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5 | [문화시평]
새로운 감성과 정신, 젊은 연출가의 등장이 아쉽다
제19회 전북연극제
정초왕 전북대 독문과 교수(2003-07-26 12:01:47)
4월 16일부터 20일까지 닷새 동안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제19회 전북연극제가 개최되었다. 작년 이곳에서 개최된 전국연극제가 성황리에 마무리된 뒤끝이라 이번 연극제가 이 지역 관객들의 높아진 열기와 기대에 어떻게 부응할 수 있을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으나 들려오는 소식은 쉽사리 낙관적인 전망을 내리기 어렵게 하기도 했다. 여러 요인이 있기는 하겠지만 시립극단 사태가 한 원인이 되기도 한 이른바 '배우기근' 현상이 심각하여 각 극단마다 연극제 준비에 적지 않은 난관을 겪었다는 것이다. 결코 남아돈다고 할 수 없는 한정된 이 지역의 연극 인력에 비춰볼 때 그나마 어느 정도 안정된 연기력으로 뒷받침해줄 인력마저 거의 투입될 수 없다면 그 결과는? 물론 아무리 연극이 배우예술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진 배우들에게 자신의 진가를 새로이 확인시킬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섣부른 예단은 금물일지 모른다. 오락가락하는 심정으로 연극제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았다.
첫날 공연된 극단 명태의 <사로잡힌 영혼>(이상현 작/최경성 연출)은 조선 말기 화가 장승업의 생애와 예술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도화사 감찰관이라는 '환쟁이'에게는 과분하기 이를 데 없는 벼슬을 박차고 대궐을 빠져나가는 장승업의 예술혼. '진정한 그림'을 얻기 위한 그의 고행과 기행의 과정이 극으로 펼쳐진다. 모든 욕심과 세속적 번뇌를 넘어서 그야말로 무념무상의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렀을 때 '절대적인 미'에의 도달도 가능하다는 깨달음. 이미 연극작품으로서도 확고한 위치를 확보했고 나아가 영화에서도 다루어져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소재이니 과연 새로운 해석이나 연출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으나 막상 공연에서 새로움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역동적이고 빠른 장면 전환을 시도한 것은 극적 흐름의 완급조절이 없었고, 거의 매 장면 전환 때마다 울리는 북소리가 종내는 역겹게 들리기까지 했다. 배우들도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사전달력도 미흡했을 뿐 아니라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낸 배역을 찾기가 어려웠다. 전체적으로 시간에 쫓긴 듯한 인상이어서 안타까움을 떨치기 어려웠다.
둘째 날 공연된 <막차 탄 동기동창>(이근삼 작/박병도 연출)은 오랜만에 선보인 극단 '황토'의 작품이다. 몇 십년 만에 재회한 초등학교 동기동창인 두 노인이 성격차이나 입장의 차이 등으로 티격태격,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서로 마음을 열고 노년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함께 나눌 우정으로 발전한다는 이야기. 주제 면에서도 노인문제가 절절한 이 시대에 어울릴 뿐 아니라 작가 특유의 재치와 유머가 어우러진 대사와 상황에다 극적 구성도 잘 짜여진 작품이다. 극적인 흐름을 잘 조절하고 신인 배우들의 연기도 무리 없이 이끌어 나간 연출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다만 연출가 자신도 토로했듯이 중후하고 완숙한 연기가 필요한 두 주인공 역할을 빛내기에는 젊은 두 신인 배우의 역량이 아무래도 벅차 보였으며, 소극장에서 공연한다면 공연효과가 훨씬 배가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셋째 날 공연된 극단 토지의 <하얀 목련>(최솔 작/연출)은 '한 가족이 삼십년에 걸쳐 겪게 되는 애증과 화해의 드라마'를 표방한 작품으로 씨받이로 들어온 할머니와 아들을 낳지 못한 어머니, 그리고 대를 끊어 놓았다고 할머니로부터 갖은 구박을 받으며 성장한 손녀 등 여인 삼대가 등장한다. 이 시대의 주요 화두인 이른바 '여성문제'를 되짚어 볼 좋은 소재가 될 수도 있었겠으나 극적인 갈등 요소나 연기자들의 행동이 당위성이나 설득력이 부족해 보였고, 극이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거의 설명조의 대사들을 통해서 진행되어서 지루함을 떨치기 힘들었다. 극적인 흐름도 템포 조절이 없었고 무선 마이크를 사용한 대사전달은 마치 '립싱크'를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조차 했다.
