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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 |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0-12-02 17:35:08)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주목받는 영화시장, 세계의 영화인을 만나다 - 임안자 영화평론가 칸의 영화제에서 온 황금빛의 초청장 나는 1994년 5월 칸국제영화제의‘황금카메라’심사위원으로 초청을 받았다. 초청장은 황금카메라 조직의 책임자인 장-루 파ㅆㅔㄱ이보낸것이었다.『 문화저널』의9월호와10월호에서 독자들에게 이미 소개했듯이 나는 1993년 7월라 로셀국제영화제에서 이두용 감독의 회고전과 10월 파리퐁피두센터의 한국영화회고전에 참가하면서 파ㅆㅔㄱ과 같이일할 기회를 두 번 가졌었다.다시 말하면 라 로셀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인 파ㅆㅔㄱ은퐁피두센터 영화부의 총책임자이며 동시에 1978년부터 칸국제영화제의‘황금카메라’상의 운영을 맡고 있는 1인 3역의 실력자이다.그 뒤 나는 1993년 11월 토리노국제영화제에 참가했을때 파ㅆㅔㄱ을 우연히 길거리에서 다시 만났다. 사실 그와 두번이나 같이 일을 했지만 워낙 말수가 적은 그여서 우리는사적으로 잘 모르는 사이였지만 뜻밖에 그를 만나자 옛 친구처럼 반가웠고 그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때 마침 나는이명세 감독과 저녁을 먹으로 가는 길이어서 파ㅆㅔㄱ한테 같이 가자고 하자 그는 기꺼이 우리를 따랐다. 우리는 영화제에서 추천한 스파게티 전문집에서 저녁을 같이 하면서 퐁피두센터의 한국영화회고전에 대해서 말을 나눴다. 그러다가말의 방향이 칸국제영화제로 옮겨지자 파ㅆㅔㄱ이 나를 향해갑자기“94년 황금카메라의 심사위원으로 초청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말투로 봐서 진즉부터 나를 점찍고 있었던 듯 했으나 나에겐 너무 느닷없는일이어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황금카메라의 심사위원이된다?, 그걸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파ㅆㅔㄱ은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이“자기는 직관력으로심사위원들을 뽑는데 한 번도 실수나 실망을 해본 일은 없다”고 말하면서“라 로셀국제영화제와 퐁피두센터에서 같이 일하면서 결정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내가 대답을못하고 가만히 있자 옆에 있던 이명세 감독이“한국영화계에 경사가 났는데 왜 그러느냐”면서 서슴거리는 나를 부추겼다.결국 나는 파ㅆㅔㄱ의 초청에 응하기로 마음을 도슬렀고, 황금카메라의 심사위원이 된 것을 계기로 나는 영화주간지『씨네 21』의 해외특별기고가(1995년~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의 고문이 되는 등 한국영화계와 훨씬 더 가까워졌고국내외의 여러 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부름을 받았다.칸 이후의 내 심사위원 경력을 잠깐 말하면, 판타스포르토국제영화제 젊은감독 부문(포르투갈.1995),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국제평론협회 스위스 대표(스위스.1995), 몬테카티니 국제단편영화제(이탈리아.1996),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 국제평론협회 스위스 대표(독일.2000), 부산아시아단편국제영화제(심사위원장.2001), 전주국제영화제 아시아독립영화포럼(심사위원장.2002)이었으며 2009년에 루마니아 실바나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개인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했다.