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8 | [한상봉의 시골살이]
생산과 창조 사이
한상봉 농부(2003-09-06 09:54:53)
몇 달만에 인천에 다녀왔다. 암투병 중인 둘째형 소식도 궁금했고,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 얼굴도 뵙고 싶고, 마음이 항상 오르락내리락 하였지만 그동안 봄철 농사일이 틈을 내주지 않았고, 한 주일 동안은 마을 앞 다리공사 하는 데서 일당 잡부로 일하기도 했다. 이른바 '먹고 사는 게' 사람을 이 지경으로 몰고 가는 모양이다. 지긋지긋한 장마가 때론 마음 바쁜 사람들에게 강제로라도 쉴 틈을 주려는 배려처럼 여겨졌다.
인천에서 처남한테 들은 이야기 한자락을 하려고 한다. 처남은 인천 만석동 기찻길옆 공부방이란 데서 실무자로 일하고 있는데, 벌이는 시원찮아도 뜻하는 바가 있어 거의 십년 가까이 그 일을 하고 있다. 그 동네에 부부 의사가 병원을 열었는데, 대부분의 진료는 아내가 하고, 남편 되는 사람은 대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들척이곤 하는데, 술을 좋아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한번은 처남이 아이 때문에 그 병원엘 갔는데, 웬일인지 그날 따라 남편 되는 분이 진료를 하더란다. 대낮에 처남이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는 걸 보고, 그 의사가 대뜸 묻기를, "뭐하시는 분이냐?"는 것이다. 대개 낮에는 아이 엄마들이 오는 법인데, 성인남자가 남들 일할 시간에 한가하게 아이 손을 잡고 들어오는 게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처남은 딱히 말할 게 없어 "그냥 놀고 있는데요." 하였는데, 그 의사 말이 "그래요.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돼요. … 나중에 애가 크더라도 절대 의대는 보내지 마세요. 사람이 갈 곳이 못 돼요. 사실 난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의사의 사설은 길어졌고, 사람은 자고로 쉬엄쉬엄 놀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에 고맙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한 채 병원 문을 나왔다는 것이다. 그 병원에선 그의 아내가 바지런하고 싹싹하게 진료를 하면서 남편의 허무맹랑한 인생관을 갚아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시골에 살면서 농사로 돈을 만들지도 못하고, 다른 방책이 있어 생활을 보아란 듯이 꾸리지도 못하는 것은 결국 나의 '놀고 먹는 습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아랫마을 사람들은 그 지긋한 연세에도 새벽부터 해질 녘까지 밭에서 논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농한기에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공사장에 나가고, 그래도 시간이 비면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는다고 그물을 챙기고 나선다. 그분들은 정말 '생산적'이다. 우리보다 열 배도 넘는 땅을 경작하고 도시에 나가 자리 잡은 자식들 먹을 것 죄다 챙겨 보내는데, 정작 농사도 적고 모아 놓은 재산도 없는 우리들은 쉬엄쉬엄 농사짓고, 틈틈이 놀러 다닌다. 그 의사 말대로 사람이란 그렇게 살아도 되는가? 잘 모르겠다. 다만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 신명이 난다는 것이다. 죽을똥 살똥 일만 하려면 무엇 때문에 이것저것 다 정리하고 도시 떠나 시골 와서 살겠나, 하는 것이다. 아마 그 의사 말이 실컷 놀자는 게 아니고 저 하고 싶은 것 실컷 하면서 살자는 이야길 것이다. 생산적인 일보다 '창조적인' 일을 하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화를 늘리는 생산보다, 영혼을 성장시키는 창조성이 더 귀하다는 말씀일 것이다. 살림은 좀더 소박 단순하게, 의식은 신기하고 새삼스럽게.
거의 한 주일만에 햇볕을 보았다. 잠깐 장마전선이 물러가고, 간밤에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말간 보름달을 보면서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어찌 보면 구질구질한 장마가 있어, 맑은 달과 밝은 태양이 새삼스럽게 소중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시골에선 본인의 의식과 상관없이 생존을 위한 투쟁 같은 노동이 항상 대기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한다. 그 노동이 투쟁이 아니라 놀이처럼 여겨지기를. 그러기 위해서 조금 느리게, 창조적으로 노동하기를. / 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