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 |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0-11-04 14:32:33)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베를린국제영화제와 한국영화와의 깊은 인연
- 임안자 영화평론가
미리 말하지만, 『문화저널』의 11월호에 실리는 글은 내가 1994년에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장선우, 최양일 감독에 대해서이다. 그러나 올해는 동서독 통일의 20주년으로, 통일 이후에 완전히 탈바꿈한베를린국제영화제의 새로운 정체성과 그에 따른 구조 변화에 대해 독자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말머리를 50년대로 돌려 영화제의 생성과정에서부터 쓴다.
독일 통일과 베를린국제영화제
영화제의 역사를 보면, 베를린국제영화제는 미국정부의동유럽을 겨냥한 반공정책을 뼈대로 태어난 냉전의 시대적산물에 속한다. 영화제를 처음 꾀한 사람은 서베를린의 미군관활 구역의 영화 사관 오스카 마르테였다. 그는 1950년에 영국군대 소속의 조르즈 터너 동료와 의기투합하여 영화제 설립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베를린 시의회의 상의원과 영화제작업자 그리고 기자 등 일곱 명이 설립위원으로 가입했으며 영화제의 첫 집행위원장은 독일의 영화사학자 알프레드 바워였다. 알프레드 바워는 40년대 독일제국의 영화담당원으로 있다가 2차 대전 뒤에는 서베를린에 주둔한 영국군대의 영화고문으로 활동했다.영화설립위원회는 2차 대전의 참패로 완전히 폐허가 된베를린의 중심지에 영화제 본부 시네센터를 차리고는 1951년 6월(6. 18)에‘베를린국제영화제(InternationaleFilmfestspiele Berlin)’라는 이름을 붙여 제1회의 막을올렸다. 티타니아궁전 영화관에서 상영된 개막식 영화 <레베카>(히치콕 감독)는 입장표가 매진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나머지의 프로그램은 주로 미국영화에다 캐나다 그리고 유럽영화들로 섞여있었다. 7인으로 짜진 심사위원은모두 독일출신이었으며, 제1회의 금곰상은 스위스 감독 네오폴드 린트베르그의 <지프의 4인>에 주어졌다. 그리고베를린 시를 상징하는 곰은 이때부터 베를린국제영화제의수상품목이 되어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베를린국제영화제 아카이브 자료에서).냉전시대 동안‘자유세계의 진열장(showcase of thefree world)’으로 존재해오던 베를린국제영화제(속칭 베를리날레)는 통일 이후 국제화시대에 들면서 서유럽과 동유럽의 영화계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의 역할을 떠맡게 됐다. 그와 동시에 동독 영화계와의 통합을 위해 50년간 굳게 높이쌓아있던 영화제의 벽을 허물어뜨렸다. 그런 뜻에서 통일이후 처음 열린 1991년의 행사는 동서독의 영화계가 다시하나로 합치는‘독일영화의 원년’의 해였다.이 역사적인 만남은 영화제의 프로그램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나타났는데, 동독과 서독의 영화가 나란히 국제경쟁의 부문에 올랐던 점이며, 영포럼에서는 동서독의 젊은 감독들의 영화를 한데 묶어‘새로운 독일영화’라는 특별 프로그램을 소개했으며 그와 더불어 동독영화사(1949~1990)의거장 감독들의 영화 40편을 프로그램으로 짠 회고전을 통해 동독영화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하지만 많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통일 후 독일영화의 전망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반세기의 분단으로쌓인 정서적 거리감을 좁히기가 쉽지 않았다. 정부로부터영화작업에 필요한 모든 걸 받아쓰던 동독의 제작시스템에익숙해져 있던 동독 감독들은 통일 뒤 서독의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적응을 하지 못하여 대부분이 실업자가 됐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해주고도 남았다. 1991년에 내가 만났던 동독출신의 한 감독은“영화를 만들기 위해 감독 스스로가 제작자를 찾아다니며 제작비를‘구걸’해야 하는 점이 가장힘들다”고 하면서“동독뿐 아니라 사회주의 나라에서는 일년에 몇 편 영화를 만들던 그와 상관없이 정부로부터 매달월급을 받는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 경우에는 스튜디오의모든 기자재와 편집실, 카메라는 물론이고 배우들까지 다도움을 받기 때문에 서구에서처럼 돈 때문에 영화를 못 만드는 일은 없다”라고 하면서 통일의 의미를 물었다.1991년의 베를리날레는 중동의 걸프전과 젊은이들의 반전 데모 등으로 정치적으로 몹시 불안했었으나 1992년과1993년으로 넘어오면서 상황은 차츰 나아져 갔다. 그리고세계 영화계가 대부분 불경기에 빠져있었음에도 92년에 8백편, 93년에 650편의 영화가 베를리날레에 참가하여 각부문마다 들뜬 분위기를 이뤘다. 물론 출품작 가운데에는서구의, 특히 할리우드의 영화가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게 사실이지만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발칸지영과 중앙아시아 등 옛 소련 연방에 속해있던 나라들의 영화가 국제경쟁과 포럼, 파노라마, 아동영화 등 여러 부문에 두루 참여한 건 분명히 새로운 현상이었으며, 러시아의 거장 감독안드레이 콘잘로프스키의 <내부 순환>이 92년의 개막식영화로 뽑힌 것 또한 시대적 변화의 조짐임에 틀림없었다.
