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8 | [세대횡단 문화읽기]
세상을 빚어내는 무한한 상상력의 날개
극작가 노경식/김정수(2003-09-06 09:32:11)
글로써 세상을 그려내는 사람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무대 위에 사람들의 희망과 좌절을 풀어놓는 사람들, 바로 극작가들이다.
인물을 창조해내고 이야기를 빚어내는 이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은 오롯이 이들만의 특권이자 세상을 차고 날아오르는 자유로운 날개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따뜻해야 하며,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부드러워야 한다. 그렇게 해서 창조된 이야기가 객석에 앉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위안이 되고 통렬한 시대의 메시지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 날개를 얻은 그들의 '천형'이다.
남원 출신의 극작가 노경식·김정수씨가 만났다. 40여년 동안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극작가로 수많은 작품을 무대 위에 올리며 극문학의 굳건한 계보를 이어온 노경식씨. 그는 남원과 전북의 이야기를 향토색 짙은 언어와 정서로 풀어내면서 역사와 역사의 격랑에 휩쓸린 인간 존재를 탐색하며 리얼리즘 작가로서 확고한 위상을 다져왔다. 서울을 활동무대로 삼아온 작가지만, 고향은 그의 감성을 이루고 역사의식을 심어준 문학의 탯줄이다.
전국적으로도 드문 희곡 전공자로 극문학을 연구해온 김정수씨. 지역 문화 곳곳을 종횡무진 누비며 문화예술을 견인하는 중견 문화인으로 선 그는, 지역적 소재를 찾아 창극과 오페라를 꾸준히 창작하며 척박한 무대예술에 윤기를 더해주고 있다.
공사가 한창인 서울 세종문화회관 분수대 앞. 나란히 벤치에 앉은 두 선후배 작가는 극문학의 생명은 인물 창조와 치밀한 플롯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문학과 연극이 만난 '극문학'은 그 속에 깊이 빠져 본 사람만이 그 독특함과 매력을 알 것이라며 환한 웃음으로 따뜻한 교감을 나눈다.
극작가 노경식 / 김정수
김 : 선생님, 반갑습니다. 전에 군산에서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벌써 구 년전이네요. 자주 찾아 뵙고 좋은 말씀도 듣고 그래야지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지내왔습니다. 오늘 이렇게 기회가 주어지니 저에겐 더없이 반갑고 고마운 자립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동랑연극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지난 4월이었죠?
노 : 고맙습니다. 나도 반갑습니다. 서울까지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고생한 만큼 좋은 자리가 되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김 : 모쪼록 좋은 말씀, 조언도 많이 해 주세요. 저는 선생님이 남원 출신이시고 향토색 짙은 작업들을 많이 해 오셔서 늘 근황이 궁금하고 개인적으로 관심을 많이 두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남원 출신이라 선생님이 더 반갑고 작품에 더 많은 애정이 가는 게 사실이고요.
노 : 아, 그래요? 저와 동향이군요. 아주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이야기 도중 중학교 21년 선후배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 : 예. 얼마 전 대구에서 '노경식 연극제'를 치렀다고 하던데요. 사실 연극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선생님께 부끄럽고 죄송한 생각입니다. 지역을 나눠 생각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연극제는 전북에서 기획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쪽 대구 분들 참 열심이에요. 저희도 자극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 : 예. 고맙게도 내 이름을 내세워 연극제를 하겠다고 하더군요. 나한테는 아주 기쁘고 고마운 자리였고, 감격스런 무대였죠. 거기는 각 대학 강단에서 국문학이나 연극을 가르치고 있는 김 선생 정도의 나이 또래 열 명 남짓이 모여 '무천극예술학회'를 만들었더라고요. 이 분들이 희곡작가 한 사람씩 조명해 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내 연극제도 연극제지만 더 고마운 건 이번에, 차범석 선생이 내 윗대 선배인데, 차범석 희곡연구라는 4백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을 펴냈더라고요. 조만간 내 작품도 그렇게 작업을 해 낼 계획이라고 해요. 참 고마운 일이죠.
