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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3 |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0-03-03 17:23:27)
뮌헨영화제와 임권택 감독의 특별한 인연 “영화감독으로 훨씬 앞장서가는 당신을 축하한다!” -임안자 영화평론가 나를 뮌헨영화제로 부른 초청장 1990년 늦은 봄에 뮌헨국제영화제로부터 초청이 왔다. “임권택 감독의 회고전에 프레스와 통역을 맡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온 초청장은 낭트의 임 감독회고전에 참석했던 뮌헨국제영화제의수석프로그래머 클라우스 에더가 보낸 것이다. 그는 낭트에 있는 동안 임 감독의 영화 하나하나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유난히 많을 것들을 묻곤 했었는데, 그게 다 7개월 뒤에 뮌헨에서 또 하나의 임 감독회고전을 열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는 걸 미처 몰랐었다.그 시기 에더는 뮌헨영화제의 프로그래밍 말고도 국제평론협회의사무총장직을 맡고 있어 평론계서 널리 알려진 거물이었는데, 그래서그런지 영화 저널리즘의 문턱에 막 올라선 나에게 보낸 그의 부름은 너무 뜻밖이어서 솔직히 기쁨보다는 먼저 당혹감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좋은 기회가 언제 또 올까 싶었고, 차라리 이런 때 내 능력을 시험해보는 것도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애들의 뒷바라지 문제도 낭트영화제 때부터 옆집과 협조가 잘 이뤄져서 더 이상 걱정을하지 않아도 됐었다. 그렇다면 스스로굴러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는가!나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는 초청에 따랐다. 바젤에서 뮌헨까지는 기차로 다섯시간, 뮌헨 역에 내리자 마중 나온 에더수석 프로그래머가 나를 친절하게 맞으며 영화제의 본부까지 직접 안내를 했다. 그리고 거기서 이미 도착해 있는 임권택 감독과 반가운 재회를 가졌다. 그밖에도 영화진흥공사의 이무상 대표와영화전문지 영화예술의 이영일 편집장그리고 태흥 제작의 이태영 대표가 영화제에 참가하여 임 감독 회고전을 위한작은 대표단을 이뤘다. 영화의 도시 뮌헨 1990년 제8회를 맞는 뮌헨국제영화제는 나이테가 짧은데도 서투름 없이 매끄럽게 움직였고 행사의 진행 또한 아주세련돼 보였다. 영화제의 빠른 성장은뮌헨 시의 발전사와 무관하지 않다. 뮌헨은 일찍이 영화제작에 필수적인 영상기술과 자본 그리고 예술문화의 전통을고루고루 갖추고 있는 영화의 도시로 인정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뮌헨은 1917년에 세워진 아리 촬영카메라 제작소 그리고 1919년에 영화제작에들어간 바바리아 스튜디오가 다 이곳에서 태어났다. 바바리아 촬영소는 30년대 말까지만도 할리우드를 앞서갈 정도로 제작기술 면에서번창했었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의 타격으로 한동안 작업이 정지됐다가 50년대에 다시 일어나 스탠리 큐부릭, 존 휴스톤, 빌리 외일더, 잉으마 베리만 등의 국제적 대감독들의 영화를 만들면서 옛날의 명성을되찾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90년대에 들어 동구권의 영화산업이 한꺼번에 무너진 뒤로는 국제산업체로 구조를 바꾸어 제작뿐만 아니라영화배급에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오늘 바바리아 스튜디오는 1911년에 설립되고 2차 대전 뒤 옛 동독에 속했던 베를린의 바벨스베르그스튜디오와 함께 독일만 아니라 세계적 명성의 영화산업체로 떠올라있다.영상기술 면에서 뮌헨의 또 하나의 자랑인 아리 촬영카메라 제작소역시 뮌헨을 영화의 도시로 만드는데 크나큰 역할을 해왔다. 영상의기술면에서 끊임없이 앞서가는 아리카메라는 세계 영화감독들 사이에 인기가 드높기로 이름나 있다. 임권택 감독 또한 오래 전부터 아리촬영카메라로 작업을 해왔던 지라 회고전 동안에 아리 회사에서 임감독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점심초대에 참석하여 본사에 진열된 카메라들을 둘러보면서 기술적 발전에 적극 관심을 나타내 보였다. 