베를리날레의 영화와 영화시장
1992년 베를리날레의 영화시장(Film Market)은 다른부문에서처럼 영화제 사상 가장 높은 참가율을 보였다. 베를리날레의 영화시장에서 해마다 거래되는 영화는 평균 3백편 정도며 세계의 이름난 제작·배급사들은 다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의 영화진흥공사는 오래전부터 이곳의낯익은 사용자로 해마다 참석한 반면 1992년 북한은 자리를 비웠다. 새로움은 90년대 초부터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 배급사들이 새로 문을 열었던 점이다.물론 영화제마다 자동적으로 영화시장이 딸리는 건 아니다. 국제적으로 가장 큰 아홉 개의 영화제 가운데 오랜 전동과 권위를 가진 영화시장은 칸과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다. 둘을 비교하면 칸의 영화시장이 제일 크고두 번째가 베를린국제영화제다.한편 국제화시대에 들어서면서 영화시장 확보 문제 때문에 영화제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그런 시점에 1992년 베를리날레의 개막식 연회석에서 독일정부의 내무부장관 빈프레드 칸티르와 미국의 영화제작협회장 잭 발렌틴 사이에 터진 말다툼의 배경도 시장문제때문이었다.“칸티르 장관은 파티장에서 만난 발렌틴 회장을 향해 독일영화계는 할리우드와 싸워야 한다. 할리우드와 협조하여 이익을 얻으려고 힘을 쓸 게 아니라 경쟁을 해야 한다”고 상당히 흥분된목소리로 항의성의 발언을 하여 연회장의 분위기가 한동안 싸늘했는데, 그에 발렌틴 회장은 미국에서는 일본차의 침범으로 자동차산업이 오히려 다시 살아나고 있다”고 아주 비꼬인 대답을했다(무빙 픽춰 베를린, 1994, 2, 12 중에서).발렌틴은 한국의 영화계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90년대 말 할리우드 영화 <타이타닉>이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를 얻고 있을 때 오직 한국에서만 두 번째 자리에 머물러있었다.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타이타닉을 앞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할리우드가 발끈할 수밖에, <쉬리>의성공 소식을 들은 발렌틴은 한국에 들어가 기자회견을 열고는 오만스레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는 우루과이 협상에 위배된다며 법에서 제거하라는 충고(?)를 했고,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을 만난 자리에서는 스크린쿼터제를 없애면 미국정부에서 한국영화 감독들이 최신 영화교육과 첨단의 영화테크놀로지를 대주겠다는 등, 할리우드 영화시장을 지키기위해 온갖 술수를 다 썼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서 얻은 건한국 영화인들의 빗발치는 항의였을 뿐, 스크린쿼터제는변함없이 계속됐으며 <쉬리> 이후 한국영화는 오랫동안 인기 면에서 할리우드를 앞서 일위를 차지했다. 스크린쿼터제는 국산영화 의무상영제로 일정기간 자국의 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하도록 하는 (영화)무역 장벽이다.
