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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8 | [교사일기]
2학년 3반을 아름답게 만드는 열 가지 약속
최선호 장수고등학교 교사(2003-09-06 09:33:33)
요즘 들판에 개망초며 나리꽃, 개미취 같은 들꽃들이 한창이다. 나는 들꽃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들꽃은 그리 화려하지 않고, 자그마하고 여리게 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들꽃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때론 잡초라고 무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들꽃은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밟아도 밟아도 다시 살아나고, 척박한 땅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누가 관심 가져 주지 않아도, 주변의 산과 들, 논두렁 밭두렁과 어우러져 줄기차게 피어난다. 당당하게 꽃을 피운다. 그리고 무더기로 피어 서로가 서로의 든든한 배경이 될 때 진정으로 아름답다. 들꽃 같은 아이들!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선 들꽃 향기가 난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게 피어 온 산천을 수놓아버리는 들꽃처럼 우리 학교 학생들은 순박하고 소박하다. 나는 4년 전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읍의 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고 아이들을 만났다. 한두 해 그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들의 순수함과 순박함에 푹 빠졌다. 학교폭력, 학교붕괴, 왕따 문제로 사회가 시끄럽고 문제가 될 때에도 이 학교는 이러한 문제에서 한 발 비껴나 있었다. 거의 대부분 순박한 농사꾼의 아들딸로 태어나, 부모님의 순박함을 그대로 배워서일까? 아니면 자연과 벗하며 살다보니 마음이 순화되어서일까? 이러한 아이들을 매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학생들의 다른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고분고분 잘 따르기만 하는 아이들, 소극적인 행동들, 자신의 주장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는 모습들. 이 모든 것이 순박하고 소박함 뒤에 감춰진 학생들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에 나는 까닭 모를 답답함을 느꼈다. 그 답답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감과 삶의 당당함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왜 우리 학생들은 자신감이 없을까? 왜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분명하게 하지 못할까? 복잡하고 힘든 세상에서 당당하게 삶을 개척해야 할 텐데…. 담임을 맡고, 학생들과 상담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 답답함의 원인을 조금은 찾을 수 있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여전히 가난한 생활을 하는 학생들. 도시에 있는 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을 부러워하며 그렇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들. 답답한 산골마을에서 탈출하여 도시로 나가고자 하는 욕망. 초등학교 때부터 누적된 학습 결손으로 인해 학습에 자신감이 부족한 아이들. 그들은 자신감과 당당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이 가진 순박함과 소박함에 자신감과 당당함을 더해주고 싶었다. 먼저 자신감과 당당함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느끼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교실 한 쪽에는 "2-3반을 아름답게 만드는 10가지 약속"이 붙어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 세상에서 나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므로 나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이다. 나는 소중한 존재이기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감을 갖고 자신을 믿고 어떠한 일에 도전하고 노력하는 것, 남을 나와 같이 생각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또한 학생들에게 자신감과 당당함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정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고등학생은 아직 미성년자이니까, 선생님이 이끌어 가야 한다. 이것이 교육이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은 타율적인 인간이 되어간다. 물론 교육적으로 선생님이 학생들을 올바른 길로 안내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그것에 기초해서 책임감 있게 행동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일 것이다.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와 어떤 일을 할 때, 힘들더라도 기쁨과 보람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반장 선출, 학급의 규칙을 정하는 일, 학급의 환경을 꾸미는 일 등을 학생들의 토론을 통해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인문계 고등학교로서 어쩔 수 없이 부딪히는 문제인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에 참가하는 일들을 강제로 시키지 않았다. 야간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의 장단점을 토론하게 하고, 학생들이 자기 편의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비판해 주면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만 하였다. 결정은 학생 스스로 하게 하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였다. 담임을 맡은 지 한 학기가 지난 지금 나는 학생들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기의 생각과 주장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선택한 방법은 학급회의 시간과 수업시간(국어)을 이용하여 토론을 하는 것이었다. 학교급식 운영 개선 방안, 두발자유화 등 학내 문제에서부터 "유승준의 입국금지문제" 등의 사회 문제,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공격, 통일 문제 등 국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당시에 쟁점이 되고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안에 대한 토론을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소에 자기 주장을 적극적으로 발표하지 못하던 학생들이 한 번에 변화될 수는 없었다. 지명을 해야 겨우 대답하기도 하고, 긴장해서 제대로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횟수가 거듭될수록 학생들은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또박또박 발표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더니, 이제는 많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손을 들고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떨 때는 토론이 과열되어 학급회의 1시간으로 부족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요즈음 우리 학교는 학교교칙 개정문제가 학생들의 초미의 관심사이다. 개정된 학교교칙에는 용의 복장, 두발, 핸드폰 사용 규제 등 학생들에게 민감한 사항들을 많은데 예전에 있던 교칙보다도 강한 규제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학급회의 시간에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학생들이 한마디씩 한다. "선생님 우리 토론해요!" "무슨 내용으로 토론할까?" "학교 교칙 개정에 대해 토론했으면 합니다" "그래! 그럼 실장이 사회를 봐라. 그리고 의견 있으면 손을 들어서 발표하고, 발표할 때는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차분하게 자기의 주장을 펼쳐봐라!" "저는 이번 우리 학교 교칙을 개정하는 과정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학교교칙은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용의복장·두발 등 많은 부분이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인데 학생들의 의견을 거의 듣지 않고, 선생님들끼리 일방적으로 교칙을 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과정보다도 내용에 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교내에서 핸드폰 사용금지 등은 현실성이 없는 규칙입니다" "저는 우리들 스스로도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교복을 규정대로 잘 입지 않고 있으며, 수업시간에 핸드폰이 울려 수업을 방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의 대표인 학생회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학생회가 전혀 활동도 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중요한 사항에서도 학생들의 의견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학생들이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발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고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 들꽃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가 되거라!" 최선호/1970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전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지난 2000년부터 첫 부임지인 장수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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