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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 |
[명인명장] 소목장 명장 - 소병진
관리자(2010-02-02 13:41:50)
소목장 명장 - 소병진 “보는 순간, 딱!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긍재 소병진 1964년 김석환 선생 문하 이해민 선생 사사 1992년 대한민국 명장 가구제작 1호 선정 1998년 한국문화재 수리기능보유자‘한식목공’지정 2002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선정 제190호 자랑스런 전북인 대상‘문화예술부문’수상 2004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대통령상’수상 2007년 조선한식가구‘전주장’특허 출원 소병진의‘천년의 꽃’특별초대전(전주공예품전시관) 2008년 대한민국 국새‘인궤’제작 소병진의‘천년의 꽃’특별초대전(서울 갤러리 라메르) 현) 소병진 전주장 복원연구소 소장 긍재 소목공예연구소 자영 우석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전담교수 홍익가구공예사 대표 “나는 목수의 피를 받고 태어났어” 1950년에 완주군 용진면 용흥리 3구 녹동부락에서 태어났어. 7남매중에 차남으로 태어났어. 위에 누나 둘, 형 하나, 내가 인자 허리지. 밑에로 남동생 둘 여동생 하나.아버지께서는 내가 태어날 때 전주 전매국, 지금은 전매청이지만 그때는 전매국이라고 했어. 거기를 다니시다가 그만두시고, 인제 가사가 기우니까 할아버지가 사시던 녹동부락으로 이사를 오신거지.우리 동네가 소씨 씨족사회에요. 우리 조상들 대대로 한 3백년 가량가업을 이루고 살던 동네야. 거기에서 할아버지가 그 시절에 백석꾼 정도 됐데. 근데 할아버지 자손도 12남매야. 그 많은 자손들 다 시집 장가보내고 머슴들 까지 다 결혼 시켜서 내보내다보니까 할아버지도 가세가기운거지. 우리 할아버지 형제간만 해도 12남매나 되니까.그래서 아버지가 전매청에 다니시다가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게 된거지. 가사가 기울어서 나는 어렸을 적에 못살았어. 못살았으니까 이 일을배운 것이고 사실은. 잘 살았더라면 남들같이 상급학교도 진학하고 더다른 일들을 하게 됐겄지. 그런데 그때는 못 배웠기 때문에, 시골에서 할일이 없잖아, 농사도 없고. 땅이나 많았으면 농사나 지었겠지만 그것도없고.그러다보니까, 그때는 우리 집안들이 그 동네에 말하자면 목수들이 많이 살았어. 우리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우리 대부님들 전부다 목수들이여. 전부다 대목장, 소목장. 지금은 소목장이라고 그래도, 그 전에는 소목과 대목이 구분이 안 될 때여. 전부다 목수여 목수. 목수라믄 다혀. 집도 짓고 마루도 놓고, 모정도 짓고 농도 짜고, 뭐 찬장도 짜고, 이런 것이 목수란 말이여. 해방 이후에 대목장하고 소목장이 구분이 되는 것이여. 물론, 그 전 조선시대 때도 대목과 소목은 있었지만, 그것은 국가에서 관할을 할 때고, 민간으로 내려오면서 싹 흩어져버리잖아요 그게.조선이 패망하면서 조선 말기에 사공장이 생겨, 개인공장이 생긴단 말이여. 그 전에는 국가에서 공방을 관장했지, 사공장은 없었단 말이여.국가에서 관장하는 공방이여 말하자면. 그 공방에서 물건을 만들고 임금님이 하사품으로 줬던것이 전주장이란 말이 근데 그걸 싹 내보내버린단 말이여, 조선이 없어지면서. 그때 너도나도공장을 만드는거여, 개인이.그러면서 전주장이 나오는건데, 어릴 때는 내가 전주장을 몰랐어. 