여기서 잠깐 말머리를 돌리자면, 2차 대전시 히틀러 곁에서 그의 정치선전에 앞장섰던 여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아리카메라의 기술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일인자 역할을 했다. 감독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의지의 승리>는 뛰어난 연출력과 아리카메라의 우수한 테크닉이 완벽하게 어울려져 나치즘 미학의 대표적 영화로 알려졌다. 하지만 친 나치의 과거 때문에 발목이 잡혀 전후에는 감독으로서 다시 빛을 받지 못했다. 바탕이 튼튼한 중간 규모의 뮌헨영화제 어느덧 한국에도 많은 영화제들이 생겼고 앞으로도 더 생길 터인데도대체 영화제는 어떤 조직이며 어떻게 누가 움직이는가? 이 질문에대한 대답을 나는 일찍이 뮌헨영화제에서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어느 영화제든 튼튼한 조직력과 프로그램의 독자성 그리고 이 둘을 안전하게 이끌고 갈 수 있게 해주는 충분한 경비의 보장을 필수로한다. 다만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모자라면 영화제는 곧 시들기마련이고, 그건 7~80년대 유럽의 여러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수 없는 영화제들 대부분이 얼마 못 가서 사리진데서도 잘 볼 수 있다.그러나 뮌헨영화제는 앞에서 말했듯풍부한 기술적 자원과 국제평론협회의사무총장이 프로그램을 직접 맡는 행운을 가졌었다. 그런데다 뮌헨에 본사를둔 독일의 고급자동차 BMW의 돈독한후원과 시의회와 쟁쟁한 은행들의 지원이 보장돼있어 그야말로 이상적인 영화제의 본보기로 삼아도 될 정도로 튼튼해보였다. 그런데다 이른 영화산업의 발달이 가져다 준 영화문화의 확산과 오랜전통은 뮌헨영화제의 또 하나의 재산으로 간주되고 있다. 필자가 알아본 결과,그 당시 1백만 시민이 사는 뮌헨에는 77개의 영화관과 15개의 대규모 영화제작사 그리고 17개의 배급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 숫자만으로도 뮌헨이 영화의도시로 불리는 이유를 알듯했다.너무 칭찬 쪽으로 말이 흘렀는데, 뮌헨영화제도시작에 있어 자칫 엉뚱한 방향으로 나갈 뻔 했다고한다. 그때에생긴 일화에따르자면 이렇다. 뮌헨영화제의 제1회를 앞두고 카톨릭 계통의 보수파에 속하는 시의 정책자들은 영화제 집행위원장 자리를 패션계의 유명인물로 정했다. 영화계의 의견을 묻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결정을 해버렸던 것이다. 이들의 무모한 계획은 그러나 영화인들의 드센 항의에 몰려 결국 관철되지 못하고 일말의 촌극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집행위원장 자리는 영화감독 에버하르트 하우프에 돌아갔다. 하우프는 50년대 뮌헨대학 시절 그곳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영화운동을 일으킨 핵심인물의 하나로, 그는 대학을 나온 뒤 뮌헨의 보헤미안으로 이름난 쉬바빙에서 영화를 만들다가 영화제에 참가하게 됐다. 뮌헨영화제는 그의뛰어난 조직력에 힘입어 짧은 시간에 베를린 다음으로 두 번째로 중요한 영화제로 발전했다. 뮌헨영화제가 비경쟁 영화제로 방향을 잡은것도“영화를 경쟁시키는 건 영화예술에 대한 적절한 대두가 아니라”는 집행위원장의 예술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통일의 열풍 속에 치러진 임권택 감독의 회고전 1990년 6월 23일, 뮌헨영화제(6월 23일~7월 1일)는 다목적 문화센터의 칼 올프에서 열린 개막식을 시작으로 영화제는 각 부문으로나눠져 동시다발적인 행사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권택 감독의 회고전은 이 영화제의 전통이 돼버린 비 서구 지역의 명감독의작품을 특별 시사하는‘시사주간’의 부문에서 열렸다. 시사주간에들어가기 전에 먼저 독일 통일의 직전에 열린 뮌헨 영화제의 정치적분위기에 대해 쓰겠다. 알다시피 독일 통일은 1989년 동서독의 갈림을 상징하는 베를린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뮌헨영화제는5 월의 화폐통합 계약과 10월의 통일 계약 사 이 에열렸다.