'반민특위' 소재로 한 정치드라마, 무대에 선다
김 : 그동안 선생님 활발히 활동하신 경력이나 한국 연극계에 공헌하신 경험을 우리 지역에 쏟으실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는데, 그 점이 미흡합니다. 그래서 저 역시도 죄송한 마음이고요.
노 : 예. 그래요. 사실 나도 좀 무심하긴 했죠. 헌데 우리 고향이 무슨 일을 도모하고 치러내려고 해도 넉넉한 여윳돈이 있는 곳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일례지만, 어디 연극공연 심사를 가면, 거 왜 무대공연지원사업 있죠? 다른 지역의 경우, 전북보다 월등히 지원 액수가 많아요. 큰 차이가 나는 게 현실이에요.
김 : 예. 선생님, 요즘 근황은 어떠십니까? 집필 중이신 작품 있으신가요?
노 : 요즘 내가 준비하고 있는 일이 두 건 정도가 있어요. 그 중 하나는 서울시립하고 작품을 준비하고 있어요. 소재는 역시 역사극인데, 반민특위 활동을 주제로 정치드라마를 한번 만들어볼까 하구 있어요. 아직 대본을 쓰고 있는 중이고, 탈고가 곧 끝날 것 같아요. 가을 아니면 내년 봄에 막을 올리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반민특위를 소재로 한 정치드라마, 가제는 <서울의 안개>, 그때가 안개 정국이었으니까요. (웃음). 또 하나는 문화관광부에서 매달 이 달의 문화인물을 선정하잖아요? 올 9월에 선정된 문화인물이 사명대사라고 해요. 내가 사명대사 이야기를 가지고 불교방송에서 라디오드라마를 했었거든요. 그게 소설로도 나왔고요. 사명대사가 의병을 일으키고 불심을 닦던 곳이 강원도 고성 부근이에요. 민통선 근처에 건봉사라는 절이 있는데, 사명대사가 머물렀던 곳이죠. 그 사명대사가 문화인물로 선정이 되니까, 고성군이 발벗고 나서 유적발굴도 하고 기념 행사도 만들려고 하는 모양이에요. 그 중의 한 행사로 사명대사 국악발표회라는 기념행사를 하는데 그 창작곡의 노랫말을 내가 쓰게 됐거든요.
김 : 장편 서사시처럼 쓰시게 되겠네요? 거기에 곡을 부치고…
노 : 그렇죠. 사명대사의 의병이야기를 강원도 소리, 메나리제로 곡을 만들어 일종의 국악 칸타타를 만든다는 거예요. 요즈음은 이렇게 지자체에서 많은 의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 : 반민특위 이야기는 참 기대되는 이야기인데요? 문학에서든 연극에서든 정면으로 다뤄진 적이 없어서 더 기대가 됩니다.
노 : 그래요. 역사적으로 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조명된 적도 없고, 그것이 문화예술 작품으로 다뤄진 적은 더더욱 없지요. 하지만 우리 역사를 돌아볼 때, 꼭 짚어야할 대목이지요. 김 선생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어요?
김 : 예. 저는 정통 희곡보다는 뮤지컬과 오페라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최근 소리꾼 진채선의 이야기를 오페라로 쓴 적이 있는데, 소리꾼의 이야기고 그 형식이 국악 오페라라는 점에서 전주가 아니면 못할 작업이었지 않나 싶어요. 왜냐면 실제로 서양 음악과 한국음악 사이에는 아직도 높은 경계가 있고, 작업에 있어 배타적일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전북지역은 조금 독특합니다. 판소리의 고장이라 그런지 서양음악과 한국음악이 그렇게 배타적이게 공동작업들을 해냅니다. 이번 가을 소리축제에도 오페라 <춘향>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 음악으로 오페라를 만들면 세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작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크게 보면 극문학의 하나지만, 오페라나 뮤지컬은 상징과 은유가 강한 음악극이라는 측면에서 일반 희곡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지요. 앞으로는 소극장에서의 아기자기한 희곡들을 써보고 싶습니다.