그냥 할아버지들이 목수일하면 보고, 연장이 옆에 있고 그러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목수의 피를 물려받은 거여.그러고 내가 어렸을 때, 팽이도 만들고 연도 만들고 썰매도 만들고, 그러면 유독 내 것이 잘나가뭐시든지. 연도 높이 날지, 팽이도 잘 돌지.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너는 목수 소질이 있다. 커서 목수를 해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이 씨가 되가지고 내가 목수가 된 것인데. “전주 중앙가구점이라고 하면, 알아주던 공장이여” 당시에 우리 집안 8촌 형께서 전주에 있는 중앙가구점 공장에서 일을 했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우리 고향에서 전주까지 20리 길이었어. 지금이야 가깝지만, 그 때는 다 걸어 댕겼어. 가끔 버스가 오면 타고 댕기기도 했었지만, 그때 20리길을 걸어 댕기면서, 그때는 버스 차비도 없어서걸어 댕겼단 말이여. 아무튼 그 형이 있는 바람에공방에 잘 들어갔지. 말하자면 첫 단추를 잘 꿴거여. 최고 공장에 들어갔단 말이여.그 때 중앙가구점은, 60년대 70년대 중앙가구점하면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던 공장이여. 그렇게기술들이 좋았고, 일을 무지허니 잘했어요. 지금은 인자 결혼할 때 보르네오네 뭐네 그런 메이커들이 다 나오지만은 그때는 다 맞춤가구여. 그때는 약혼식을 하고나면 제일 먼저 농을 맞추러 온다 이거여. 그때는 최고 큰 짐이 농이여, 결혼할때. 패물이 아니고, 무조건 농이 있어야 혀. 긍게농을 맞추는 거여. 그때 인자 쌀 100가마니, 50가마니 그렇게 주고 맞추는 거여. 엄청난 돈이지. 그 시절에는 그렇게 돈을 받고 농을 짜줬단말이여.종업원만 50명이었어. 내가 들어갔을 때, 그정도로 큰 공장이었단 말이여. 그러니까 전주중앙가구점에 다닌다고 하면 누구나 욕심을 내는거여 사람들이. 기술이 좋으니까, 그러고 일을 잘배운다는 거지. 제대로 배운다. 서울가더라도 전주중앙가구점에 다녔다고 그러면 그냥 채용된단말이여. 지금 같으면 이력서 같은 것도 필요 없이, 그냥 중앙가구점에 다녔다는 것이 이력서가된단 말이여. 그 정도로 유명한 공장이었어. 내가거기서 기술을 배워 오늘날 기술자가 된거지. “빨리 기술자가 되어야겠다” 이제 중앙가구점에 들어가니까. 배고픈 설움을달래기 위해 갔으니까 일단은. 빨리 내가 기술자가 되어서 돈을 벌어서 내 밑에 동생들을 갈쳐줘야 된다. 나는 못 배웠을망정, 내 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 갈쳐줘야 된다는 사명을 가졌던 거야내가. 우리 형편에서는 죽어도 중고등학교는 못가니까, 왜 농사가 없으니까 못가잖아. 우리 부모님들 농사로는 돈벌이가 안 되니까. 나라도 빨리기술을 배워서 내 동생들을 갈쳐줘야 된다. 뭐 그런거지.그 시절에 중앙가구점에 들어가니까, 우리 마을 선배님이 선생님이 된 거야. 또 공장에는 우리8촌 형님이 계셨어. 소병석 선생이라고. 소병석선생 밑에 기술자 10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이우리 선생님인거야. 그때는 농을 만들 때 목공부,도장부, 자개부, 칠기부 이렇게 있었어. 칠기부는옻칠을 말하는 거고. 이렇게 네 파트로 나눠져 있는 공장인데, 나는 인자 처음에 목공부에 발을 디뎠지. 목공부 소목반,이렇게 들어간 거지.거기에 들어가서 보니까. 도제식이다 보니까. 제자들이 두 단계가 있어. 말하자면 이제, 막 들어가면 첫 단계는 심부름하고 마당 쓸고 하는거고, 그 웃 단계는 일 좀 한단 말이야. 