독일영화의 위기
1994년 베를리날레를 통해 본 독일영화는 내리막길을가고 있었다. 독일의 주요 주간지인 <디 자이트>(Die Zeit)의 유명한 영화평론가 안드레스 킬브는“독일 영화는 죽었다. 우리는 독일 영화를 싫어한다”는 제목으로 쓴 끌에서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지적하면서 독일의 뒤처진 영화의생산체제와 관객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루한 독일영화에대해 신랄한 비평을 퍼부었다. 60년대 오버하우센 선언 이후 서독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주도했던 파스빈더, 크루게,쉴렌도프는 이미 죽었거나 영화제작에서 손을 뗀지가 오래인데다 빔 벤더스 영화마저 관객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젊은 세대의‘하나로 합쳐진 독일영화’에 걸었던 기대는 현실화되지 못했고 동독의 거장들은일자리를 찾지 못했다.그런데다 포즈담의 바벨스베르그 영화스튜디오까지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됐다. 1912년에 설립된 바벨스베르그는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형의 영화스튜디오로서 메트로폴리스, 칼리가리 박사의 캐비넷 등 독일 영화사의 초창기를빛냈던 영화들이 만들어진 곳인데, 분단 이후 동독정부에소속돼 있었으나 통일 후 쌓인 빚 때문에 1992년 영화와는상관이 없는 프랑스의 한 종합기업체에 팔렸다.베를리날레의 또 하나 약점은 전통적인 친할리우드 성향이었다. 예를 들어 3대 집행위원장 모리즈 데 하델른(1979~2001)은 오스카수상 추천 대상에 올라있는 미국영화들을 국제경쟁부문에 넣는가 하면 이미 베를린의 일반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할리우드의 상업영화를 영화제의여러 부문에 초청하는 등 칸이나 베니스에서는 도저히 허락될 수 없는 수준 낮은 영화들이 베를리날레의 무대를 차지하여 관객과 기자들의 불평이 그치질 않았었다.그런 가운데 유럽통합은 베를리날레가 친할리우드 정책에서 유럽영화 쪽으로 관심을 돌리는데 큰 게기를 만들어줬다. 특히 유럽영화공동협회(Eurimage)의 역할이 특히 컸었다. 유리마지는 80년대 말에 유럽연합이 만든 영화산업조직체로서, 설립의 목적은 유럽영화의 공동제작과 배급그리고 상영을 돕는 데 있으며 89년부터 2009년까지 10년 동안에 1천 3백편의 영화가 이 조직을 통해 만들어졌다. 유리마지에는 유럽연합국 말고도 터키, 전 유고슬라비아 나라들을 합친 34개국이 협조하고 있으며 회원국 42개도시의 2092개 극장에서 유럽영화들이 끊임없이 상영되고있다(2009년 유리마지의 통계 인용).
설날에 열린 제4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나는 1991년에 처음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참가했다.예전처럼 통역을 부탁받고 갔던 게 아니고 처음으로 기자자격으로 갔다. 그 즈음 나는 지금은 폐간된 월간지『영화예술』(이영일 편집장)에 글을 쓰고 있었던 데다 1991년 초국제평론협회의 스위스 회원이 되면서 스위스의 주간지『포르베르쯔』에 영화평을 쓰고 있었다. 프레스카드는 내 직업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는 열쇠가 됐다. 그러나 작은 영화제만 다니던 나에게 베를리날레는 고달팠다. 수백 장에달하는 각 부문의 프로그램을 익히는 데만 며칠이 걸렸고하루에 5~6편 영화를 보다보면 식사시간을 떨칠 때가 많았다. 유난히 먹는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 뿐 아니라 영화제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매일 나오는 일간지들도 읽어야 했는데, 열이틀 동안을그렇게 지내야 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내가 보지 못한영화들이 상을 받을 때‘나는 왜 보지 못했지?’하는 허탈감에 빠질 때가 많았다.1994년 베를리날레에 참가한 언론인은 3천명이 넘었다.그 반절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이었고 나머지는 신문과 영화전문지의 기자나 평론가들이었다. 90년대 초에는 몇 명에지나자 않았으나 1994년에는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의제작자 이태원 사장의 초청으로 20여 명의 기자들이 왔었고, 영화진흥공사와 이태원 사장의 초청으로 근사한 파티도 열렸었다.베를리날레는 1990년 통일 이후 갑자기 늘어난 언론인들을 위해 영화제의 본부 시네센터에서 셔틀버스로 5~6분이면 닿는‘세계문화원’에 프레스센터를 따로 열었다. 