노 : 그거 좋네요. 그런데 오페라는 결국 음악극이고 음악이 그만큼 중요한 요소인데, 작곡자로는 대개 누가 참여하고 있습니까?
김 : 전북지역에는 뛰어난 작곡자들이 많습니다. 이번 공연될 오페라 <춘향>은 대구 분이 작곡을 했습니다만, <진채선> <혼불> <정읍사> 등 대형작품들이 작품은 전북에 계시는 분들이 작곡을 했습니다. 국악 창작곡들을 작곡하시는 분들도 몇몇 분들이 계십니다. 음악 하시는 분들은 서로 자신들의 영역을 넘나들기가 힘든가 보더라고요. 그렇지만 전북지역은 서양과 국악이 서로 왕래도 하고 이해가 있어서 우리 지역만의 큰 장점이고 앞으로 상당한 강점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선생님도 뮤지컬 <징게맹게 너른들>을 쓰셨는데, 앞으로 음악극 쓰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노 : 하하, 그거야 뭐... 기회가 되면 가능할 수도 있겠죠. 오페라나 대형뮤지컬은 상당한 비용이 필요한 것이어서 쉽게 기획되기 어려운 점이 있어요. 참, 이번에 순천시립에서 무슨 오페라를 준비하는 모양이던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소재가 순천 인물인 것 같아요 그래도 제법 규모도 있고 예산도 투자가 되는 모양이에요.
김 : 예. 사실 지역의 경우엔 관에 의지 않으면 작품 올리기가 상당히 어렵거든요. 오페라 하나 올리려면 기본적으로 2억은 필요해요. 오페라 <춘향>의 경우는 제 고향 이야기라 더 애착이 가는데다, 다행히 중앙에서 문예진흥기금을 지원 받게 됐습니다. 지원액은 7천만원 정돈데, 파격적인 거라고 하더군요. 서울에서도 공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노 : 그래요? 반가운 일이네요.
관객들의 눈물과 웃음, 그것을 지켜보는 희곡만의 매력
김 : 선생님 작품 쓰시는 일에 관해 여쭤볼께요. 전 작품 쓸 때 날을 새기도 하곤 하는데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몰아서 일하시는 스타일이세요, 아니면 긴 시간을 두고 꾸준히 조금씩 써 나가시는 편이신가요.
노 : 나는 자료를 굉장히 많이 보는 편이에요. 역사극을 많이 하다 보니까 자연히 생긴 버릇이지요. 그런데 막상 집필기간은 몰아쳐서 짧게 하는 스타일이에요. 길게 생각하고 쓰는 일은 몰아치고. 이번 '반민특위' 관련 작품도 자료를 엄청나게 많이 봤어요.
김 : 그러세요? 그런데 그렇게 빨리 몰아쳐서 쓰셔도 선생님 작품을 보면 언어가 상당히 잘 다듬어져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데요. 그게 다 공력이 있으셔서 그런 걸까요? (웃음) 참, 그런데 집필은 컴퓨터를 쓰시나요.
노 : 하하. 요즘 말로 독수리 타법이긴 하지만 컴퓨터를 쓰지요.
김 : 선생님께서 어떤 계기로 희곡을 쓰게 되신 건지 궁금한데요. 동기나 계기, 기억나십니까?
노 : 희곡을 쓰게 된 건...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내가 경희대 경제학과 출신인데, 그 때 교양으로 황순원 선생한테서 문학을 배웠거든요. 그때 황순원 선생님이 글을 써 보라는 권유를 하셨어요. 내가 수필이며 이런저런 글을 써서 학보에 기고도 하고 그랬는데, 그걸 읽어보시고 자꾸 권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나도 내가 왜 희곡을 쓰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 (모두 웃음)
김 : 보통 연극반 활동이 계기가 되는 분들이 많으시던데…
노 : 나는 전혀 연극반 활동도 안했거든. 김 선생은 어떤가요?