그 다음에는 몇 년 된 사람들. 거기에 내 3년 위 선배가 있었는데, 보니까 일을 아주 잘하더라고. 내 속으로‘저 양반을 따라 잡아야겄다’마음을 먹고, 출퇴근도 않고, 공방에서 자고 밥 끓여먹고 일부러 그런거여. 출퇴근할려면 아무래도 시간이걸리니까. 공방 작업대에서 그냥 자고, 아교 끓이는 연탄에다가 밥 끓여먹고. 그래가지고 남들은 10년, 15년 배워야 되는 것을 나는 딱 2년 6개월 만에 그걸 다 배워버린 거지. 그래 기술자가 된 거야.그래서 그때 뭐라 그랬냐하면, 신동이라고 그랬어. 중앙가구점 사장이었던 김석환 사장이 딱 나를 보더니, “너는 기술자를 해라”고 해서, 자기기술자를 만들어버린거여. 이해가 가요? 공장에는 도급공이 있고, 월급공이 있어. 도급공들은 돈을 좀 잘 벌어. 기술이 좀 좋고 오래된 사람들은 도급을 줘. 뭐냐 하면 농 하나 만드는데 얼마, 이렇게 주는 거야. 월급쟁이들은  달에 월급이 100만원이라고 하면, 일을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무조건 100만원이잖아. 그런데 도급공들은 일을 하는데로 가져가. 그러니까 농하나 만들면 10만원 줄게. 그런데 20개 만들면 200만원이잖아. 그러니까 죽어라고 일을 하는거야. 일을 하는 만큼 돈을 버는거니까.그때는 계속 손이 딸리니까. 기계가 안 나오고 다 손으로 할 때니까,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딸렸거든. 그때 우리나라가 해방 후에 새마을 사업이네 뭐네 하면서 집들도 커지고, 살기도 좋아지니까 농을 많이 쓰는거여. 그 때는 농방이라고 했는데, 농방쟁이라고 하면 서로 딸들을 줄려고 그랬어. 돈을 잘버니까. 그때는 시대가먹고 사는 것이 최고 급선무고, 그러니까 농방쟁이한테 시집만가면 잘 산다. 왜냐하면 돈을 잘버니까. 그랬단 말이야. 60년대 70년대 까지. 그때는그렇게 호황을 누렸단 말이야.그니까 도급공이 될려면열심히 일해서 사장한테 잘 보여야 도급공이 된단 말이야. ‘너는 지금까지 열심히 해서 나한테 돈을 많이 벌어줬으니까 도급공을 해라’이렇게 해서 도급공이 된단말이야. 월급쟁이는 100만원 밖에 못 버는데 도급공은 200에서 300만원을 벌 수 있는 거야. 제자들을 둬서 막 일을 하게 되면 그렇게 버는거야.아침에도 일찍 나와서 일하고, 퇴근시간이 7시인데 10시까지 하고 가는 거야. 왜, 돈을 벌라니까. 일거리는 무조건 밀려 있으니까. 일거리가없으면 사장도 하지 말라고 할 텐데, 일거리가 밀려있어서 사장도 무조건 하라고 하니까. 그 시절에 중앙가구점이 잘 한다고 소문이 나가지고.전라북도에서 제일 큰 가구점이었으니까. 좌우간 서울 빼놓고는 한강 이남에서는 중앙가구점이 제일 큰 공장이었어. 그렇게 유명했고.거기서 정신력과 부지런함을 배웠지. 그 김석환 사장은 겨울에도 양말을 안 신었던 양반이여. 아침에 종업원들 출근하기 전에 먼저 와가지고겨울에는 불 싹 펴놓고 늦게 오는 사람 체크혀. 겨울에는 아침에 오자마자 추워서 일 못허니까. 불피우고 어쩌면 1시간 금방 가버리잖아. 그러니까 불을 미리 피워서 따숩게 해놓는 거여, 아교도 막 끓여놓고. 종업원들이 빨리 일을 해줘야 공장이 돌아가고 돈을 벌 꺼 아니야. 그게 다 인자 서로서로 좋은거지. 우리는 일 많이 해서 돈 벌어서 좋고, 그 양반은돈 많이 벌어서 좋고 그런거야.그 양반이 그 때는 서울서 유명한 디자이너 데려다놓고 같이 일도 허고, 그렇게 머리를 써가지고, 중앙가구점 출신들은 지금도 다들 밥숟가락 좀 먹고 살아요. 거기가 종업원이 최고 많을 때는 100명 까지 있었어요. 70년 후반까지 정말 잘 됐지. “남들 막 시작할 때, 나는 기술자가 됐어” 그 뒤로 인자 공방을 때려 쳤는데. 그 양반이70년대 후반까지 30년간을 호황을 누린거야. 