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4 |
[테마기획] 장애인, 예술을 만나다 4
관리자(2010-04-01 18:54:54)
장애, 타자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
-영화 속 장애를 만나다-
- 김혜영 전북비평포럼
시각 예술은 - 도처에 널려 있으나 - 가시화되지 않은‘불편한 진실’을 가차 없이 드러낸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내면화된 우리 안의 왜곡된 주름을 확인하게 하는‘불편한 영화들’은 러닝타임을 뛰어 넘어 우리 삶으로 침투하고, 어느 순간 일상을 비틀어버린다. 주체적으로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영화가 반영하는 당대 사회의 관념을 지적하고, 제시된 현실의 모습 속에서 지배 담론 구조를 파악하며, 영화적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는 도피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의‘자아 찾기’이며,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 차원의 자아를 넘어선 사회적 자아, 즉 사회적 주체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누구나 비가시적으로‘보이지 않는’장애인
영화 속 장애인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장애인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영화에 나타난 장애인의 모습은 그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생산된 작품들은 또 다시 수용자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순환과정을 거친다. 영화는 신체에 가해지는 비정상성의‘낙인’을 읽을 수 있도록 돕는다. 가시적인 장애는 사회적 낙인을받는다. 사실 라캉식으로 보면, 인간은 누구나 비가시적으로‘보이지 않는 장애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 자체는 하나의 기호로써, 정상/비정상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현상이다. 장애를‘조금 다른 신체구조’라고 생각하지 않는 구별 짓기의 규범이 존재한다. 효율중심의 경쟁사회에서는 부당하게도 장애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처벌을가하기까지 한다.
‘몸의 정치학’- 정상과 비정상성
‘정상 신체 중심주의’는 몸의 형태, 기능과 성별, 계급이결합되어 체화된 차이를 만들고, 이를 위계화한다. 푸코(M.Foucault)는 권력 관계를 분석하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 서구의 문화 속에서 지금까지 고정된 것이라 간주해 왔던 육체의 성(性)과 사회적 구성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여기서육체는 더 이상 본질, 혹은 불멸의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진리가 아닌 권력관계에서 생산된 역사적 구성물로 등장한다.근대 과학 담론은 장애를 치유되어야 할‘병(病)’으로 규정한다. 특히 의학 담론은 건강/질병/, 정상/비정상의 구분을근거로 - 물론 이러한 기준은 애매한 것이지만 - 장애가 없는 몸을‘정상적인 몸’으로 규정하고, 장애는 정상에서 일탈된‘비정상’의 상태로 분류한다. 장애인의 몸의 상태에 대한판단은‘정상’이라 간주되는‘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장애인을 기능적으로 부족한 존재로 규정한다. 장애는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치유되고‘정상’으로 돌아올 수있으며, 또‘정상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장애인이갖는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보다 변화하고, 제기해야할 대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동정하거나, 혹은‘우리’를 계몽하거나
장애인을 다루고 있는 영화들은 종종 동정, 비극, 장애의극복 등을 부각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이 인간으로살아갈 권리를 종종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영상매체에서 다뤄지는 장애인의 모습이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이 아닌, 과장되고 왜곡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어 대중의 편견을 부추긴다. 영화에서 장애인 문제를 다룰 때 사실성보다는‘감정’에의존한 방식은 장애인의 현실을 잘 알지 못하는 비장애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당사자인 장애인에게는 감동이 아닌‘허탈감’을 안겨줄 수 있다. 타자의 얼굴을소재화 되는 것에 대한 염려가 늘 있다. 가시화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깊이 있는‘바라봄’이나‘성찰’이 아닌 계몽주의로 끝나버리는 경우에 대한 염려이다. <레인맨>(1988),<나의 왼발>(1989), <여인의 향기>(1992), <넬>(1994),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 그리고 실제 인물을모티브로 제작한 <뷰티풀 마인드>(2002), <말아톤>(2005)과 같은 영화들은 자기 극복의 감동적인 휴먼 스토리로 관객의 큰 반향을 얻었지만, 오히려 환상처럼 느껴지는 뒷맛을남긴다. 