김 : 저는 소설 지망생이었는데 연극을 만나 희곡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때 우연히 연극반을 접한 게 계기가 되었지요. 그래도, 선생님, 어느 날 갑자기 희곡을 쓰게 되시진 않으셨을텐데.
노 : 그래요. 나도 사실 아무 이유가 없진 않겠지. 내가 남원 읍내에 살았는데, 남원에 유일한 극장이 남원극장이라고 있었어요, 거기가 하정동이에요. 내가 그 동네서 살았거든요. 그 골목에 살았던 덕택에 전쟁 무렵 악극단이나 활동사진을 많이 봤어요. 그 당시엔 학생들은 못 들어가게 했는데, 나는 슬쩍슬쩍 들어가 보고 그랬거든. (웃음) 그런 게 혹시 나한테 연극을 쓰게 된 잠재적인 계기가 된 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은 해요. 본격적인 계기라면 대학을 다니면서 교내문학상에 희곡으로 당선된 적이 있어요. 그 때는 문학상 수상자에게 1년간 등록금을 면제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상당히 큰 돈이잖아? 그래서 희곡을 쓰게 되었죠.
김 : 시나 소설 분야도 함께 공모를 했을 텐데, 왜 하필 희곡을 쓰셨어요?
노 : 그게 아마도 아까 이야기한 잠재적 계기가 움직인 거겠죠. 그 때 문학상 받은 그 작품이 그 해 개교기념공연 작품으로 올라갔거든요. 출연진으로 문오장 씨 등이 당시 1,2학년 학생이었는데, 연극반들이라 무대에 섰었어요.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김 : 그 때 대학시절은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으셨죠?
노 : 내가 대학시절 동안 4.19, 5.16을 다 겪었거든요. 5·16 쿠테타가 일어나니까 학생들은 물론이고 대학 전임자들까지도 다 잡아들였잖아요. 그러니 논산에 훈련생들이 자꾸 넘치고 사람들이 밀리니까 그 때 보충역제도가 생겨서 그쪽으로 전환을 한거거든. 군대를 안 간 것이 아니라 못간 사람들이 나왔어요. 그 때 남원에 내려가 지내다가 우연히 신문을 보니까 남산에 드라마센터 아카데미가 생긴다는 소식이 있는 거예요. 극작 연기 분야에서 사람을 모으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거기 등록을 해서 희곡을 배운 겁니다. 노느니 거기나 가볼까 해서 갔던 것이 오늘날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웃음) 또 그 해에 바로 신춘문예에 당선이 됐고요.
김 : 그러셨군요. 선생님은 희곡만의 매력이 어디 있다고 보십니까?
노 : 황순원 선생님이 내 첫 작품인 <달집> 초연 때 직접 공연장을 찾아 오셨더라고요. 보고 나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해요. '소설은 말이야, 독자들이 내 글을 어떻게 읽는지 얼마나 감동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희곡 작가는 내 작품을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반응을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 아니야, 그거 참 매력있어, 부러워' 하시더란 말이죠. 그런 매력이 있는 대신, 또 그만큼 어려운 것이 희곡이에요. 활자로 전해지는 시나 소설은 혼자 작품 써서 넘기면 그만인데, 희곡은 연습기간만 두달 이상이거든. 거기에 모두다 선생이고 다 대가야. (웃음) 연출, 배우는 물론이고 광고하는 사람부터 세트 제작하는 사람들까지 다 한마디씩 하는 사람들이란 말이지. 공연 때 비평가들까지 포함해서 수시로 엄청나게 평가받는 문학이 희곡이예요. 참 독특한 형식이지요. 희곡은 엄격히 극문학이지만 연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무대에서 어떻게 형상화되느냐에 따라 결판이 나는 거예요.