나는 거기서 3년 만에 기술을 배워가지고, 그때 그양반이 사준 연장(공구)이 있어. 30만원어치 사주면서“이걸로 작업해라”이래가지고 그때가 최고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지. 왜냐하면 나를 제자로 생각했다는 거고, 그거는 내가 기술자가 되었다는 것이잖아. 인제 내 소원을 이룬 것이잖아. 그때가 내가 17~18살 되었겠는데, 그 때 기술자가된거여. 남들은 인제 시작할 땐데, 내가 일 배우는것이 좀 빨랐어.그러다가 나도 도급까지 올라가. 불과 몇 년 만에 그렇게 올라간거지. 그러다가 74년도 쯤에 서울로 유학을 가 유학을. 왜냐하면 전라북도에서는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기술이. 그것도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고. 서울에서 유춘봉 씨라고 유명한 기술자가 전주로 내려와. 그 양반이 남원분인데 지금도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해.서울에서 10대 목수일 정도로 유명헌 목수였어.그 양반을 중앙가구점 사장이 데려오는데, 왜데려왔겄어. 새로운 디자인을 좀 개발하라는 거지. 너무나 디자인이 단순허니까, 전라북도에서는 디자인 개발이 안된다는 거여. 그래도 계속 팔려면 디자인을 계속 갈아줘야 하잖어. 아무래도그 때도 전주는 서울에 비해 좀 떨어지니까. 그러니까 그 양반을 특채로 모셔온 거여. 최고 대우를해줘가면서. 그 양반이 제자 네 명을 데리고 전주에 왔어. 그 양반은 돈은 많이 벌지. “저는 기술을 더 배울랍니다” 그 분이랑 같이 작업을 하면서, 또 나를 잘 본모양이여. 그 양반이 도토리골에 살았는데, 어느날은 거그에 좀 오라고 그래. 갔더니, 나를 보고허시는 말씀이“어이, 소군. 자네는 아직 젊고 참잘허니까. 내가 보니까 자네는 전라북도에서 일은 제일 잘허네. 내 자네한테 딱 한마디 해줄 수가 있네. 자네 돈이 필요헌가. 기술을 배울랑가”그렇게 물어봐. 그래“아 저 기술 배울랍니다. 그런디 어디 기술 배울데가 있어야지요”그랬더니, “그러믄 내가 서울 동일가구에 취직시켜 줄라네, 그런데 김사장이랑은 비밀로 허세. 김사장이 알면 나 큰일 안나겄는가. 서울 동일가구공장장이 내 후배니까, 내가 추천서를 써줄테니까 가지고 가소. 내가 전화도 해놓을테니까”이렇게 말씀허시는데,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고마워야지. 왜냐하면 그때는 인제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겄는데, 전북에서는배울데가 없었응게.그 당시 동일가구라고 하면 아시아에서 제일 큰 공장이었어. 최고 좋은 공장. 제일 큰 공장이고, 제일 좋은 공장. 제일 작품이 잘나오는 공장. 일본으로 수출하는 공장이 있었고, 청와대에 납품하는 공장이 있었고. 그래서 그 선생이 나더러“자네 거기서 조금만 더 배워서 오면 큰재목이 되겄네. 거기 가서 원목의 원리랑 디자인을 좀 배워서 오소. 자네는 젊어서 전망이 아주 좋네.”그 양반 그 말씀이 얼마나 고맙던지,바로 그말 듣고 그 다음날 공장가서 사장님한테 말했지. 그랬더니 깜짝놀라는 거여. 그래서“기술 배우러 가겠습니다. 기술 배워서 다시 오겠습니다. 3년만 배우고 꼭 다시 오겠습니다. 제가 동일가구 가서 배워오겠습니다”그랬더니, 깜짝 놀라“니가 어떻게 동일가구 들어갈래”그래,다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고 간거지. 그때 기능메달이 있어서 그거가지고 가면 된다고 하면서. “스무 살도 안돼서, 동일가구 일본 수출반에 들어가” 그렇게 서울로 올라갔어. 내 제자랑, 공구함 들고 간거여. 