토리노국제영화제에서의 만남이 있은 지 반년 뒤 나는칸국제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1994년 5월 11일 바젤에서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뒤에 칸 근처의 니짜 공항에 내렸다. 칸은 첫 여행이었지만 공항 출구로 나가자 영화제서 보낸 리무진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아주 편하고 빠르게 호텔에 도착했다. 그리고 장-루 파ㅆㅔㄱ의 사무실에서다른 심사위원들을 만났다.황금카메라는 질 자콥 위원장이 1978년에 새로 만든 수상 제도이며, 칸국제영화제의 이름으로 주는 상 가운데 황금종려상 다음으로 중요한 상이다. 황금카메라의 특징은해마다 칸국제영화제의 각 부문에 들어있는 영화 가운데 감독들의 첫 작품만 골라서 심사를 하며 고정 심사위원은 프랑스 영화계를 대표하는 5명과 해외 평론가 3명으로 모두여덟 명이다. 1994년에는 프랑스 단편영화 운동의 제일인자인 프랑스와 오데, 프랑스의 영화기술협회의 회장 조르즈 판주, 영화평론가 자크 짐머, 칸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네필 조세 브로사드, 스위스 출신인 프랑스의 여배우 마르타 켈러(심사위원장)였다. 그리고 해외 세 명의 평론가는 포르투갈의 판타스포르토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 마리오 도민스키, 네덜란드의 두 일간지 <드 폭스크란트>와 <NRC>의 영화평론가 한스 베레캄프 그리고 나였는데 나는 스위스의 평론가로 선택됐으며, 심사위원들의 공식 언어는 불어였다.8명 심사위원들은 먼저 본선의‘경쟁부문’과‘주목할만한시선’,‘ 평론주간’,‘ 감독주간’,‘ 프랑스의영화’의다섯부문을 통해 수상 대상의 작품을 골라야 했는데, 1994년의경우에는‘국제경쟁부문’의한편,‘ 주목할만한시선’의여섯편,‘ 평론주간’의여섯편,‘ 감독주간’의두편그리고‘프랑스의 영화’한 편으로 해서 모두 열여섯 편이 황금카메라의 심사 대상 이었다. 초기‘황금카메라’의 대상은16mm 카메라였다. 그래서‘황금카메라’로 불러지고 있으나 실은 1988년부터 수상품이 바뀌어 대상에는 코닥 필름회사가 주는 현금 삼십만 프랑이 주어진다. 코닥 필름회사는 그 밖에도 영화제 본관의 3층에 황금카메라 심사대상영화의 감독들과 심사위원들을 위한 라운지와 해변가의 특별 커피실 등을 제공했다. 그리고 또 다른 후원처 도팡 광고회사는 대상 영화가 프랑스에서 상영이 될 경우 오십만프랑에 해당하는 포스터를 제공한다.앞에서 말했듯 94년의 심사에 오른 영화는 열여섯 편이었고, 그 가운데서 제일 좋은 영화를 뽑는 데까지 우리는네 번의 모임을 가졌다. 심사 방법은 심사위원장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는 피라미드 형식을 택하여 세 번째 모임에서는 두 편으로 줄이고 맨 마지막 두 편에서 최고작품을 뽑았다. 마지막 모임은 칸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질 자콥이 머무는 칼톤 호텔의 방이었는데, 수상 영화의 결정은폐막식의 하루 전인 5월 22일 후 4시까지 영화제 프레스에 알려줘야 했다. 마지막 두 편을 놓고 우리는 오전 10시에서 오후 4시가 넘도록 토론을 계속했다. 그러자니 호텔방에서 점심을 먹어야 했고, 밖에는 일절 나가지 못하게 돼있어 화장실도 호텔방 안에 있는 것을 써야 했다. 그러다드디어 오후 5시쯤에 수상 영화가 결정됐다. 프랑스의 여감독 파스칼 페랑의 <죽음 저편의 삶>(원제목은 PetitArragements avec les Morts)이 5:3의 비율로 뽑혔다.위의 영화는 한여름 프랑스 서부 애틀랜틱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는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셋은 어릴 때 그들이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죽은 자들에 대한 어떤 죄의식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지만각자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페랑 감독은 파리의 영화학교 IDEC 출신으로 80년대부터 주로 장편영화의 공동시나리오 작가로 작업을 하다가첫장편<죽음저편의삶>을만들었고,‘ 프랑스의영화’의경쟁부문을 통해 황금카메라 상을 받게 됐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경쟁을 했던 튀니지 출신인 무피다 틀라틀리 여 감독의 <궁전의 침묵>은‘특별 언급’을 받았다. 