통통한 조개 모양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60년대 초 미국정부가반공의 동맹을 다짐하는 뜻에서 베를린 시에 기증한 상설전시장이며, 60년대 CIA의 최고책임자였던 존 포드 달레스의 이름이 붙은 거리를 나는 12일 동안 매일 지나면서 프레스센터에 들랑거렸다.1994년의 개막식 날은 음력 정월초하루였다. 영화제 측에서는 동양의 전통적인 신년의 축제일을 기념하는 뜻에서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어린 부처>를 개막식 영화로골라 조 팔라스트 영화관에서 상영식을 가졌다. 티베트와부탄 그리고 미국의 시애틀이 극무대로 떠오르는 <어린부처>의 핵심주제는 인간의 재생이며, 영화는 재생에 이르기위해 인간의 허망한 살의와 욕심을 자비의 불심으로 극복해야 함을 설파했다. 제작비 3천 5백만 달러가 들어간 <어린부처>는 그러나 화려한 영상과 완벽한 음향 등의 멋진 포장에도 불구하고 내용 면에서 너무 허무맹랑한 오락물로 떨어져 그럴싸한 한편의 민속영화로 끝났다.그런 가운데 독일의 제2방송(ZDF)에서는‘불교의 세계’라는 주제로 3편의 불교 내용의 영화를 특별 방영했다. 임권택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와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그리고 일본영화 <차도 스승의죽음>이었다. ZDF의 프로그램은 <어린 부처>의 출현으로 불교 테마가 유행을 타는 시기에 동양감독들의 같은 테마의 역작들을 소개함으로써 할리우드식의 불교영화와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거기에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이 국제경쟁부문에 들어 이래저래 불교는 1994년 행사의 중요한 테마가 됐다.장선우(본명 장만철) 감독의 네 번째 영화 <화엄경,1993>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불교경전‘화엄경’을 소설로써 크게 주목 받았던 고은의『화엄경』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소설에서는 어린 선재가 나그네로서 길에서 만난 53명의 스승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러 부처가 되지만 영화의선재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찾아나서는 고아로 나타난다. 장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전에 고은 작가와 함께 인도여행을 했다. 그리고 <화엄경>은 장 감독이 1년간 내내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주 어렵게 만든 영화다.<화엄경>에 대한 기자들의 반응은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내가 한 기자에게 그의 소감을 묻자 그는“베르톨루치의 <어린 부처>에 비하면 훨씬 완성도가 높다. 종교테마를다루는데 있어 감독의 진지함과 독자적인 연출력이 마음에들었다”라고 호평을 했다.장 감독은 80년대 중반 박광수, 이장호 감독들과 함께 영포럼의 무대를 통해 국제적으로 알려진 시쳇말로‘한국의새로운 물결’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첫 영화 <서울예수>와1993년의 <경마장으로 가는 길>이 포럼에서 첫 국제상영을 가졌다. 그리고 1994년 <화엄경>으로 그는 국제경쟁부문에서 알프레드 바워 상을 받았다. 알프레드 바워는 앞에서 말했듯이 베를리날레의 첫 집행위원장이었으며, 그의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은‘영화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은작품’에게 돌아가는 장려상이다. 수상은 국제경쟁의 심사위원들이 결정하지만 수상 자체는 본상의 수상목록에 들어있지 않으며 해마다 상을 주는 것도 아니다. 수상 품의 모양은 곰의 모습이 아니라 곰의 형상이 박혀있는 상패다.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수상의 성격을 잘못 해석하여 웃지못 할 일이 일어났었다. 영화진흥공사의 월간지『영화』(1953)를 보면‘<화엄경>, 베를린 영화제의 은곰상, 61년의 <마부>에 이어 두 번째 영광’이라는 제목으로“독일 표현주의 기법의 영화를 정착시킨 촬영기사 알프레드 바워를기리는 특별상은 그랑프리 다음의 은곰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한국영화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것은 지난 61년 특별부문상을 수상한 <마부>(강대진 감독)에 이어33년 만에 두 번째이다”라는 글이 발표됐다. 