그 같은 정치적, 사회적 대변동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불기 시작한 통일의 열기는 영화제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했다. 1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어려운 동독 감독들의 작품들이 벌써 프로그램에 올라있는가 하면 매일 밤마다영화제의 문화센터 정문 앞에서는 분단의 40여 년 동안 동서독의 국영방송에서 방영한 뉴스를 대형 스크린을 통해나란히 보여줬다. 같은 사건을 놓고 양쪽에서 서로 다른 해석을 붙여 정치에이용했다는 점에서 동독이나 서독 둘 다별로 다르지 않았다던 것 같았다. 역사의 진실이 처음으로 밝혀지는 순간에 독일의 젊은 관객들은 날씨에 상관없이 밤이 늦도록 마당에 앉아 양쪽의 지나간뉴스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진지한 표정을 지켜보던 나는 한국의 비참한 분단의 현실을 생각하며 착잡한 심정이 됐다.이렇듯 통일의 뜨거운 바람을 타고 치러진 임권택 감독의 회고전은엉성했던 낭트영화제에 비하면 훨씬 진지했고 체계적인 행사였다. 무엇보다 언론의 관심과 참여도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컸었다. 물론임 감독은 독일 언론계에 낯설지 않았다. 베를린 영화제와 88올림픽을 통하여 <길소뜸(1985)>이 독일 텔레비전 방송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방영된 바 있다.뮌헨영화제의 프로그램은 낭트에서 시사된 13편 가운데 자막문제로 말썽을 일으킨 4편을 뺀 9편으로 프로그램을 짰다. 낭트 뒤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뮌헨영화제서 독자적으로 발굴한 영화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아 좀 실망스러웠다. 프로그램에 선정된 13편은 <족보(1978)>, <기빨 없는 기수(1979)>, <만다라(1981)>, <안개마을(1982)>, <불의 딸(1983)>, <티켓(1986)>, <씨받이(1986)>, <아다다(1988)>,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8)>이었다.프로그램의 신선함은 없었으나 그 대신에 영화제의 이름으로 조그만 책자가 출간된 것은 감독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방법의 하나로 바람직했다. 그리고 영화제 기간에 반기독교 조직체 인터필름의 주체로이틀에 걸친 세미나가 열렸다. ‘미학과 논리 사이의 임권택 영화작업’의 주제로 진행된 세미나에는 미국, 유럽, 아시아 출신의 교수들이발제자로 참석했으며 <만다라>, <길소뜸>, <씨받이> 세 영화를 중심으로 토론을 했다. 당시만도 임 감독의 작업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던 한국의 실정을 감안하면 뮌헨에서 최초로 있었던 아카데미 차원의심층적 이론작업의 결과는 임 감독 뿐 아니라 한국영화계 전체에 분명 큰 수확이었다.그밖에 <씨받이> 그리고 <길소뜸>의 인기가 관객과 기자들 사이에 아무 높았다. 특히 분단문제를 강한 리얼리즘으로 다룬 <길소뜸>은 독일 관객에게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당신은 어떻게 감독들에게 난점으로 남아있는 문제, 즉 다큐멘터리와 극적인 요소를 그토록 적절하게 연결시켜 강한 감정적 호소를 만들 수 있는가, 참으로 놀랍고 부럽다! 독일인들은 지금 통일의 열기로들떠있지만 머지않아 <길소뜸>의 현상이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독일에서 <길소뜸> 같은 영화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영화인 모두가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영화감독으로 훨씬 앞장서가는 당신을 축하한다!”. 이건 <길소뜸>을 보고 너무 감동한 나머지 이틀에 걸쳐 두 번이나 인터뷰를 한 라인하드 하우프가 한소리로 그는 영화제 집행위원장의 동생이다.그가 말한 <길소뜸>의 현상, 즉 분단으로 인한 사회구성원간의 감성의 이질적 변화는 통일 이후 독일사회의 현실이됐다. 동서독인들 사이에 쌓아진 마음의장벽은 통일 20년 후인 지금에도 알게모르게 존재하고 있고 특히 경제면에서서독에 비해 몇 배나 높은 동독의 실업문제는 심각할 정도다.