이는 상은받지 못했으나 완성도가 아주 높은 작품에 주는 심사위원들의 찬사다. 틀라틀리 여 감독 역시 파리의 영화학교 IDEC의 졸업생으로서 마그랩 지역에서 영화편집 전문가로 일하다가 <궁전의 침묵>으로 연출 데뷔를 했고‘감독주간’을통해 칸국제영화제에 진출했다. 이 영화는 20세기의 50년대 중반 프랑스의 식민주의가 끝나는 시기에 튜니스의 시드알리 왕자의 죽음으로 무너져가는 왕가의 비극을 젊은 여성의 시각에서 그린 여성해방을 테마로 한 사극이었다.황금카메라 심사는 솔직히 말해 아주 힘든 작업이었다.그러나 두 감독의 훌륭한 작품을 심사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 큰 영광이며 행운이었다. 그와 더불어 1994년은 나 말고도 한국 기성세대의 대표 감독의 한 명이었던 신상옥 감독이 본선 경쟁부분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되어 한국영화계를 놀라게 했다. 신 감독이야 한국에서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었지만“임안자는 누구지?”하는 기자들이 많았고 어떻게 한꺼번에 한국인이 두 명이나 심사위원으로 뽑혔냐는질문도 많이 받았다. 신상옥 감독과 나는 사실 안면이 전혀없는 사이였으나 기자들이 찍은 사진에는 정다운 친지처럼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칸국제영화제의 역사 칸국제영화제가 설립된 것은 1939년이었다. 설립자는프랑스의 국립교육부 장관 장 자이였으며 영국과 미국의 민간인들이 후원자로 설립에 가담했다. 자이 장관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쇼 정부들이 원칙에 어긋나게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영화선정에 직접 간섭을 하자 그에 충격을 받고는사립체제의 영화제를 칸에 세웠으나 바로 2차 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그러다가 1946년 9월 초에 프랑스 정부의 외무부와 칸시청의 주도로‘칸에서 국제영화제’가 태어났다. 칸국제영화제는 비영리적인 조직체로 시작하여 각 부문의 대표자들이 공동으로 운영을 하다가 1972년에 가서 정부의 승인을받았다. 그리고 애초 9월에 치르던 영화제는 1951년부터 5월로 행사의 시기를 바꾸었고, 1946년에 지어진‘칸의 국제영화제’는 2002년부터‘칸의 페스티발’(Festival deCannes)로 불리고 있다. 1946년은 유럽의 여러 곳에서 중요한 영화제들이 문을 연 해였다. 칸국제영화제의 일주일전 8월에 로카르노국제영화제가 새로 태어났고 바로 그 뒤에 전쟁으로 중단됐던 베니스국제영화제가 다시 출발했다.그리고 1946년에 동유럽을 대표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가 설립됐다.1회에 상당한 성공을 거둔 칸국제영화제는 1947년 2회 때에는 16개국의 영화를 초대할 정도로 커졌으나 1948년과 1950년에 경비부족으로 행사를 두 번이나 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 칸국제영화제가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부터였는데, 특히1959년에 필름마켓이 생기면서 칸국제영화제의 성장과 명성에단단히한몫을했다.『 문화저널』11월호에서이미말했듯 칸국제영화제는 세계 영화제 가운데 제일 큰 영화시장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이십여 편 영화를 가지고 영화관하나에서 시사를 할 정도로 작은 규모로 시작하였으나 오래가지 않아 세계 영화거래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최초로‘영화상업의 세계적 거래처’가 되었다. 최근 발표된 통계를 보면 해마다 1만 명이 넘는 영화 사업가들이 이곳에서영화를 사고팔며, 한국에서도 90년대 이후부터 영화진흥공사(후에는 영화영진위)를 포함하여 수십 명에 달하는 한국의 제작자와 수입업자들이 칸의 필름마켓에 참가하고 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해마다 5월이 되면 세계영화계의 관심은 온통 칸국제영화제에 쏠리기 마련이다. 