마찬가지의 아쉬움은 있지만, 영화 <제8요일>(LeHuitieme Jour, 1996)과 <오아시스>(2002), <아이 엠 샘>(2001)은 동정이나 계몽의 요소를 걸러내고 인간과 인간의연대를 통한 상처의 치유를 비교적 잘 그려내고 있다.<제8요일>의 주축을 이루는 두 남자 아리와 조지, 아리는지극히 정상인으로 보이지만, 그의 삶은 파탄 직전이다. 조지는 다운중후군 환자지만, 누구보다도 맑고 순수하다.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둘은 - 같이 비를 맞으며 걷고, 나무 밑에서 쉬며 - 친구가 된다. 함께 보내는 시간을 통해서‘같은인간’임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를 벗어나면 조지가 설 곳은 없다. “신은 제8요일에 조지를 만드시고즐거워 하셨다”. 그러나 혼탁한 이 세상은 신께서 기뻐하시는 창조물인 조지를 받아줄만한 공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조지는 결국, 소외 공간을 떠나 자유의 공간으로 가는 것을 선택한다.<오아시스> 속 여자 주인공‘한공주’의 뇌성마비는 그녀만을 힘들게 할 뿐, 주변인은 그 덕을 보고 있다. 그녀의 오빠는 공주 덕분에(장애인을 위한) 신축 아파트에 입주하고,이웃집 여인은 공주의 밥을 챙겨주고 수고비를 챙기면서,(공주가 보는 앞에서) 남편과 성관계를 갖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공주의 집을 사용한다. 누구도 그녀의 성적 만족이나사회성에 관심이 없다. ‘사회 부적응자’보다 훨씬 편리하게그녀를 격리한다. 그런 공주가 구제불능으로 낙인찍힌 한 남자를‘인간적으로’사랑한다. 몸의 이미지가 다르다고 해서성적 본능과 욕망이 다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만의 오아시스인 사랑은 정상인의 시선 속에서는‘장애 여성에 대한사회부적응자의 성폭행’으로 읽힐 뿐이다.마지막으로 <아이 엠 샘>(2001)의 샘(Sam)은 어린이의지적 수준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딸에 대한 사랑과 표현은 여느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영화 제목처럼 당신들의 잣대로 경계를 구분하면서, 장애인이라고 몰아세우지 말고 그냥‘샘’이라고 불러달라는 호소에 담긴 시사점이 크다. 잔혹한 세상은 소수자들에게 더한 고통이다. 가혹한 현실 앞에서인간의 힘은 한결같이‘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소수자와 소수자성
‘특정 사회에서 몸을 어떻게 취급하는가?’는 그 사회의 특징을 보편적으로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우리는‘장애’혹은‘장애인’의 문제에 대해서 특정 소수자 인권을 넘어서는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밀접한 상호작용에 의해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으로 변화하는 모습과 장애인의 권리로서가 아닌 한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과정으로 재조명해야 한다. <길버트 그레이프>(1994)처럼, 가족이기 때문에 희생이라는자각조차 없는 감춰진 속박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둠속의댄서>(2000)의 셀마는 시각장애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고된 노동에 몸을 맡긴다. <말아톤>(2005)의 초원이는 엄마 경숙의 존재를 지우는 절대적인희생을 통해서 운동선수가 된다. 책임은 가족에게 전가되고사회는 배제된다. 권력에서 배제된 소수자는 소수로 남겨진상태에서 운동성을 가질 수 없다. 소수자는 소수자성을 통해서 정치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 제멋대로 가위질 할 수 있는존재가 아니라, 가시화를 통한 관계성의 회복으로, 탈영토의운동성을 획득해야 한다. 소수자성은 늘 주류를 파고들어가서 전향시키는 힘이 있다.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그 힘을 읽어주어야 한다.
나와 세상이 만나는 평등한 장
소수자성을 가진 타자와의 접속은 - 불편하지만 - 우리의지평을 넓혀준다. 이를테면 한편의 장애인 영화가 계몽이었다 하더라도 구체적 관계 속에서 진지하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면, 내 지평이 넓어진 것이 사실이다. 윤리학은 내 안의주름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풀어가야 한다. 내 안에도 얼마든지 닫혀 있는 은밀한 많은 서랍들이 있다. 장애우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자신 또한 범주화되고 있다는 것을알아야 한다. 공식적인 장애인 실태 조사 결과 전체의89.4%가 후천적 장애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평생을장애와 무관하게 살기는 힘들다. 장애는 정상에서 벗어난 일탈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측면으로, 타자의 문제가 아니라나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더 나은 미래는 편견과 차별을제거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김혜영 현재 태인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전북대 시간강사와 전북비평포럼 회원이기도 하다. 새전북 신문과 교통방송에서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