여기에 희소식 하나를 덧붙이자면, 영화제가 끝나는 날 뮌헨영화제가 실시한투표에서 임 감독이 뮌헨영화제에 초대된 모든 감독 중에서 가장 인기 높은 인물로 뽑혔다는 기쁜 소식이‘아벤트 자이퉁’(석간일보)에서 발표됐다. 내가 본 임 감독의 회고전 영화들 아래의 글은 낭트영화제에서 본 임권택 감독의 영화 13편에 대한 내 소감을반영한 것으로, 평론가 정성일이 편집장이었던 영화 전문지「로드쇼」의 1990년의 3, 4호에 연속 실렸던 글의 짧은 부분이며 임 감독 회고전 영화와 관련하여한국에서 최초로 발표된 평론이다. 20년이 넘은 글을 굳이 여기에 덧붙이는이유는 뮌헨영화제서 똑같은 영화를 보여줬다는 데서 위의 리포트를 보충하는의미에서, 그리고 7~80년대에 나온 회고전 영화의 특성을 거론함으로써 왜 임감독 영화들이 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지에 대해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80년대를 마치면서 임권택 감독의 작품들이 해외 관객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뭣일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수 있겠지만 그 중 그의 작품들의 공통분모로 작용하는(적어도 낭트회고전의 13편 영화를 놓고 볼 때) 모든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절실한 인간애가 아닌가 싶다. 임 감독 작품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불행했던 역사와 오늘의 잘못된 정치·사회 제도의 희생자들로 나타난다. 이들은 삶의 터전을 강자들에게 박탈당한 피해자들이며 그들이 겪는 고통은 언뜻 개개인의 숙명처럼 보이나 감독은 이들의 근본적인 고통은사회제도의 모순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놓여있음을 암시한다. 그암시는 하나의 고발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주인공들의 삶의 공간에서 생기는 사건을 비평적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관찰자의 그것이다.동시에 감독은 가해자들에게도 가해의 원인에 대해 스스로 말할 수있는 기회를 줌으로서 이들도 결국 불행한 시대의 산물임을 편견 없이 보여준다. 그런 감독의 태도는 언뜻 사회의식이 없는 것으로 보일수 있으나 역설적으로 그렇게 함으로서 그의 극적 줄거리는 흑백논리를 배제한 객관성을 가지며, 그러기에 피해자들이 겪는 수난은 개인의차원을 벗어나 집단적인, 크게는 민족적인 비극의 상징성을 갖는다.달리 말하면, 빼앗긴 자는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 하는 게 당연하기에 임 감독의 극중 인물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여러 형태의 고행 길을 떠나지만 거의가 중도에서 좌절한다. 그러나 떠난다는 자체는 자신이고 싶어 하는 의식변화이며 억누르는 힘에 대한 저항의 표시이다. 설령 대항이 죽음으로 끝나도 말이다.그래서 죽음은 임 감독 영화에서 주요 모티브로 자주 떠오르는데이때 죽음은 자연적이기보다는 가해자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이며이들의 죽음에는 항상 무서운 정치적, 사회적 폭력이 극적 배경이 동반된다. 임 감독 영화에서 저항의 최종 목표는 빼앗긴 정체성의 회복이며 그런 뜻에서 투쟁은 주로 민족, 가족, 남/여성의 성(性) 또는 사상과 믿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데 결론적으로 투쟁의 목표는 휴머니즘의 실현이다. 국내외 평론가들이 임 감독을 휴머니스트로 부르는이유는 그 때문이다. 임안자 전북 진안 출생으로 스위스 프리부룩 대학 신문학과 영화사를 전공했다. 스위스 로크르노 영화제 국제평론협회 심사위원과, 이탈리아 몬테카티니 국제 단편영화제 본선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또한 부산국제영화제의 고문과 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현재 프리랜서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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