'리얼리즘'을 낳은 작가의 환경과 역사의식
김 : 그렇죠. 연극작업 자체의 어려운 일이 여러 스텝들의 요구와 전문성을 수용하고 조율해야 하니까요. 저의 경우는 작품을 쓰고, 직접 연출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초연의 경우는요. 그게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 작가로서 글을 쓸 때는 머릿속에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직접 연출을 하면 그 그림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대신, 그 그림에 갇혀 더 이상의 나가지 못하고 보다 나은 창조적 표현을 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생기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작가에게는 좋은 연출자를 만나는 게 큰 복인 것 같아요. 혹시 선생님도 어떤 연출자가 그런 행복감을 줬는지, 가장 작업하기 편하고 좋았던 연출자를 꼽으신다면 어떤 분이 계실까요.
노 : 꼭 한 명을 꼽으라면 극단 산울림 대표이고 예술원 회원인 임영웅씨를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연출가가 나로서는 제일 고맙죠. 내 작품 해석이나 창조를 아주 잘 하셨어요. 그 분이 내 작품을 제일 잘 만드셨고, 거의 대부분이 성공했으니까요.
김 : 반대로 생각하면 임 선생님도 작가를 잘 만난 거 아닙니까? (웃음)
노 : 글쎄요...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작업을 하면 더 즐겁고 신이 나는 법이죠.
김 : 이제 좀 본격적인 이야길 해 봤으면 하는데요. 선생님 작품들을 보면 초기작 <달집>부터 시작해서 <만인의총> <정읍사> <징게멩게 너른 들> 등, 전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지 않습니까. 작품에 쓰이는 언어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주 활동 무대는 서울이지만, 향토색 짙은 작가다, 라고 평할 수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선생님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어떤 걸 꼽을 수 있을까요.
노 : 그래요. <달집>이나 <만인의총>, <소작지> 같은 작품도 다 남원을 소재로 하고 있거든요. <달집>이나 <소작지>는 똑같은 남원 사투리가 등장하는데, <달집>은 여자가, <소작지>는 남자가 주인공이라는 차이가 있지요. 내 작품을 아는 사람들은 <소작지>가 잘 됐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무래도 애착이 가는 건 초기작인 <달집>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군가가 내 대표작을 물으면 <달집> <소작지> <정읍사> <하늘만큼 먼나라> <징게멩게 너른들> <천년의 바람> 등을 들어요. 참, 그러고 보니 <천년의 바람>도 견훤을 소재로 하고 있으니 전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봐야겠네요.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내가 자란 환경이나 그 속에서 형성된 역사 의식 등등이 자연스레 작용하게 되는 것 같고 그래서 내 고향이야기가 소재가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김 : 작품은 몇 편 정도 쓰신 것 같습니까?
노 : 내가 65년도에 데뷔를 했으니, 거의 40년 가까이 글을 쓴 셈이죠. 그동안 지금까지 장단편 다 합쳐서 33편 정도가 무대에 올랐나 봅니다. 많은 편이지요.
김 : 선생님 작품도 그렇지만 저 역시도 우리 지역 이야기만 다루게 되더라고요. 내년 세종문화회관이 재개관하게 되면 아마 오페라 <춘향>가 공연하게 될텐데, 남원이 고향인 사람으로서 뿌듯함도 있습니다. 참, 또 가장 최근에 쓴 작품은 정읍사를 소재로한 <달아 높이곰 도다사>인데, 왜 <정읍사>는 선생님께서 오래 전에 쓰신 작품이잖아요. 사실 이 작품을 쓰면서 선생님의 <정읍사>를 잊으려고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어요. (웃음) 정읍사라는 노래 하나를 가지고 이야길 만들다 보니까, 상상력이 많이 필요해지더군요. 시대설정에도 많은 고민이 따르고. 저는 시대 배경을 백제 멸망의 시기로 잡고, 여주인공인도 장님으로 설정을 했습니다. 사실 오페라다 보니까 리얼리티가 떨어지고 상징과 은유가 강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누가 뭐래도 한국을 대표하는 리얼리즘 작가가 아닐까 싶은데요. 선생님이 추구하시는 리얼리즘 극에 관한 일관된 방향이나 나름의 고집이 무얼까 궁금합니다.
