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 |
[내인생의멘토] 기억 속의 스승들
관리자(2010-12-02 17:36:24)
기억 속의 스승들
우연한 인연에 희망의 빛을 보다
- 박인현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지우고만 싶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 편린들…. 다시는 펼칠 수 없도록 꼬깃꼬깃 접고 접어 기억 저편에 깊숙이 묻어 두었건만, 그래도 그 애린 가슴속에서 고이 담아두었던 영원히 잊지 못할 나의 소중한 멘토에 대한 사연을 끄집어내기 위해, 이미 닳고 찢겨버려누더기가 되어버린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의 잔상을 되뇌어 본다.몇 일전『문화저널』송민애 기자로부터‘내 인생의 멘토’라는 연재코너에 원고청탁 전화를 받게 되었다. 송 기자와는 지난 4월에있었던 <전주MBC 창사 45주년 기념 남천 송수남 초대전>과 관련하여 일면식이 있었던 관계이기에 오랜만의 전화가 반갑기도 하고 해서 엉겁결에 승낙한 뒤, 전화를 끊은 채 한동안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글재주가 없는 탓은 둘째하고라도 지난날 나의 삶의 잔상들이 오버랩되면서 오는 회한 같은 것 때문이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연을 맺어 온 많은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나에게 큰도움을 주신 고마운 은인들이 참으로 많았음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스크린처럼 떠올려진 분들 면면이 나의 삶 속에 큰가르침을 주시고 이끌어 주신 은인이자 조력자들로서 그야말로 귀하고 소중하신 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살갑지 못한 무덤덤한 성격 탓에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살아온 나 자신에 대한 책망과 함께 그 분들에게 미안함과 죄스러운 마음이 크게 와 닿았던 순간이었다.사람들은 본디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적으로 각자의 길이 점지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인지참으로 알쏭달쏭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수많은 각양각색의 분야 중 예술분야 만은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하는 운명적인 요소가 다분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할 것이다. 그 이유로서 예술은 책속에 담겨있는 지식체계만으로 이룰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천부적인 소질과 재능, 그리고 신기적인 끼를 필요로 하는 감성체계의 분야이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데에는 개인적인 동기부여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초등학교시절 우연한 계기로 나의 내면에 잠재해있던 나만의 소질과 재능을 일깨워 주심으로 하여, 맨 처음으로 그림과 나와의 운명적 교감을 접목해 주신 분이 계신다. 이 고마운 분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결코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차마 회상하는 것조차 가슴이 저며 오는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사연이기에 많은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고통과 아픔을 감수하는 것보다 은인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우선한다는 생각에 이 사연과 관련된 기억의 일부를 아주 조심스레 소개하려 한다.
우연한 만남과 인연
나는 김제에서 태어나 7살 무렵 전주시 인후동에 위치한 신숙사(피난민촌으로 집 구조는 약100m정도의 기다란 아스콘지붕에 긴 방향 가운데에 벽을 세우고, 약 5m간격으로 옆 칸을세워 양방향에 한 가구씩, 약 40여 가구가 1동을 이루어 거주하는 기다란 구조의 다세대 주택으로서 5개의 동이 한동네를 이루고 있었다)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가난으로 인한 배고픔이었고 더군다나 몸이 약했던 나는 9살에야 모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나의 성격은 유독 내성적이면서 말수가 없고 그러면서도 고집은 세고, 자존심 강한 완벽주의 성향의 소유자로서, 주변으로부터 존재감조차 미미했던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어린이였다. 하지만 다소 작은 체격에도 유독 운동을 좋아했다. 이와 같은 나에게 영원히 잊지 못 할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1학기 초 특별활동부서를 정하는 시간이었는데, 당시 특별활동시간은 각자자신들의 적성에 맞는 특기를 살릴 수 있는 시간으로서 학교생활 중 가장 선호하는 시간이자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당시 초등학생들 대다수가 그랬지만 운동을 너무 좋아했던 나는 축구반을 강력히 희망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축구반 희망자가 너무 많이 몰리는 바람에담임선생님께서는 고육지책으로 체격 조건을기준삼아 선별하는 바람에 나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축구반 말고는 다른 부서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나는 크게 실망하고 있었는데선생님께서는 부서를 정하지 못한 아이들을 아직 채워지지 않은 부서에 마구잡이로 이름을 적어 넣는 것이 아닌가. 나 역시 그 중 한명으로서뜻밖에도 전혀 원치 않은 미술반에 이름이 적혀지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결과였지만 나로서는 단 한마디 불평의 소리도 내지 못한 채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정말 알 수 없는 것은 이렇게 어이없이 일어난상황이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특별활동 시간이 되어 나는 아무런 기대감 없이 미술반을 찾게 되었다. 그때 찾아간 미술반 선생님(죄송스럽게도지금까지 성함도 모르고 있는 배은망덕한 불초소생임)은 어머니 같이 후덕하시고 인자하신 모습에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분이셨다. 선생님께서 그림에 관련된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해주시는 바람에 이전상황은 아랑곳없이 깊은 관심과 흥미 속에 선생님 말씀에 흠뻑 빠져들게되었다. 