지. 아무튼 그 다음에는 일찌감치 새벽에 성묘를 가서 딱 지키고 있었는디 아까 무용하는 이영순얘기 했잖어? 선생님하고 이영순하고 서로 좋아했거든. 그사람이 와가지고 물 갖다 놓고 절하고 그러더라고. 소복입고와서는. 그것을 미망인 사모님이 본 거야. 그땐 참 영화의 한장면이라고 생각했어. 우리 사모님이 이영순을 붙들고 니가이렇게까지 할 줄을 몰랐다며 니가 나보다 낫다고 붙들고 울고 그러더라고. 그런 난리가 없었어. 암튼 이후에 사모님은서울에 못 있게 생긴게 임방울 선생님 고향인 광산군 송정리에 갔어. 그런디 사정이 워낙 딱하니깐 이 미망인 어떻게 해서 살리자 했는디 그때 선생님한테 아들이 하나 있었어. 그아들이 불구자여서 조선일보 방 회장님이‘수궁가’테이프를주면서 이것 가지고 팔아서 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것신세계 레코드회사에 팔아가지고 집 한 칸 마련해서 산거지.
명창 김연수 선생과의 인연
그런디 나는 이 양반 돌아가시고 공부할 때도 없고 해서소리공부를 작파하고 있었어. 그러다 마침 김연수 선생님이전주에 온다는 소리를 들었어. 그래서 이 양반한티 공부하러갔지.내가 26살에 극단에서 공연하다가 지금 안 사람 만나서결혼했는디, 우리 안 사람이 공연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거든. 암튼 이 사람이 내가 김연수 선생한테 공부하려고 하는디 돈이 없으니깐 지금 밭 매는 일 있자너. 그거 해가지고 내학비를 대주곤 했어. 참 훌륭한 사람이여.그때 수강료가 보리 두 가마였는디, 당시만 해도 보리 한가마에 1,200원 이었어. 나는 3,000원 어치 보리를 들고 가서 공부하고 그랬어. 그러다가 그때 김연수 선생님 지정고수가 이정업 선생님이었는디 이 선생님이 서울 올라갈 적에 한번 만났는디 내가 북을 괜찮게 치니깐 나한테 배우라고 하는거여. 그래서 이정업 선생님한테 북도 배우고 했지. 또 한 가지 재밌는 것은 김연수 선생님은 우리 임방울 선생님하고 아주 철천지웬수여. 그때 웬수가 박초월 씨하고 김소희 씨하고그리고 김연수 선생님하고 임방울 선생님하고 웬수였어. 그러니까 라이벌 없으면 성공을 못해. 암튼 그래가지고 이 양반한테 공부를 배웠는디 아 이 양반도 돌아가시네. 그 사이에 군산 국악원하고 강경 국악원에서 선생님 없으니 선생 하나 좀 보내달라고 해서 거기 가서 밥을 좀 먹고 살았었거든.한 7년 있었지. 두 군데 다 7년 씩. 그런디 군산이건 강경이건 판소리가 안 되야. 판소리가 제일 잘 되는 전라도에서도전주지.
명창 박동진 선생의 지정고수가 되다
그래 가지고는 인자 이것을 작파해야겠다 생각했는디 그때여성농악단 사회를 보게 됐어. 진주에 보면 개천 예술제라고있는디 여성농악단하고 거그를 간 거여.거그 갔는디 아 느닷없이 누가 나를 델러 왔어. 그래서 누구냐 하니깐 박동진 선생님이 당신 좀 보자고 했대. 명창 박동진 선생님이. 그래서 거길 갔더니 그때만 해도 김덕수라는양반이 박동진 선생님 지정고수였는디 이 개천 예술제 생방송에 오기로 했는디 안 온 거여. 그러니깐 선생님이 여기에내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부른 거지. 그래서 그때 선생님한티 장단 맞춰주면서 인자 소리를 접고 아예 장단 맞추는 길로 들어선 거여. 지금은 생활이 참 모다 괜찮혀 국악하는 사람도. 그런디 그때는 남자들이 소리 많이 했는데 한번에 고만뒀어. 먹고 살 길이 없으니까…. 여자들은 요정같은 데라도 가서 소리하면 팁도 받고 하는디 남자는 불러주간. 그러니 먹고 살데 없으니 다 작파했지. 나는 박동진 선생님 만나서 장단 맞추는 외길 걸었지. 선생님이 같이 서울로 가자고해서 함께 갔는디 그날이 11월 2일이여. 잊지도 않아. 그래서서울 올라가가지고 박동진 선생님 장단 맞추면서 수많은 사람 만났어. 대통령도 만나고.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다 만났지. 그중에서도 박정희 대통령한테 가서 가장 대우를 받았어.그때 아마 우리 선생님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일대기 한 아홉시간 반 정도 걸리는 것을 서울국립극장에서 발표했거든.지금이야 티비가 있지만 옛날은 전부 라디오자너.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온양온천 이순신 장군 사단에 참배하러 갔다가 그때 공보부 장관이 김성진 씨였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김장관한테 라디오 좀 틀어보라고 했나봐. 당시에 동아방송이랑 KBS 두 군데에서 생방송을 하는데 그 장면이 아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역적으로 몰리는 장면이었나 보더라고. 