내가처음 참석했던 1994년만 해도 4천 5백 명이 넘는 기자단과 1만 6천 여 명의 국제적 명성의 귀빈들이 칸을 방문했다. 나는 1994년 베를린에 출품된 영화는 8백여 편이었다고『문화저널』11월호에 썼는데, 같은 시기에 칸에는 1천 8백편의 영화가 모여들었다. 한마디로, 세계영화계의 흐름을 가장 빠르게 감지할 수 있는 곳이 칸이며, 칸의 최우수영화에 주어지는‘황금종려상’은 국제영화제 이름으로 주는 어느 상보다 높은 대우를 받고 있는지라 제작사들 사이에 수상을 겨냥한 치열한 공방전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것을 볼 수 있다.칸국제영화제의 팔레 데 페스티발과 콘그레(영화제 본부의 이름)는 1983년에 지어진 큼직한 콘크리트 건물로써 흔히 벙커(창고)로 불릴 만큼 썩 아름답지 못하다. 영화시장이들어서있는 지하실에서 5층의 영화제 사무실까지 연결되는 통로는 이리저리 여러 방향으로 갈라져 있어 처음 몇 번은 마치 미궁을 헤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중해의 푸른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영화제 건물 위의 전망 하나만은일품이다. 모든 게 중앙 집정제로 움직이는 프랑스에서 파리가 아닌 칸을 영화제의 장소로 잡은 데는 아마 칸의 뛰어난 자연미와 5월의 따뜻한 기후 때문이었을 것이다. 칸은남부 프랑스 지역의 이름난 여름철의 휴양지다.칸국제영화제의 행사장 가운데 매체의 관심이 가장 많이 쏠리는 곳은 영화제 본부 앞의 넓디넓은 계단이다. 이곳은 영화제 동안 매일 오후 7시만 되면 경비원의 삼엄한 통제로 일반인들의 접근은 완전히 막힌 채 국제적으로 이름난스타들의 화려한 출현이 시작된다. 이들은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우며 빨간 양탄자가 깔린 계단에 올라 대상영관을향해 걸어가고, 그러는 동안에 계단의 양쪽에는 빈틈없이들어차 있는 파파라치들이 좀 더 근사한 사진을 찍기 위해서로 밀치락달치락 하면서 카메라 전쟁을 한다. 보통 걸음으로 5분도 못 걸리는 짧은 거리지만 배우들은 느릿느릿한걸음으로 사진기자들과 광장에 모인 청중을 향해 활짝 웃고손을 흔들며 폼 재기에 온 신경을 다 쏟는다. 그럴 때마다계단 밖에서 몇 시간이 나 기다렸던 청중은 소리를 지르며뜨거운 박수를 보낸다.칸국제영화제에서는 계단 위 스타들의 행렬을‘몽테 데마쉐’(계단을 오르다)라고 부르는데, 이 행사는 언젠가부터미디어 중심의 의례적인 이벤트가 되면서 칸국제영화제의고유명사로 써지고 있으며, 이 장면은 생방송을 통해 해외에까지 중개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이 유명한 계단을 나도두 번 밟았다. 1994년 황금카메라의 심사위원 자격으로 개막식과 폐막식에 참가했을 때였다. 개막식 날로 기억되는데, 내 앞에서 계단을 오르던 젊은 여배우가 갑자기 층층대에서 미끄러져 발을 다치는 바람에 나를 포함하여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굽이 높은 신발이 문제의 원인이었던 것 같았는데 여배우는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러는동안 내 뒤의 계단 아래에서는 프랑스의 여배우 사빈느 아제마가 젖가슴이 훤히 내비치는 얇은 옷차림으로 계단을 오르자 파파라치와 밖에 둘러서있는 군중은“사빈느! 사빈느!”를 연거푸 부르면서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쳤다.계단뿐만 아니라 영화제 본부 앞의 크로와제트 길거리는 행여 이름난 스타를 만날까하여 모여드는 구경꾼들로 날마다 길이 완전히 막히고 그 중에는 지나가는 감독이나 사진기자의 눈에 들기 위해 희한한 몸차림으로 길거리를 산보(?)하는 젊은 아가씨들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걸 볼 수 있는데, 세계적 스타들이 계단 위에서 만들어 내는 최고급 스펙터클과 크로와제트 광장에서 아무렇게나 수시로 벌어지는 잡다한 군중의 흥행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칸국제영화제특유의 들뜬 분위기를 만들었다. 