당시 선생님의 말씀 중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내용은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한 것은 특히 인물을 묘사할 때에는 정지되어 있는 모습보다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동작(예문으로 공을 차는 순간의 동작을 들려주심)을 표현하였을 때 훨씬 생동감 있는 그림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셨다. 그때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난생 처음 그림과 관련된 가르침이어서 나에게 더욱 크고 강하게 들려왔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 설명을 끝내시고는 각자 그림을 그려 제출하도록 하셨는데 나는 종이를 펼쳐들고서귀담아 두었던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열심히 그렸다. 잠시 후 그림을완성하여 선생님께 제출하려는 순간 선생님께서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나와 그림을 번갈아 보시며“이것 진짜 네가 그린 것 맞아?”하며 몇 차례 되물으시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 자신도 선생님의 칭찬에 크게 고무되어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어느 제자의 회환
이내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소년한국일보 주최 <전국어린이미술실기대회>에 참가해 보도록 적극 권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동경기만 대회를 치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술대회라는 것은 처음 듣는 바였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에따라 미술대회에 참가하기로 하였는데 당시 형편상 크레용을 사용했던 나는 어머님께서 이웃집에서 빌려주신 크레파스를 챙겨들고 대회장소인 다가산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 도착하자 먼저 와있던 수많은 인파의 물결은나를 바짝 긴장시켰으며 그로인해 다소 주눅 들긴 하였지만 주최 측에서나눠 준 켄트지를 받아들고 다가산 중턱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고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조용히 음미하며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서양식 집과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완성하여 제출하고는 집을 향했다. 그 뒤 결과에 대한 큰 기대감이 없어 그 일에 대해서는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1학기를 마치고여름방학을 위한 종업식을 운동장에서 거행하는데 교단위 탁자에 트로피와 푸짐한 상품이 쌓여있는 것을 보고, 무심히 또 체조선수들이 여느 대회에서 우승했는가 보다(당시 체조부가 각종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는 일이 많았다)하는생각과 함께 종업식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때마이크를 통해 호명되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의 이름이 아닌가. ‘설마! 환청을 들었겠지!’하는 생각에 그대로 우두커니 서있는데 몇차례 계속해서 나의 이름이 호명되자 담임선생님께서 나에게 달려오며 빨리 나오라고 하시는것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정신없이 뛰어나가교장선생님 앞에 서있으니 조금 전에 관심 없이보아 넘겼던 트로피와 수북한 상품들이 모두 내손에 얹혀 지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왜 이것을 받아야 하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감격스럽기보다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도 안 되는 혼미함 속에 주변의 축하를 받으며 집에 도착하였다. 집에 도착하여 흥분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는 트로피와 상장을 꼼꼼히 살펴보니 미술반 선생님께서 권유하셨던 소년한국일보주최 <전국어린이미술실기대회>에서내가 최고의 영예인‘최고상’을 수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우울했던 어린 시절 중 유일한 희망의 횃불이었으며 또한 나의 운명을 가르는 대사건이었던 것이다.돌이켜 보면 억지스레 정해진 특별활동시간의 미술반, 그리고 미술반선생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어진 잠재해 있던 나의 재능의 발견 등등, 그모든 상황들을 아무리 재삼재사 돌이켜 보아도 그저 단순한 우연의 일로간주하기에는 너무도 큰 충격이자 운명적인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아쉬운 부분은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이 짧은사연만이 뚜렷이 자리하고 있을 뿐 이외에 선생님과의 관련된 다른 기억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할 기회를 갖질 못했다. 가끔씩 당시 상황이 떠올려 질 때면 가슴 저며 오는 애달픔에 순간적으로 선생님의 성함과 근황이라도 찾아 볼까하는마음이 간절하다가도 무언가에 무겁게 억눌려왔던 나의 어린 시절을 들추기가 죽기보다 싫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망설여 왔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심리적 장애요소가 제거되지 않는 한 그런 기회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설령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다 해도 나는 선생님의 고마운 뜻을 이어받아 혹여 나와 같은 사람은 없는지 주변을 두루 살피며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갈 것을 이 지면을 통해 재차 다짐해 본다.나의 삶의 영원한 등대지기이자 멘토이신 선생님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도 이내 이 지면을 할애해 주신 분께 감사함과 얄궂음이 함께 느껴지는 복합적인 감정은 대체 무슨 연유일까?
박인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가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동안 24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국내외 기획 초대단체전에 500여회 참여했다. 현재는 전북대학교예술대학의 미술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선정‘제8회 석남미술상’과 한국미술센터 선정‘한국미술상’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