나는 거기서내 인생이 바꿔진거여 사실은. 전라북도 일만 하다가 거기 가니까 완전히 별천지여 별천지. 완전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이거여. 세상에 이런일도 있는가 싶어. 바로 여기다 했지.그런데, 거기 공장에 처음 가니까 작업반이 몇 군데 있어. 국내반도 있고, 수출반, 그리고 청와대반이 있어. 처음에는 나를 국내반에 넣어줘.내가 나이도 어리고 하니까. 그런디 보니까 그냥 시시헌 일이여. 그래,반장님께“반장님, 이 일은 내 제자도 여기보다 더 일을 잘헙니다”하고성질 내버렸지. 이거 할려고 내가 도급하던걸 때려치고 온건 아니었잖어. 반장님한테“나 이일 할려고 여기 안 왔습니다. 정말 최고의 기술자들하고 일허고 싶어서 왔습니다. 나도 기능대회에서 메달 딴 사람이요”그렇게 말했어.그랬더니 이번에는 청와대 납품하는 공장에 넣어줘. 그런데 거기는 맨의자만 만들고 있어. 그래서 나는 의자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 목가구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지. 그래 마지막에는 일본 수출반으로 간거여.공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직 칠하기 전에 가구를 보여주는디, 그것을‘백골’이라고 그려. 그런데, 너무나 작품이 좋은 거야. 거기서 기가 팍 죽어버렸지. 그래 어떻게 해서든 여기 있어야 겄다마음먹었지. 그런데 거기 기술자들은 10명이 있는데, 전부다 영감들이야 영감들. 그때 내가 스무살도 안 되서 갔으니까, 완전히 새파랬지.그래 거기서 일하게 됐어. 작업대 주고, 기숙사하나 주고 해서 일하기 시작헌거지. 그 전에 전라북도 일할 때는 다 내 머릿속에 작업이 있었단 말이여. 도면이라는 것이 없었어. 그런데 거기는 도면이 팍 내려오는 거야. 도면에‘작업 몇 시간,언제까지 끝낼 것’, 이렇게 내려온 거야. 말하자믄 나를 시험할려고 한거지. 그 첫 작업을 딱 하루 전에 끝냈어. 사람들이 다 관심 있게 지켜볼거 아니여. 그런데 사람들이 보니까, 놀래는 거야. 생각보다 잘한다는 거지. 어떻게 하나보자 하고 준건데, 솜씨가 있거든. 그래서 그때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거여. 그 다음에는 책장, 장식장이렇게 작업을 하나씩 주는데, 계속 하루씩 일찍끝내줬어. 사실 시간을 조금 넘겨도 상관없는데그렇게 끝내줬어.거기서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헌거여. 마침 거기 사람들도 중앙가구 김석환 사장을 아는 사람들도 많고, 중앙가구점에서 잠깐 일했던 사람들도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 거기서 도안 공부를 했는데, 거기 디자이너가 양현석이라고 인천사람이었어. 그 사람한테 저녁마다 술 받아주고찐 계란 사주고, 월급날 돌아오면 밥 사주면서 디자인을 배운거여. 옛날에는 주먹구구식으로 했는데, 도안을 알아야겠더라고. 그리고 거기서 원목을 완전히 소화했지. 거기는 전부 원목에 손으로만 작업을 해야만 했어. 왜냐하면 일본사람들은손맛이 안 나면 사가질 않어. “영장이 나왔는데, 공구함을 안 줄려고 해” 거기서 일을 하는데 영장이 나와버렸어. 영장이 나와서 거기서 나오게 된거여. 그거 아니었으면 아마 계속 거기 있었을 텐데. 그래 가서 그만둬야겠다고 했더니, 절대 그만두면 안 된다고해. 영장을 딱 내보였어. 어쩔 수 없지. 영장이나와버렸는데. 그런데 공구박스를 안 줄려고그래. 우리는 공구박스가 생명이여. 공구는 절대 남의 것도 안 쓰고 주도 않고 그래. 우리 정서가 마누라는 빌려줘도, 공구는 안 빌려준다는거여. 