칸국제영화제의 구조와 부문의 성격 칸국제영화제는 부문이 많고 부문마다 설립목적과 운영방식이 다른 다양한 구조로 진행되고 있다. 독자 가운데 칸국제영화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 독자를 위해 그 구조와 부문의 성격을 내 경험을 바탕으로 써보려고 한다. 칸국제영화제에는 크게 나눠 칸국제영화제의 본선인‘공식 선정’과‘평론주간’그리고‘감독주간’이 있다. 이 세 개는 칸국제영화제의 이름으로 같은 시기에 영화제를 치르지만 사실상각자 독립된 조직체로서 내부의 구조나 운영방식에서 모두다르다. 그러나 칸국제영화제의 중심체는‘공식 선정’(TheOfficial Selection)이며 이는‘국제경쟁’과‘주목할만한시선’의 두 부문으로 나눠진다. 그리고 경쟁부문에는 장편과 단편이 따로따로 있다. 한국영화가 장편의 경쟁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일은 지금까지 없었으나 송일곤 감독의 <소풍>이 1999년 단편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심사위원 대상을받았다.위에서 말한 것 말고도‘공식 선정’에는‘경쟁 외’(Outof Competition)와‘시네파운데이션’(Cinefoundation)그리고‘특별 상영’(Special Screening)이 더 딸려있다.첫째는 이름난 기성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특별 초청하는 부문이며 둘째는 1998년에 칸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 질자콥이 설립한 재단으로 세계의 영화학교 학생들이 만든중·단편 영화를 칸국제영화제 동안에 소개한다. 이 부문의 특성은 작품의 선정에서 수상에 이르기까지 행사의 일체를 시네파운데이션에서 맡고 있는 점이다. 위의 재단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으며 2000년부터 한국의 영화학교 학생들의 작품이 여러 번 초청된 바 있다. 그리고 끝으로‘특별 상영’은 특별한 경우에 상영되는 영화를 말하며 이 부문에서 신상옥 감독의 <증발>이 1994년‘필름 서프라이즈’프로그램으로 상영됐다.그 다음‘주목할만한 시선’은 1978년 질 자콥이 집행위원장 자리를 넘겨받으면서 공식선정에 덧붙여진 부문이다. 쉽게 말해 경쟁부문의 문턱에 오르는 대기실로 볼 수있는데, 비전과 스타일에서‘독자적이고 색다른’영화들에중점을 두고 있으며 처음엔 비경쟁 부문으로 있다가 1998년부터‘재질 있는 감독을 장려하는 뜻에서’최우수작에는프랑스에서의 배급권이 주어졌다. 그러다가 2005년에서부터 최우수작에 3만 유로의 수상금이 주어지며, 이 수상금은 프랑스의 막강한 국제보험회사그룹 파마 간이 1987년제40회 칸국제영화제 기간에 출발시킨 프랑스 영화의 후원재단 그룹 파마 간 파운데이션에서 나온다.‘주목할만한 시선’에 처음 초청된 한국영화는 1984년의 <물레야 물레야>(이두용 감독)였다. 그러다 80년대 말부터 한국영화들이 몇 편 소개됐으며 그 가운데 홍상수 감독이‘주목할만한 시선’에 다섯 번 진출했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 <하하하>로 2010년‘주목할마한 시선’부문의 대상을 받았다.칸국제영화제에서 둘째로 오래된 부문은‘평론 주간’(LaSemaine de la Critique)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영화사학자 조르즈 사둘과 그의 동료 루이 마르코렐레를 중심으로프랑스 영화평론협회가 1962년에 설립한‘평론주간’은 감독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을 대상으로 움직이며 프로그램은 작가 영화의 성향과 실험성의 영화를 위주로 진행된다. 그리고 영화선정과 프로그램 편성은 부문 자체의 위원회가 결정하며, 수상 영화의 선정은 칸국제영화제에 참석하는 프랑스의 평론가와 기자들이 공동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프레스 이름으로 주어지는 장편의 수상 작품에는 시네폴리스(멕시코의 국제적인 영화관 단체)에서 주는 상금 5천 유로가 따른다. 지금까지 칸국제영화제의 부문 가운데한국영화의 진출이 가장 낮은 곳은‘평론 주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최근에 와서 평론주간을 찾는 젊은 감독들이늘어나는 듯 해 고무적이다.