노 : 우리나라가 서구의 신극을 받아들이면서 연극의 중심이 근대리얼리즘이었고, 60년대 중반까지는 극 형식이란 게 대부분 리얼리즘이었잖아요? 초기부터 시작해서 특별한 변화가 없었던 거죠. 서구 리얼리즘이 그대로 옮겨진 경우에요. 그 후 서사극이라든지 부조리극들이 자주 공연되고 하면서 장르의 확장을 가져왔지만, 우리 세대는 사실 그 부분은 잘 알지도 못했고 제대로 교육받을 여건도 되지 못했지요. 우리에게는 리얼리즘이 일종의 전통양식으로 받아들여져 그것을 기본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극 형식이 서사극이다, 부조리극이다 변화를 하고 있긴 했지만, 결국 뿌리는 근대극 의 리얼리즘에 있다고 봐요. 새삼스레 다른 걸 생각하거나 시도해보자는 생각보다는 전통적인 극 형식을 고스란히 배우고 연구해 온 거죠. 우리가 활동한 60년대 후반이나 그 이후 70년대, 80년대는 극 구성이 지금과는 차이가 많았어요. 왜냐면 그땐 삼일치 원칙에 따라 그 안에서 극을 만들어 갔지만, 지금은 무대 자체가 자유로우니까 여러 장르가 넘나들고 시간이나 장소의 변화가 아주 자유롭잖아요. 서정적 요소를 대담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뿐만 아니라, 극적 구성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게 되더라고요. 과거의 작품들은 대개 3막5장이나 4막7장 하면 끝이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이십 몇 장도 가고, 막 자체의 개념도 없어지고 있잖아요. 영화처럼 씬이나 번호로 매겨지는 경우도 많죠. 상당한 변화임에는 분명해요. 기본적인 소재나 극 전개는 리얼리즘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지만, 극 구성은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봐요.
'거짓말도 그럴 듯 하게'…개연성과 설득력 갖추기
김 : 선생님 작품은 구성상의 리얼리즘을 취하고 있지만, 주제의식 면에서 리얼리즘을 견지하시는 것 같은데요. 물론 최근의 <천년의 바람> 같은 작품은 상당히 다른 면모를 읽혀졌습니다만.
노 : 그것에만 매몰돼 있거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아요. 여러 극 형식이 발전해 왔으니까 리얼리즘도 그 중 하나의 장르로 이어져 온 것이고요. 내가 보기엔 그것도 작가적 시각이나 선호하는 테마에서 접근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작가마다 각자 소재면에서 차이가 있듯이 말이죠.
김 : 이근삼, 윤대성, 이재현 선생님들과 비슷한 연배시죠? 해방 이후 우리 나라에서 학교 교육을 받은 첫 세대가 바로 선생님 세대이신데요. 우리 연극사에서도 그런 의미에서 60년대 극작가 그룹이 해방 이후 현대연극 첫 세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도 선생님 작품이 유난히 리얼리즘 색채가 강한 것 같아요. 혹시 출신 지역적 영향이 있는 건 아닐까요?
노 : 글쎄요. 그것까지는 확실히 모르겠고요 당시 친구들이 윤대성, 오태석, 이재현 씨 등이 있긴 한데…, 우리가 다 같은 세대거든, 65년을 전후로 해서 등단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리얼리즘을 고수한 사람으로 나를 제일 먼저 들고 있는 것 같아요.
김 : 계보로 치자면 유치진, 차범석에 이어 선생님으로 이어진 줄기가 가장 굳건한 한국적 리얼리즘 계보 아니겠습니까?.
노 : 언젠가 한국일보에서 계보를 만들어 보도를 한 적 있는데, 김 선생 말대로 연극 분야에서는 그렇게 계보를 적어 놨더군요.