그게 우리 정서여. 옛날에는 공구함 함부로 땅에 내려놨다가는 선생한테 머리 깨져. 그런 정도로 목수한테는 공구함이 생명이여. 그런데 그 공구함을 안 줄려고 하는거여. 어찌어찌해서 가지고 왔지.군대를 마치고, 다시 중앙가구점에서 일을 하게 되지. 서울 동일가구에서 배워온걸 가지고 그대로 중앙가구점에서 일을 하지, 서울 안올라가고. 우리 부모님도 걸리고 객지가기 그렇더라고. 그런데 그때서울 갔어야 해. 그때 갔었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졌을거여. 그런데, 그때 우리 부모님들이 나이도 많어지고, 그래서 못간 것이 지금생각해보면 많이 후회가 되지.중앙가구점에서 일을 조금 허다가, 이제 내가 공장을 하나 만들었어. 80년댄가 될꺼여. 내 공장에서 만들어서, 중앙가구점에 전량 납품을 하는 거여. 칠은 중앙가구점에서 허고, 나는 백골 상태로 무조건 중앙가구점에 납품허는 거지. 또 그렇게 몇 년 하다가, 그 사이에 나도사업해본다고, 홍익가구점 차렸다가 잘 안되고. “서울 인사동에서 전주장을 딱 보게 돼” 그러다가 20년 전이었어. 내가 명장이 되기 직전이구만. 내가 명장을 1992년도에 받았으니까. 그때, 인사동에 아주 유명한 골동품 가게에 갔었어. 거길 가서, 가구 구경을 했단 말이야. 그때, 내가 아는 선배개인전이 있어서 갔을거야. 그런데, 거기서 어떤 가구를 봤는디, 딱 눈에 띄더란 말이여. 그런디 거기에 전주장이라고 써 있어. 보니까, 느티나무로 만들었더란 말이여. 짜그마하니, 우리 할머니가 쓰시던거랑도다르더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보니까 가격을 2천 5백만원을써놨어. 그 옆에 또 하나가 있는데, 1천 2백만원을 써놨어. 그래 궁금해서 거기 직원헌티 물어봤지.그랬더니, 조선시대때 전주에서만 나왔던 농이라고 그래. 귀가 번쩍혀. 전주지명을 따서 전주장리라고 했더라고. 그때 저것이 딱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 전주에서 서울에서 가구를 많이 만들었지만, 넘들 것이나 내것이나 다 똑같잖어. 인자 나도 내 것을 찾아야 할거 아니여. 내가 전주장을 찾아야겄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전주장에심취하게 된 거지.박물관이며, 인사동이며, 봉동, 완주, 전주를 다 수소문하면서 다녔어. 전주장 찾는다고. 어렵게 전주장 찾으면, 무조건 치수를 재는거지.카메라로 찍지는 말라고 혀. 그러니까 무조건 치수만 재는거지. 그렇게 댕김서, 개인집에 있다고 해도 막 달려가서 보고.알고 보니까 우리 집안에도 몇 개 있었더라고. 어렸을 때, 동네 세배하러 다니면, 집안 어른들 중에 잘사는 집에는 다 하나씩 있었더라고.내 고향이 씨족동네라 설이면 온 동네에 다 세배를 다녔단 말이여. 그렇게 세배를 하러다니면서 그런 농들을 봤는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못했단 말이여.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그게 그거였던 거야. 그래서 나중에 가서 다 찾아보고 그랬던 거지. “심사위원들도 전주장을 잘 몰라” 이제 전주장을 만들려면, 재료가 있어야 하잖아. 그때부터 먹감나무를 사서 쟁여놓기 시작하지. 말려야하니까. 먹감나무를 일단 5, 6년 동안 계속 사가지고 모아놓고, 자료 연구하고. 그러다가 15년 전부턴가 전주장을 만들기 시작해요, 내가.우리나라에서 전승공예대전라고 하면, 제일 대회여. 아마추어는못 내고, 프로들만 내는거여. 인제 전승공예에 계속 전주장으로 내기시작하지. 2004년도에 대통령상 받기 전까지, 12년 전부터 내기 시작하는 거지. 전주장을 만들어도 나만 만들고 있으면 안되잖어. 