다음은‘감독주간’에 대해서다. 1969년에 프랑스의 영화감독협회가 만든 감독주간은“텔레비전과 비디오 등의전자영상 매체의 출현으로 세계 곳곳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영화감독들에게 좀 더 많은 관심을 두자”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감독주간’의 설립은 1968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일어난 68세대 감독들의 저항운동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1958년 5월 18일 프랑스와 트류포,장-룩 고다르 등 파리에서 온 젊은 감독들은 영화제 본부의 대상영실을 점거한 뒤 진행 중에 있던 영화 상영을 멈추게 한 다음 그 자리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들은“프랑스의 영화인들은 한 달 동안 전국에서 파업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해 큰 도시에서 데모하는 학생들과 연대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그와 동시에“시세가그럼에도 안이하게 영화를 논하고 파티를 즐기는 칸국제영화제는 당장 그쳐야 한다”며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의성명이 발표되자 그 자리에 참여했던 밀로스 포만, 알랑 느네, 루이 말, 클로드 러루쉬, 레이몬드 폴란스키 등의 감독들은 경쟁영화 부문에 올라있던 작품을 돌려달라며 영화제참가를 거부했고, 21회 칸국제영화제는 5월 19일 중단되고 말았다.그러나 영화감독들의 항의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당시 프랑스 정부의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관장 앙리 랑글루아를 조그만 실수를 핑계삼아 해고시키려는데 분노하여 즉시 시네마테크 수호위원회를 조직하고는 랑글루아의 복직을 위해 투쟁에 나섰다.그리고 투쟁 결과 랑글루아의 일자리를 되찾았다. 투쟁에참가했던 이들은 프랑스의 감독협회를 만들었고‘감독주간’은 감독협회를 바탕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앙리 랑글루아는 1936년에 설립된 프랑스시네마테크를 세계에서 가장 큰 영상자료원과 영화박물관으로 키운 신화적 인물이다. 그는 영화자료의 보관뿐만 아니라 2차 대전시 나치의 점령으로 사라질 위험에 놓여있는영화들을 구조하고 영화생산과 상영에 관련된 모든 기기들을 수집하여 랑글루아 영화박물관을 만들었다. 무엇보다그의 시네마테크는 트뤼포, 고다르, 리베트, 샤브롤, 르네등 50년대 말 프랑스 영화를 혁명시킨 누벨바그의 세대가매일 살다시피 했던 영화공부의 천국이었다. 흔히 이들을‘시네마테크의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영화감독협회는‘감독주간’의 밑에‘프랑스의 영화’(Cin´ema in France) 부문을따로만들어전적으로프랑스의 젊은 감독 발굴에 힘써왔다. 예를 들어 황금카메라의 수상 작품 <죽음 저편의 삶>은‘프랑스의 영화’가 발굴한 영화였다.‘ 감독주간’은원칙상비경쟁행사이며1~2명의후원자들이 주는 조그만 상이 몇 개 있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죽음 그리고 할리우드와의 티격태격 칸의 장편경쟁 영화들은 영화제의 주행사장으로 쓰이는루미에르 대상영관에서 상영된다. 4,000석이 들어있는 이곳 실내는 상영 때마다 밀려드는 관객들로 꽉 차있었다. 나는 이 상영실을 좋아했다. 시청각을 위한 완벽한 장비와 큼직한 화면 그리고 칸국제영화제의 로고와 함께 들려오는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테렌스 말리크의 <천국의 날들>의 주제곡에 따온 이 멜로디는 영화음악 계통의 대가 에미오 모리콘이 작곡한 것으로, 모리콘은 숫한 감독들의 영화를 위해 작곡을 했으며 특히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 영화의 작곡가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1994년은 펠리니 감독의 서거한해로서 칸국제영화제는 펠리니 감독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펠리니 감독의 명작 <길>를 묘사한 포스터를 영화제의 곳곳에 붙여놓았다. 