넷째 날 공연된 극단 하늘의 <봄이 오면 산에 들에>(최인훈 작/조승철 연출)는 원작의 무게를 떠받칠 수 있는 연극적 역량과 함께, 이미 고전이 된 원작에 대한 재해석 여부가 관심을 끈 작품이었다. 옛날 어느 마을, 가난 속에 아비와 함께 살아가는 달내, 집나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간절한데, 마을 사또는 달내를 첩으로 달라 압력을 넣고, 아비는 바우와 함께 야반도주를 하라 하고. 그러던 어느 날 밤 종내는 문둥이 어머니의 손을 잡아 맞아들이는 달내. 마지막 장면에서 네 가족은 모두 문둥이가 되어 짐승들과 어울려 함께 즐겁게 살고 있다. 고뇌와 절망을 극복하고 억압을 벗어나 자유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선택과 결단, 그럼에도 그것에 내재될 수밖에 없는 비극성. 작가는 게다가 말과 움직임에서도 지극히 어려운 연기술("말더듬이처럼, 움직임 더듬이로")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공연이 거둔 무대효과 면에서의 성과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해도 좋겠으나, 작가가 요구하는 언어와 동작을 웬만큼이라도 소화해내기에는 배우들, 혹은 연출의 역량이 미처 따르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럴진대 1970년대 말의 우화적 작품에 대한 재해석을 기대한 건 무리였을까?
마지막 날 공연된 창작극회의 <상봉>(최기우 작/류경호 연출)은 이산가족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등을 바탕으로 한 의욕적인 '창작 초연작'이다. 불행한 이념대립의 역사가 남북분단을 가져 왔듯이 분단의 역사를 거치며 사이가 벌어진 두 집안의 갈등과 화해가 극적인 흐름의 기본 축을 이루고 있다. 대단히 시의적이면서도 정면으로 다루기 쉽지 않은 시대적 화두를 과감히 극화한 점이 높이 평가되면서도 드라마적인 구성이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딱히 이것이다라고 지적하기도 그다지 쉽진 않지만, 어딘가 취약해 보이는 인상을 떨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념적 기반이 다른 두 집안의 갈등이라는 기본축이 도식적으로 생각되어서일까? 인물 성격 묘사가 평면적이어서, 또는 화해에 이르게 되는 모티브가 설득력이 부족해 보여서일까?) 무겁고 지루할 수 있는 주제를 여러 표현 수단들을 동원하여 절절히 풀어나간 연출력이 돋보였고, 상대적으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연기자들의 안정된 연기가 연극을 보는 재미를 맛볼 수 있게 해준 작품이었다. 연극이 결국 지속적으로 무대에 올려지면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는 점을 되새기며 전국연극제 무대에 보다 더 나아진 작품을 올리길 기대해 본다.
전체적으로 이번 연극제를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 연극계 전반이 그러하지만, 시대에 절실한 문제들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창작극, 기존 작품에 대한 시대에 따른 과감함 재해석, 새로운 감성과 정신을 소유한 역량 있는 젊은 연출가의 등장이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 아닌가. 기존의 대가나 중진들(?)도 새로이 밀고 올라오는 신진들을 통해서야 자극을 받고 발전하게 되리라. 전반적인 침체 분위기가 그저 아쉽기만 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