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 |
[서평]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관리자(2010-12-02 17:34:04)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절망과 상처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은 피어난다
- 상 학 한의사
형! 어쩌다 후배 잘못둔 덕에 형의 시집에 대한 서평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형의 시집에 대한 서평을 쓴다는 것은 무척 껄끄러운 일입니다.왜냐면 형의 모습을 TV로 보았던 그때의 느낌, 즉 형이 출소해서 어느 국가기관원들 앞에서 밝게 웃는 표정으로 강의를 하던 모습을 뉴스에서본 이후, 지금까지도 제 머리 속에는 형이 그때 밝게 웃는 모습이 왠지 노동해방을 꿈꾸던 그 절실한 모습이 아니라, 권력과 타협하는 모습으로만 각인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형의 시집을 평하는 글을 좀 비판적인 시각으로 쓰고자 했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의 시집을 다 읽고는 도저히 그렇게 서평을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 고민스러웠습니다. 너무나 답답한 저는 인터넷에서 형의 저작이나형과 관련된 서적을 검색했고, 몇 권의 책을 찾았습니다.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만사를 제쳐놓고 그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 책들은 이미 80년대 후반에 복사본으로 읽었던 형의 시집『노동의 새벽』과『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와『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그리고 형과 다른 여섯 분이 같이 쓴『원난-고원에서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그 책들을 틈틈이 이틀 만에 다 읽고, 다시 형의 시집을 들었습니다. 책을 받은 지불과 며칠이 되지 않았는데, 이미 책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고 나서야 겨우 단어 몇 개가 머리에 떠오르는군요. 형! 도대체 한권의 시집에 300편이나 되는 시를 담아낼 생각은 누가 했는지요. 그 많은 시들을 읽어대면서, 서평을 쓸 생각에 짓눌린 저를 형이 위로해줄 수 있는지요. 그렇게짓눌린 머리로 형의 시에 대한 글을 써야만 하는 비극은 또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지요. 너무나도 많은 시들에 대한 느낌을 몇 줄의 문장으로도저히 담아낼 수도 없거니와, 또 그렇게 담아낸들 그저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니 저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시들 중에서 제 머리를 강하게 때렸던 몇 편의 시들만 가지고 주절주절 늘어놓을 수밖에 없군요.
굴종의 역사를 말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읽은 형의 몇 권의 책을 통해 저는 형의사유가 깊이가 무척이나 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어찌된 일인지 뭐든 간단명료하게 표현하는 것들에만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절대 아닌데, 또 사람들은 자신의삶이 그렇게 간단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다들 느끼고 있을 터인데 어째서 그렇게도 단순한 논리만을 부르짖는 사람들에현혹이 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단순함만을 부르짖는 자들에 의해 빚어질 위험을 형은 단 몇 줄의시어만으로 너무나도 노골적이고 절실하게 표현하더군요.
심오하나 무능한 자들 못지않게/단순하고 실용적인 자들을 조
심하라/단순한 진리를 복잡함 속에 유지하는 것도 힘들지만/
복잡한 현실을 단순함 속에 밟아놓으면 폭발하는 법 -「그는
단순했다」-
사실 저는 간단한 논리를 설파하는 인간들을 볼 때마다 그놈의 의심하는 병이 도져서 항상 그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습관이 있답니다. 도대체 그 논리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하는 의문 때문에 속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정치가에게 권력을 빼 보라/무엇이 남는가/부자들에게 돈을
빼 보라/무엇이 남는가/성직자에게 직위를 빼 보라/무엇이 남
는가/지식인에게 명성을 빼 보라/무엇이 남는가/빼버리고 남
은 그것이 바로 그다/그리하여 다시/나에게 영혼을 빼 보라/나
에게 사랑을 빼 보라/나에게 정의를 빼 보라/그래도 내가 여전
히 살아있다면/그래도 태연히 내가 살아간다면/나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무엇이 남는가」-
사실 형은 이미 이 두 편의 시만으로도 형이 보는 세계를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 그릇된 것을 보고도 눈 감을 수 있는 심리는 아마도 이런 것이겠죠. ‘너. 나 할것 없이 우리 모두 눈 가리고 못 본 척 살아가면 그냥 속 편하지 않냐. 그러니 공연히 찔러 부스럼 만들지 마라.’맞습니다. 공연히 구린데 찔러서 문제라도 생기면 골치 아프죠. 그러니 사람들이 그저 눈 감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양심 있는 사람들은 뭔가 목구멍에 걸린 듯 편치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형은 목구멍에 뭔가 걸린 듯 편치않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가진 이들에게 오히려 준엄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리한 칼끝을 제 목덜미에 들이대듯 물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껍데기가 벗겨지고도 그냥 살아갈수 있는 나는 누구냐?