구름이 떠있는 바다 저편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바닷가에서 북을 치고 있는 <길>의 여주인공젤소미나의 처연한 모습이 담겨진 포스터는 보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1994년 칸국제영화제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처럼 가트협상 문제로 할리우드 영화계와 껄끄러운 관계에 놓여있었다. 한때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영화를 가트협상의대상에 올리려는 미국의 일방적인 영화정책에 대해“본디영화는 한 나라의 창조적 예술품이며 국민의 고유한 정서적유산이므로 일반상품과 같이 자유무역의 종목에 넣을 수 없다”며 영화협상 규칙에‘문화예술품 예외’라는 항목을 만들어 자국의 영화를 지켰다. 미테랑 대통령의 선언문은 칸국제영화제 뿐 아니라 유럽영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프랑스 영화감독 칼로스 파르도는 월간지『르 몽드 디플로마티크』(1994.5)에서“이번 칸국제영화제는 텔레비전의 방대한 확장과 위협적인 미국의 영화생산의 그늘에서 갈수록 질식되어가는 프랑스의 영화예술의 현실에 대해 엄밀히 판단을 해야 할 시기”라면서 할리우드 영화를 닮아 가는유럽영화를 향해 신랄한 비평을 했다. 그런가 하면 영화전문지『에크랑』의 평론가 시리쯔키는 5월 특별호의 서문에서“영화는 인류의 발전을 가장 잘 반영하는 예술임을 제47회 칸국제영화제는 다시 한 번 더 증명할 것이다”라고 쓰면서 큰 기대감을 나타내보였다.아무튼 94년의 프로그램을 보면 자국의 정서를 반영한듯 어느 때보다도 유럽영화, 특히 프랑스 영화에 중점을 둔흔적이 뚜렷했다. 반면 본선에 오른 할리우드 영화는 겨우세 편 에 그쳤다. 92년의 열여섯 편, 93년의 여덟 편에 비하면 눈에 띄게 줄어들었는데 프랑스의 영화계에서는 가트협상의 거절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복수의 보이콧을 했다고해석을 한 반면에 할리우드 쪽에서는 가트협상과 전연 상관없는 일이라고 전면 부인했다. 이유야 어떻든 칸국제영화제 뿐 아니라 유럽의 영화제들과 할리우드는 오래전부터 고질적인 애증후박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 헐뜯기에 바쁜 듯 했다. 솔직히 유럽영화제들은 관객의 인기를 모으기 위해서 할리우드 영화와 스타가 절대 필요하다. 그리고 할리우드 역시 유럽의 관객을 정복하기 위해서 큰 영화제들이 절대 필요하며 큰 영화제들은 다 유럽에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할리우드를 바라보는 유럽영화제들의 눈길은 심하게 말해서 경계와 멸시 그것이며 어느 프랑스 평론가의 글에는“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진짜로 칸국제영화제를 보이콧 했다면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될게 없다.이들 없이도 칸국제영화제는 부분적인 미약함을 빼놓고는아주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다. 그건 할리우드의 대형스튜디오의 영화 없이도 세계 각처의 영화가 함께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뭣이겠는가?”라고 썼다.어떤 이유에서였던 47회 칸국제영화제의 개막식과 폐막식영화는 미국 영화였다. 5월 12일의 개막식에 초대된 조엘코헨의 <대추락>과 폐막식 영화로 뽑힌 존 웨이터스 감독의 <연속 엄마>는 뉴욕의 독립영화와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제작품이었으나 둘 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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