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8 | [문화저널]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릴레이연재
현실은, 사랑은 늘 변하는 것을..
김경희 남원 용성중학교 교사(2003-09-06 09:04:46)
"따르릉"
저쪽 테이블에서 전화벨 소리가 신경을 자극한다. 이내 교무실의 환석씨가 나를 찾더니 수화기를 내민다. 나는 바삐 손을 움직이면서도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누구?' '학생이에요. 많이 아픈가봐요'
방학 즈음에는 이래저래 학기 마무리를 하느라고 교무실은 정신이 없다. 더구나 NEIS를 거부한 학교의 요즈음 교무실은 학년말에 해도 될 생활기록부며 건강기록부의 출력 등 갑자기 요구되는 업무의 폭주로 마무리해야 할 서류를 몽땅 쌓아놓고 눈코 뜰 새 없다. 문제의 본질은 학교(교사)가 수집하고 다루는 다양한 정보 중에 개인의 삶(교육적 목적=학생의 인권)을 위해 교사간에, 학교간에 공유할 정보와 공유해서는 안될 정보가 무엇인지에 있는 것이었다. 정말 학교가 필요한 것은 학교 관리자와 평교사들 사이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서로의 시각의 차이를 좁히고 합리적인 방법들을 모색하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렇게 여전한 칠십년대식의 권위주의적이고 일방적인 밀어 부치기와 일사불란한 행동의 요구는 참 사람을 피곤하고 지치게 한다. 오늘도 정신 없이 수업을 마치고 나와 새로운 서류의 마지막 정리 작업으로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던 참이었다.
"선생님, 저예요. 제가 아파서요. 학교에 못갔어요. 내일은 나갈게요."
녀석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시들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언니들과만 살고 있는 녀석은 참 맘이 여리고 약해서 친구의 말에 그대로 넘어간다. 한동안 집을 나와 친구와 지내느라 학교에도 나오지 않더니 어제 오랜만에 학교에 나왔다. 초췌해진 얼굴로 와서는 조퇴를 요구하기에 감기약을 먹이고는 오후까지 참아보라고 했다. 겨우 4교시를 넘기고 다시 왔길래 불안한 맘을 다독이며 집에 보냈었다. 때로는 어른들도 자신을 제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각자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 부모의 자리에 불안정한 언니 둘과 그 애가 있다. 서글서글한 눈매 너머에 녀석의 쓸쓸함과 슬픔이 있다. 그러나 내가 다독여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나는 애써 녀석의 애잔함을 모른 체하며 다시 한번 이제 곧 방학이니 학교에 정을 붙여야 한다고 강조하며 보냈었다. 그리고 아침에 녀석의 빈 자리를 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아릿한 통증이 왔었다.
"그래, 그랬구나. 밥 챙겨먹고 푹 자거라. 그리고 내일 보자."
가르치는 일은 단지 지식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과 전체적으로 교류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표정 하나 하나를 읽어내며 그들의 투정과 가슴앓이에 함께 하면서 나 또한 나만의 가슴앓이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사랑이며 어김없이 배반을 함께 하는 사랑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상우(유지태)의 독백처럼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고 변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 있는가? 사랑은 변함이 없되 사람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사랑과 사람은 변함 없되 환경이 변한 것인가?
운동장 저편에 초록이 짙은 나무가 서 있다. 자잘한 햇살이 부서지는 이파리가 쉴새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바람은 소리도 없이 이파리들 사이를 지나고 있으며 그 사이로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내가 녀석들과 만날 때 그 순간 녀석들은 진실했겠지. 변함 없는 사랑은 나만의 고집이었는가?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신화는 사실 봉건시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던가? 이 신화가 머뭇거리고 망설이는 시점에 <봄날은 간다>(허진호 감독)가 있다. 우리 시대 사랑의 신화(이데올로기)는 어떻게 실천될까? 한 남성이 한 여성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성취되거나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는 이야기 구조는 참으로 통속적이거나 진부한 내러티브의 전형이다.
설화적 시대 남녀 차이 없이 등장하던 이야기는 봉건시대에 한 남성(혹은 여성)에게 순결을 바치는 이야기로 정형화되었고, 근대시대에는 자유주의 연애담으로, 현대에는 페미니즘으로 발전한다. 영화에서 이데올로기의 호명은 상우(남성. 유지태)의 관점에서 봉합된다.
상우는 왜 은수(여성. 이영애)의 사랑이 변하느냐고 안타까워할 뿐 은수(이영애)의 사랑이 왜 변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다. 이미 상우는 상품(사랑)의 공급자일 뿐 상품의 소비자(은수)의 감정과 현실에는 무감각하다. 영화가 부르는 방식대로 관객은 남성(상우. 유지태)이 부르는 방식으로 주체를 갖추게 된다. 남성(유지태)의 관점에서 사랑은 변해서는 안되는 절대적인 것이 관객의 이데올로기로 실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항대립의 다른 편에는 다른 사랑의 방식이 존재한다. 남성(유지태)의 눈으로 볼 때 변화하는 사랑은 여성(이영애)의 눈으로 볼 때는 선택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꼭 쟁취해야만 하는가? 사랑은 꼭 소유할 때만이 내 것인가? 사랑이 상품일 때 사랑은 소유해야 할 대상이 된다. 상품을 소유하는 것이 나의 존재를 확인 시켜주는 상품의 물신화 과정이라면 사랑을 소유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명제는 사랑을 대상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절대적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 속에 숨어 있는 사적소유관계는 사회적 생산양식의 다양성에 조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고뇌일 뿐이다. 사실 그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조응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가 모든 남녀문제의 본질이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신화적 구조를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사랑은 변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말하고 있다. 여성은 사회경제적 성취를 통하여 스스로 사랑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구성체는 단순히 토대와 상부구조의 이원적인 구조로 구조화되어 있지 않으며, 그 구성요소들간의 관계도 1:1 대응의 일원적 관계가 아니다." 는 알튀세르의 명제는 남녀간의 사랑에서도 적용된다. 사적소유를 독점한 남성에게 적용되던 사랑의 공식 - 남성이 시작한 사랑은 남성이 변하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다.-에서 사회경제적 부를 축적한 현대여성의 사랑마저도 선택의 대상일 뿐이라는 길항구조로 이해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배반당한 사랑에 절망한 사람이나 배반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사랑을 꿈꾸고 가꾸어가길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영화 <봄날은 간다>는 새롭게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