김 : 희곡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선생님의 리얼리즘은 그동안 삶 속에서 투영된 환경이 중요한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는데요. 선생님 작품의 거의 반 이상이 역사물인 것도 역시 비슷한 맥락일 것 같고.
노 : 내가 채택하는 작품 테마와 주제는 대부분 역사와 인간관계를 설명하고 있어요. 역사의 격랑이 흐르면서 인간의 존재 의미를 묻는 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이죠.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 극 형식의 범위에선 리얼리즘밖에 없었어요. 내가 리얼리즘에 경도되는 이유가 내가 가진 취향이나 주제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김 : 극에서 역사를 다루다 보면, 역사 해석이 중요한 문제이고, 작가 입장에서는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제가 몇 년 전에 <그리운 논개>라는 창작 창극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전국 순회공연을 했는데 진주에서만 공연을 못했어요. 논개가 장수 출신으로 되어 있는데, 진주 문화원에서는 진주 출신이라는 거죠. 아주 우스운 역사왜곡 시비였긴 했지만, 결국 공연 유치를 반대해서 못한 적이 있습니다. (웃음) 사실 진주에서 태어났으면 어떻고 장수에서 태어났으면 또 어떻습니까. 제 작품 안에는 어차피 가상의 인물들이 들어가 있는데,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그것도 역사 왜곡 아니겠어요. 역사가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은 만큼, 결국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몫도 따로 있는 것 아닐까 싶어요. 혹시 선생님은 역사물을 쓰시면서 그런 문제에 부딪히신 적은 없으신가요?
노 : 그런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도 정통 역사극이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많이 썼는데, 나는 어떤 개연성 찾아서 쓰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특별히 역사 왜곡 사건이나 밖에서 반론이 생겼던 일은 없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한번은 한 소설가 내 작품을 보더니, 덥썩 손을 잡고 이야길 해요. 거짓말도 참 그럴 듯 하게 잘한다고. (웃음) 역사극은 역사적 개연성과 설득력을 가져야하는데, 아마 그 작품이 그랬나보죠. 그것이 또 내 나름의 작가적 자부심이 되기도 하고요. 역사적 개연성이나 당위성을 나 나름으로는 상당히 연구를 많이 하고 반론에도 대비를 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그것에 대한 걱정보다는 오히려 재창조하고 해석하고 확대하는 것이 더 어려운 문제죠.
극문학의 생명은 인물의 창조에 있다
김 : 예. 역사적 배경도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지만, 선생님 작품은 또 그 역사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노 : 그렇죠. 내가 알고 있는 한 드라마의 핵은 인물 창조에 있어요. 우리는 여전히 햄릿을 기억하고 돈키호테를 기억하잖아요. 『죄와 벌』의 라스코리니코프를 기억하고 있잖아요. 결국 문학은 인물의 창조, 인간의 창조 아니겠어요. 그런 점에서 보면 요즘 극 형식은 다양해지고 있지만, 가끔은 좀 적당히 가는 것 아닐까 싶을 때가 있어요.
김 : 21세기 들어 극문학이 쓰여질 환경은 분명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선생님 말씀대로 순수한 극문학이 설 자리, 또는 그런 노력들은 많이 희석된 것 같아요.
노 : 그래요. 소설이든 희곡이든 궁극적으로 문학의 목표는 캐릭터, 인물의 창조에요. 그것에서 실패하면 안 되는 거죠. 또 리얼리즘이든 서사적 구조든 부조리극이든 등장인물은 있는 것 아니겠어요? 정통 리얼리즘 형식의 인물창조는 아니더라도 부조리극 안에서도 그런 인물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지요.