그 뿐 아니라영화진흥공사는 수상을 축하한다며 영화계와 문화계의 2백 명을 힐튼호텔에 초대하여 파티를 열고는“<화엄경>의수상은 어려움에 빠진 우리 영화계의 희망적인 경사”라고칭찬을 쏟았다.그러나『영화』의 기사는 오자투성이의 허망한 자화자찬이었다. 알프레 바워는 베를리날레의 첫 집행위원장으로영화사학자였으며 촬영기사가 아니었다. 그의 상을“그랑프리에 해당하는 은곰상의 특별상”으로 쓴 건 오해를 넘어영화제의 규칙에 어긋나는 행위였고, <화엄경>을“특별부문상을 수상한 <마부>에 이어 33년 만에 두 번째”라고 쓴것은 강대진 감독에게 큰 결례였다. <마부>는 61년 국제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인 은곰상을 받았다. 그 뒤에한국영화로서 같은 등급의 상을 받은 감독은 없었다. 다만2007년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다시 알프레드 바워 상을 받았다.
최영일 감독과의 만남
이제 최양일 감독에 대해 쓸 차례다. 나는 최 감독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우연히 영포럼 (1994년부터 국제 포럼으로불림)의 프로그램에서 상영되던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를 봤다. 그리고 재치와 유머가 튕기는 이 영화에 푹 빠지고 말았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재일동포 양석일작가의 소설『택시 광조곡』을 영화에 옮긴 것으로, 최 감독의 영화는 남북분단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한인사회, 필리핀의 불법이민여자를 이용하는 한인가족, 직장에서 한국동료를 이용하고 멸시하는 일본남자 등, 일본사회의 밑바닥에서 이리저리 엉켜 사는 인물들의 일상을 꼼꼼히 드러내는통쾌한 희비극의 군상화이다. 가장 비천한 인간들에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만들어 내는 최 감독의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최 감독은(일본 이름은 사이 요우치) 영화상영 후 관객과의 토론에서“<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점은 한국인들의 생동감과 활달함이었다”고 일본말로 대답했다.관객과의 토론이 끝난 뒤 최 감독은 영화관에서 나오는한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더듬더듬하는 한국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때라서 한국 관객은 많을 걸 알고 싶어 했다. 한국과 합작을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 나에게 최 감독은“아직 모르겠으나 곧 한국에 갈 예정이며 그럴 수만 있다면 물론 합작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는 1994년 베를리날레에 대해『영화』의 지면에 글을 쓰면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가 한국에 언제 소개될지 모르지만 이렇게훌륭한 영화를 만든 최영일 감독에게 앞날의 행운을 빈다”고 썼다.하지만‘일본영화 수입금지법’으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베를리날레에 등장한 뒤 14년이 흐른 뒤에야 한국에서 상영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그는 국적을 한국인으로바꾸고 연세대학교의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도 배웠다. 그리고 2004년 3월에 최 감독의 대표작 (1983년부터 2002년까지) 10편이 서울아트시네마의 회고전을 통해 한국의관객과 만났으며 그해 감독의 화제작 <피와 뼈>(2004)가부산국제영화제에서 초연을 가졌다. 이 영화는 2005년 제28회 일본아카데미에서 감독상, 여주연상, 남조연상을 받았으며, 일본의 컬트 감독이며 배우인 키타노 타게시가 한국인으로 등장하여 그의 생애에‘최고 연기력’을 보여준 명작이다.재일교포 2세인 최양일 감독은 1949년생으로 조총련계의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선배의 소개로 일본영화계의친한파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문제작 <감각의 제국>의 조감독이 되면서 영화계와 만났다. 그는 1983년 첫 작품 <10층의 모기>의 연출과 함께 80년대 일본 영화계의 중심으로 떠오른 젊은 감독의 하나였으며 그의 여덟 번째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1994년 일본영화의 최우수작으로 뽑혀 국내의 상을 모두 휩쓸었던 감독의 최고 작품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