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5 | [문화시평]
소소한 일상 속에 숨겨진 삶의 '치열함'
양순실 개인전 '그 여자의 시간은 잘도 흐르네'
이상조 전북대 미술학과 교수(2003-07-26 12:04:26)
제3회 양순실 개인전이 4월 1일부터 10일까지 얼화랑에서 열렸다. '그 여자의 시간은 잘도 흐르네'라는 개인전의 명제와 같이 1999년 제2회 개인전 이후 4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는 그의 변화한 모습을 우리 앞에 드러냈다.
그를 알고 있는 이들은 그가 그의 삶을 너무도 솔직하게 작품으로 나타내기에 그가 얼마나 자기의 삶을 사랑하며 소중하게 여기는 가를 당연하게 눈치챌 수밖에 없다. 그가 두 번째 개인전에서 "...나는 미련하게 작업한다. 다양한 매체와 환경 속에서 고지식하게 캔버스 위에서 나도 알아채지 못한 의미들과 내가 그려내고자 하는 의미, 그리고 내 그림 앞에 서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생겨날 미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말이다...나의 촌스러움과 미련함은 살아오는 동안 무슨 불치병처럼 나를 계속해서 '진지하라' 그리고 '고요하라'고 요구한다. 게다가 가벼움에 대한 거부감까지 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여오는 이 강박증이 언젠가 '깊이'와 화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내가 숨쉬기 위해, 그림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나는 나를 그렇게 훈련시킨다..."고 자기의 속내를 밝힌 바 있다.
돌이켜 보면 다양함이 끝간데를 모르고, 변할 수 없었던 가치도 쉽게 변화하는 요즈음과 같은 작업 환경 속에서 그 자신을 지킬 수 잇는 길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지혜와 '촌스럽고 미련한' 자기 절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모두들 그의 '촌스러움'에 일견 당황하면서도 그의 가능성을 눈여겨보는 것이 아닐는지...
이번 세 번째의 그의 개인전은 1998년 첫 번째 개인전 '느린 호흡'과 두 번째 개인전 '들뜨지 말며, 깊게 추락하지도 말고'와는 커다란 변화가 있다. 물론 현실의 삶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내는 방법이라든지 초현실주의적 기법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또한 그가 앞선 두 차례의 개인전에서 '암시적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 절망, 황량함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어둡고 침울하고 거칠게 화면을 구성하였다면 이번 전시는 화면이 무척 밝아지고 고와졌으며 내용은 직접적인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두 번의 개인전에서 그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가 주로 척박함이 드러나는 땅이었다면 이번은 밝고 파란 하늘이 시원하게 등장하고 있다. 또한 이전의 작업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던 메신저인 민들레 홀씨나 나비, 또는 질긴 생명력을 지닌 들꽃들이 이제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그의 손때 묻은 작은 살림살이가 차지하고 있다. 이제 그는 기약 없는 희망의 세계를 향한 고단한 항해를 끝내려는가? 아니면 어느새 세월이 흘러 그의 아픔은 모두 치유되었는가? 가벼움에 대한 강박 관념적인 거부감이 있는 그가 변화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번에 그의 작업은 '외출', '시간을 뜨개질 하다', '살림', '시간을 접는다', '손님' 등 작품의 명제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의 소소한 일상을 그대로 캔버스에 노출시키고 있다. 그간에 그가 추구하던 명제에 비하면 당황하리 만큼 가벼운 명제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내놓고 말하지 않는 그의 예술에 대한 치열함을 읽어내야 한다고 믿는다.
요즈음 화단에서 우리는 그간의 화단의 사정과 다른 이상 기류를 감지할 수 있다. 취미로 시작한 화업에 깊게 빠져들어 일가를 이루려는 작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잇는 것과 미술대학에 들어와 졸업하기도 전에 화가 되기를 포기하는 현상이 그 것이다. - 사실 우리는 미술대학 출신들만이 화가로 활동하는 이상한 현상 속에 있었다. 미술대학 졸업이 화가 면허장을 발급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 이러한 기류는 많은 역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이 숙련된 기능만에 의하지 않고 굳은 표현의지와 다양한 시각을 필요로 하는 것임을 반증하는 바람직한 현상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그의 개인전 서문을 인용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가 불안하다. 양순실이 아예 교양의 기름기와 유한 마담들의 한가한 손놀림으로 붓을 희롱한다면 내가 이토록 불안 할 리가 없다.
언젠가 그녀가 '그림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고 고백했듯 그녀는 많은 재주 속에 이러저러한 것을 시도해보는 인간은 못된다. 오히려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질문하다가 다시 또 붓을 들고 있는 자신으로 돌아간다...양순실은 저 혼자서 구원 받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설혹 액자 속에 갇혔건, 허약하기 짝이 없는 인형의 집 안에서 크고 있는 나무일망정 그녀는 자신의 공간을 포기하지 않는다. 액자 속에서 날고 있는 저 집을 보라. 집 속에 거주하고 있는 그들은 지금 불안에 떨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통째로 비상을 꿈꾼다. 그녀는 인공적이며 허위의 공간인 인형의 집을 뚫어버릴 나무 한 그루를 열망한다. 그 뿌리를 찾아 아직도 잠시 바늘 코를 놓치면 허망하게 풀려 버릴 레이스를 뜨며 삶을 견디고 있다..."
그렇다 지금 그는 어린 딸을 키우며 샘솟는 듯한 가족 사랑을 행복에 겨워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철학적 명제 없이 너무나 일상적인 자신의 삶의 일기를 우리들의 코앞에 들이미는 이유는 그 나이 여성으로서의 현실과 예술가로서 인식의 갈등에서 나타난 몸짓이리라. 그 속내를 읽엇을 때 그 몸짓이 설령 지극히 개인적이라 해도, 또한 표현 방식이 꾸밈없이 직설적일지라도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나의 그림은 들릴락 말락한 소리, 구석에 조용히 앉은 사람, 큰 소리로 울지 못하는 사람, 어눌한 말솜씨, 세상 안을 엿보는 여자, 느릿느릿 걸어가는 병약한 영혼에 대한 위로이다.'는 그의 열망이 어찌 조용한 것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