김 : 예. 한 때 연극협회 일을 맡고 계셨죠? 그때 우수희곡 발굴이나 극작가 발굴에 힘을 많이 쏟으셨던 걸로 압니다. 아직도 이렇게 건강하시니까 작품 의뢰도 많이 해서 많이 쓰시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웃음) <징게멩게 너른들>은 제가 무척 감동적으로 본 작품이라 한번 더 올려봤으면 좋겠어요. <징게멩게 너른들> 보고 문화저널에 쓴 글도 있는데요. 동학 백주년 기념 작품이었잖아요? 그때를 기점으로 여러 작품들이 나왔는데, 선생님 작품이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노 : 그랬지요. 그 때 동학을 소재로 민예총에서도 작품을 올리고 마당극도 하고 그랬었죠. 그게 9년 전 이야기니까 옛날 얘기네요.
김 : 저는 가끔 왜 희곡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지 반문하곤 하는데요. 물론 희곡이 가진 특수성 때문인 것 같은데, 선생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노 : 희곡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 선생도 잘 아시겠지만, 그게 바로 문학성과 무대성이에요. 문학계에서 보면 문학으로 쳐주지 않을뿐더러, 작품을 무대에 올려야 하기 때문에 비용도 만만치가 않죠.. 그리고 다들 시어머니고 평론가에요. (웃음) 이 길이 참 어려운 길입니다. 연극 환경도 그리 좋지 못하고요. 그러니 절대인원도 적지, 하려고 하는 사람도 적을 수밖에 없죠. 신춘문예에 뽑히면 그게 끝인 경우가 많잖아요. 국가가 지원을 많이 해야 되는 분야예요.
김 : 희곡이 문학 밖에 있다고 이야길 많이 하잖습니까. 희곡은 시나 소설에 비해 문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희곡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한 문학이기에 시나 소설과 같을 수는 없지요. 희곡의 문학성은 공연을 통해 입증되어야 하는건데, 그런데 그걸 시나 소설에 비교해 상징성이나 은유가 부족하다고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들이댄단 말이죠. 시를 재는 잣대로 희곡을 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같은 문학안에서도 아직도 몰이해적인 부분 있는 것 같아요.
노 : 그래요. 시인이나 소설가, 평론가들이 연극을 모르죠. 그러니 본인들도 평을 안하려고 하고요. 독일이나 영국은 희곡이 문학 사상 최대의 걸작을 남긴 분야 아닙니까? 햄릿이며 파우스트가 다 희곡이잖아요. 소설은 오히려 늦게 생긴 장르고요.
김 : 예, 그렇죠. 한국 연극사에서 해방직후의 상황에는 많은 연극인들이 좌익 활동을 하고 있었잖습니까. 한효나 함세덕 같은 뛰어난 이론가, 작가가 대부분 월북 했고요. 그러니 대학에서 희곡을 가르칠 사람도 없었던 거죠. 그래서 전통적으로 희곡의 약세가 대학내에서도 지속된 것 아닌가 싶어요.
노 : 그렇죠. 본래가 희곡은 절대 인원이 적었고, 혼란기에 좌우가 대립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사라졌죠. 대학 커리큘럼에서도 문학이면 시 소설이지 희곡이 어디 있었습니까. 가르칠 사람도 없었고, 연극적 활동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딴따라라고 비하했었고 말이죠.
김 : 문학 쪽에서는 그나마 쓰여진 희곡도 공연되지 않고 남아있고, 연극 쪽에서는 대본이 없다고 아우성이고요. 그러니까 생각나는데, 선생님 희곡집도 한번쯤 계획해 보셔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노 : 예. 마침 '연극과 인간사'라는 출판사에서 의뢰가 와 이야기 중입니다. 다섯권 정도로 묶어서 나올 것 같아요. 아마 올 가을이나 내년 봄에는 될 것 같습니다.
김 : 아, 그렇군요. 여러 가지로 저희가 아주 적절한 때에 찾아뵌 것 같습니다. 오늘 선생님 뵙고 근황도 들을 기회가 있었고, 좋은 말씀 듣게 돼서 저한테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자주 찾아뵙고 인사 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노 : 예. 여기까지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습니다. 나도 아주 기분 좋은 만남이었어요. / 진행·정리 - 김회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