그랬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김 장관한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니깐 김 장관이 박동진 씨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일대기를방송하고 있다고 했대. 그러니깐 박 대통령이 갑자기 차 돌리라고 해서 공연하는데 온거야. 박 대통령이 안경 쓰고 지휘봉 들고 왔어. 미리 얘기도 없이 왔으니 난리 났지. 그런난리가 없었다니깐. 그러고서는 거기서 공연을 보는데 그때박동진 선생님이 이순신 장군이 다시 복직해 외놈 쳐부수는장면 하니깐 박 대통령이 일어나서 박수치더라고. 그러다 원체 바쁘니깐 30분 듣고 가면서 하는 말씀이 박동진 선생님한테 오늘 잘 마치고 내일 하루 쉬고 모레 청와대로 오라는거야. 그러고 나니 비서가 머라고 하는 거니 올적에 북을 좀가지고 오십시오 하더라고. 소리를 좀 해야겄다면서.그래가지고 공연 마치고 쉬고 모레 청와대를 갔어. 아 그랬더니 장관들이 다 모여 있더라고. 거기서 박동진 선생님이이순신 장군이 왜놈들 잡아 죽이는 장면을 선보였지. 그랬더니 좋아서 박수치고 하더라고. 박 대통령이 우리 것이 어떤것인가 들어보라고 장관들 모은 거였어. 그때 김종필 씨가국무총리였고. 공연 끝나자 박 대통령이 박동진 선생님한테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그랬더니 우리 선생님이 대한민국은판소리가 제일 중요한데 문화재로 지정이 안 되어 있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박 대통령님이 바로 문화재 실행하라고 해서실행된 거죠. 그때 박동진 선생님 말 한마디에 판소리가 문화재 됐지.그 외에도 우리 박동진 선생님 일 참 많이 했어. 이 양반이판소리 발표회라는 것도 제일 먼저 했고. 처음에‘춘향가’여덟 시간짜리를 하더니 그 다음에‘흥보가’다섯 시간, ‘수궁가’네 시간 반, ‘심청가’세 시간 사십분, ‘적벽가’까지. 이것배운선생님은다달라.‘ 적벽가’는조학진씨한테,‘ 춘향가’는 정정렬 씨, 정정렬 씨는 고향이 익산 망성면에 시푸레라는 마을이 있는디 거기 출신이여. 이 양반한티 공부할 적에 김소희 씨하고 박성진 선생님하고 같이 공부했어. 둘이참 서로 친절하고 사이가 좋았어. 그리고‘수궁가’는 유성준씨한테 배웠고, ‘흥보가’는 박지흥, ‘심청가’는 김창진 씨한테 배웠어. 그리고 박동진 선생님은 열두 바탕을 다 했어. 옹고집전, 변강쇠전, 매화사랑, 이순신장군, 예수전까지…. 그만큼 고집도 있었고. 원래 이 양반이 산에 가서 일년간 공부할 즉에 나는 여기서 성공 못하면 죽어버릴란다 하고 결심하고 들어갔대. 그런디 거기서 목이 터졌지. 그러니깐 판소리는 고집 없으면 성공을 못해. 중간에 90%는 그만두지.박동진 선생님이 아들도 세 명 뒀는디 다 잘 됐어. 그런데한 가지 조금 아쉬운 것은 아들들이 다 직장생활하면서 먼데있으니까 아버지 돌아가실 적에 못 본거여. 박동진 선생님이공주에서 돌아가셨는데 아무도 임종을 못 지켰어. 아무리 우리나라 국창이지만 임종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얼마나 쓸쓸해. 그게 가장 속상하지. 그래도 우리나라 전수관하고 박물관 중에서 이 양반 같이 잘 지은 데가 없어. 공주에있는디 거기가 당신 태어났던 곳이여. 그리고 박동진 선생님추모하는 고수대회도 계속하고 있잖어. 11회 째까지 했어.
전북 판소리의 부흥을 위해
박동진 선생님 돌아가시고는 학교나가면서 제자들 양성하고 공연도 많이 하고 그랬어. 행사가 1년이면 수십 가지니깐.이제는 나이들어서 그것도 고만할라고 그러는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전북에 명창들이 65명 이었는디내가 이 양반들 밥을 다 장만해서 추모제를 한 적 있거든. 한10년 됐지. 이분들을 잘 모시는게 중요해. 그래서 나는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에 전북 팔명창, 오명창 비를 좀 잘 세웠으면 해.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전주에 오면 전라북도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구나 할 것 아니여. 한 사람만 와서한 마디씩만 해도 백 마디가 되고 그렇게 전라북도는 판소리의 고장이라는것을 알리는 거야. 공주는 벌써 해놨잖아.전주도 말로만애향도시라고하지 말고 이런것을 잘 해놔야해.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여.다른 것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