이 검은 총구들 앞에서 풀려날 수만 있다면/계엄군의 아가리
에서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나는 개가 되어 짓기라도 하고 싶
었다/한 순간의 공포, 체념, 비굴/무력감이 하얗게 지나가자/
싸늘한 자기혐오, 변명, 울분/허탈감이 엄습해왔다 -「아체의
개」-
굴욕적으로 목숨을 구걸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얼마나 당당할 수 있을까.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굴종적인 자세를 보인 인간을 우리는 쉽게 변절자라 이름붙이지만, 그 일이막상 자신에게 닥친 일이라면 과연, 막상 나에게 닥친 일이라면 과연 나는 어땠을까. 형의 시「( 아체의 개」)를 지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지인이 그러더군요. “안기부에 끌려가서 죽을고비를 넘긴 박노해가? 그 인간 변했고만.”아! 지인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전율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인간을 얼마나 답답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형의시집을 읽기 전까지 나는 또 얼마나 형을 난도질 했는지….그래서 형은『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의 저자 소개 글처럼“2000년부터 스스로 사회적 발언을 금한 채 자기정진을계속하는 한편, 홀로 세계의 빈곤지역과 분쟁현장을 돌며 조용한 평화활동을 해왔”으며,“ 2003년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선언 직후 전쟁터로 날아가 반전평화활동을 했”어야만 했나요? 그러나 형은 단지 그때의 굴종을 개인의 굴종의 고백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굴종의 역사에 뼈와 살이 다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아체인들의 굴종을, 처절한 비극을,그리고 오늘날 코리아의 굴종까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미국의 액슨모빌을 위해 아체인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인도네시아의 정부군이나, 미국의 자본과 군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제 나라 민중의 살을 파먹으려 하는 우리 정부나다름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굴욕적인아체의 개이며 코리아의 개인가요?
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이 순간 그 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나 거기 서
있다」-
서로에게 희망이 되는 시선과 손길만이 길이다
하지만 그래도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이라면,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인간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시선과 손길이 정말필요한 곳을 찾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21세기 지구상에서 우리의 시선과 손길이 필요한 곳은 사실은 거대자본과 권력에의해 철저하게 인간성을 유린당하는 그 곳, 그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곳에 우리는 가서 설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과 손길은 베푸는 시선과 손길이어서는 안 되고, 동 시대를 살아가는 동지로서, 진정으로고통을 같이 나누는, 서로에게 희망이 되는 시선과 손길이어야만 합니다. 형! 맨 정신으로 형의 시를 말하자니 너무나도부끄럽습니다. 막걸리라도 한 잔 걸쳐야 이 부끄러움을 잊으러나…. 국제 분쟁의 현장은커녕 우리나라 분쟁의 현장에 발한 쪽 디뎌본 일이 없는 제가 오로지 머리로만 형의 시를 이해하려 설치는 모습에 자괴감이 들기조차 합니다. 항상 눈이그곳을 향한다 한들 몸이 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형의 간절한 기도를 마음으로 음미하는 수밖에….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
을 바꿀 수 있는 인내를/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나보다 약한 자
앞에서는 겸손할 수 있는 여유를/나보다 강한 자 앞에서는 당
당할 수 있는 깊이를/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가난하고
작아질수록 나눌 수 있는 능력을/성취하고 커 나갈수록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관계를/나에게 오직 한 가지만 주소서/좋을 때
나 힘들 때나 삶에 뿌리박은/깨끗한 이 마음 하나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