평가를 받아보자는 생각으로 계속 만들어가지고 내는거지.그런데, 상을 안주네. 심사위원들도 전주장을 모르는 거여. 알 수가 없지, 나도 말하자면 늦게 알았는데, 알기 힘들지. 그래 내가 꾀를냈지. 전주장에 대해 판넬을 만들어서 거기에 전주장에 대한 설명을다 썼어. 전주장이 뭔지는 좀 알고 평가를 해달라는 거지.그랬더니, 상이 이제 슬슬 걸리는 거여. 마침 심사위원도 전주장을아는 사람이 들어오고. 그래서 몇 년 동안 상을 계속 받기 시작해.그렇게 해서, 지금은 전주장이 많이 알려지게 됐지. 2004년 도에대통령상을 받을 때 엄청 이야기가 됐을거 아녀. 티비에 나가고 신문에 나가고 하니까. 지금은 내 닉네임이 꽂혀있어. 먹감장 잘 만드는사람, 전주장 잘 만드는 사람이라고. 나는 이제 조금 성공을 한거여.꿈을 이룬거지. 남들한테 인정을 받았으니까. 지금은 누가 말해도 소병진하면, 전주장이라고 하지.대통령상을 받고 나서 개인전을 3번을 했어. 전주한옥마을 공예품전시관에서 초대전을 했고, 나는 전부 초대전이었어. 서울 인사동에라메르라는 전시장에서 두 번하고. 개인전 3번을 통해서 더 많이 알려지게 됐지. 그래 지금은 전주장은 전주사람들은 몰라도, 서울 대구, 부산, 대전 같은데서 알고 많이들 찾아와.전주장을 만들면서 고생도 많이 했고, 울기도 많이 했지. 왜냐하면몰라주니까. 그래도 꾸준히 하니까, 알아들 주더라 이말이여. 지금은다 졸업했잖아. 공모전은. 프로들은 대통령상을 받고나면 더 이상 공모전은 안내. “내가 안하면, 누가 하겄어” 전주장은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전주장이 있었어. 조선이 없어지면서부터 전주장이 없어져버려. 다 일본식으로 변해버린 거지.얇게 변하는 거지. 재료는 전통식이지만, 양식은 일본식으로 많이 변하는거여. 우리 것은 투박하거든, 지금은 날씬하단 말이여. 그러나 나는 전주장 만큼은 원형 그대로 고집하고 있어.그래야 보존이 되는거 아니겄어. 요즘 시대로보면 투박하지만, 진짜 한국식이지.칠도 아무것도 없이 기름칠이여. 전통 그 방식 그대로. 동백이나 오동기름 끓여서 바른거여. 광이 없이, 나무 색채를 살려 주는거지. 완전히 자연에 순응한다 이말이여. 나무도 우리나라것 그대로지, 칠도 식물성이지.우리 아들이, 적은 아이가 이걸 해. 대학졸업하고. 지금은 일본에 다녀온다고 서울서 일본어학원에 다니고 있어. 아빠 일을 해도, 조금 더넓게 공부하면서 해야겠다고 해서 나도 그러라고 그랬지.서일전문대 가구디자인과를 나왔어. 내가 일부러 거길 보냈어. 가구디자인으로는 유명한 곳이여. 제일 먼저 생겼고. 우리 아들헌티“아빠의전통과 너의 현대를 접목시켜야 한다”고 말했어.내 전통만 가지고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거지. 나는 앞으로 얼마나 하겠어. 계속 하던 일을 해야지. 하지만, 아들은 내 것으로는 안되. 내 전통에현대적인 요소들을 가미해야 한다는 거지.전주장 하나 만들려면 한 달 죽어라고 해도 하나 나올까 말까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좋아서 하는 일이라 누굴 원망하지는 않지만.경제적으로는 참 팍팍해.그런 생각을 하면 안해야 해. 안해야 하는데,내가 안하면 이 일을 누가 해. 여태까지 45년 한것을 안 하면 뭘 하겄어. 물론 돈은 벌려면, 벌수는 있어. 그렇지만, 돈을 벌려고 일을 하면 그건이미 생명이 없잖아. 전주장은 내가 죽어도 내이름이 남는 거니까. 낙관이 딱 찍어져 있으니까. 우리 집안의 자랑으로 여기고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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