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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 |
얘기보따리의 소리로 엮는 전주이야기 오목대전
관리자(2010-11-04 14:31:40)
얘기보따리의 소리로 엮는 전주이야기 오목대전 대풍가를 불러라, 천년 전주여! - 얘기보따리 문신, 신귀백, 이병천, 최기우 고려 말 일천삼백팔십년, 전주 이씨 장군 이성계가 남원 운봉황산에서 노략질로 날뛰던 왜구 아지발도를 무찌르고, 승전고를 부르며 개경으로 돌아갈 적, 전주부성 동남쪽 승암산 발치에 이르렀는데, 이곳이 자신의 사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곳이라.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핏줄 울리는 그리움을어이 가누랴.할아비의 탯자리 지척인 오목대서 일가친척 이웃사촌 모아놓고 한바탕 연회를 베풀었는데. 석잔 술에 흥이 난 이성계가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으니, 이 노래가 대풍가(大風歌)라. 거센바람 불어와서 먹구름이 사라졌네 위세사방 떨치고서 고향으로 가던길에 한아비의 탯자리라 전주완산 이르렀네 고덕모악 첩첩산중 북극성에 달해있고 징게맹게 외배미들 서해또한 지척이라 완산전주 명승이라 하늘에서 열렸구나 완전한뫼 완전한누리 천년고도 예아닌가 “아! 어찌하면 용맹한 인재를 얻어 완전을 얻을 건가.?? 하늘의 뜻이런가. 오목대 그 자리에 종사관으로 따라온 포은이 있었는데. 포은이라 함은 저 개성 선죽교에서 횡사한 정몽주를 이르는 말이니, 오목대서 이미 그 운명이 정해졌던 모양이라. 이성계의 혁명을 간파한 포은이 한달음에 말을 달려 남천 건너 남고산 만경대에 올랐는데, 정몽주가 이곳에서 북쪽 하늘우러르며 스러지는 왕조의 한을 석벽제영(石壁題詠)이란 시에담아 읊었으니, 등전주망송대(登全州望宋臺)라. 천길높은 바위산에 홀로 다다르니 가슴에 이는 시름이여 이마음을 어이할고 푸른산에 깊이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 누른잎은 어지러이 백제성에 떨어지네 전주완산 높은기운 나그네의 시름물고 한평생을 지닌호기 서생으로 그르쳤네 하늘가에 해는저도 뜬구름은 합하는데 고개돌려 속절없이 서울하늘 바라보네. “아! 풍패지향 하늘의 뜻이라 어찌할 수 없구나.?? 포은의 탄식은 망국의 선 울음이었던가. 그 노랫소리 개경에이를 무렵, 고려는 기울고 조선이 개국 됐으니, 전주는 왕조의 근원이라. 이 모든 일이 비롯된 곳이 바로 오목대였으니, 시방도 흐린날 오목대에 올라서면 대풍가가 들리고, 오목대와 마주한 남고산 만경대에서는 포은의 한숨소리가 들리는가 보더라.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벌에서 왜구를 물리친 뒤 돌아가는 길에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다. 한옥마을에서 계단을 다 오르면 넓은 공터 가운데 아담한 비각이 서있다. 1900년에 세웠다는 비각 안에 서 있는 비석에는“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遺址)”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고종황제의 친필이다. 비각뒤로 오목대가 굳건하게 서 있다. 이성계는 이 자리에서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불렀다는‘대풍가’를 읊었다고 한다. 큰 바람이 일어나서 구름이 날아오르다 위세가 해내에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어디서 용맹한 무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까 대풍가를 통해 이성계는 흉중에 묻어두었던 천하제패의 꿈을 은연중 드러냈다. 이에 종사관으로 참전했던 정몽주가 격분한 마음에 한달음에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북쪽 개경을 바라보며 그 심정을 노래로 읊었으니 지금도 만경대에 그 시가 새겨져있다. 천길 된 바윗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어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 누른 잎이 휘휘 날려 백제성에 쌓였네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가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열없이 고개 돌려 옥경만 바라보네 이 우국시는 전라도 관찰사 권적(1675~1755)이 임술년인 1742년에 새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전라도 관찰사를 두 번했던 이서구(李書九)가 포은시를 차운(次韻)한 시(1820년)가 적혀 있다. 정몽주가 우국시(憂國詩)를 남긴 지 12년 만에 선죽교에 선혈을뿌리고 순사(殉死)했으니, 이미 오목대를 뛰쳐나갈 때부터 이성계와 정몽주의 운명이 엇갈렸던 모양이다.오목대에서 원대한 포부를 밝힌 데에는 어쩌면 전주가 이성계의 모태의 땅이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조선 왕조의 모태가 된 전주 땅이지만 48명의 임금 가운데 전주를 방문한조선 임금은 태조 이성계가 유일하다고 하니 이 또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어쨌거나 오목대는 조선왕조를 세운 전주이씨와 별도로 생각할 수 없는 상징적 의미를지니고 있다. 한때 전동성당의 건립 예정지로 거론되었다가 포기한 것이나, 일제강점기일본왕의 권위를 보이고자 했던 신사가 오목대를 피해 다가산으로 옮겨 간 것도 오목대에 대한 전주 사람들의‘정신적’믿음 때문일 것이다.아울러 전주에서 일어난 조선 왕조가 몰락해갈 무렵 고종황제가“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와 비각을 세운 것은 초심으로 돌아가 왕조의 부흥을 꾀해보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종황제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몰락해버린 이유를‘주필’에서 찾으면 안 될까? ‘주필’이란 임금이 머무른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직접 전주에 오지도 않았으면서‘주필’이라 하였으니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세우기 어려웠을 터이다.어쨌거나 오목대를 둘러보면 전주 땅이 그리 만만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어찌되었건 오백 여년을 유지해 온 왕조의 모태가 된 땅이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에는 굳은 심지가 콕 박혀 있는 것 같다. 아무리 흔들어도 쉽게 뿌리 뽑히지 않는 정신의 심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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