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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 |
[테마기획] 차(茶)-차의 유래와 역사
관리자(2010-02-02 13:38:47)
차(茶)-차의 유래와 역사 2천여 년 역사, 한국의 전통차가 살아 숨쉰다 - 이진수 원광디지털대학교 차문화경영학과 교수 우리차의 발자취를 따라서 우리차가 오롯이 우리 곁에 뿌리내려 전해지기까지 역사적 기록을 통해 그 발자취를더듬어 보면 가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이능화의『조선불교통사』하권에 전해지는 가야국 수로왕비 전래설에 따르면 토산차와 죽로차에 대한 기록을 함께 만날 수 있다. 김해의 백월산에 자라는 죽로차는 우리의 전통차로 차의 이름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고, 죽로차는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 수로왕비가 되기 위해 인도에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차나무 씨앗이라는 이야기이다. 또 장백산에서 자라는 차나무인 백산차에 대한 내용으로 토산차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내용이다.가야차에 대한 이야기는『삼국유사』의「가락국기」에도 전해진다. 신라 제 30대 문무왕은 서기 661년 3월에 내린 조서에 따르면, 가야국의 시조이자 자신의 외가 15대 조상인 김수로왕을 가야국 종묘에 제사를 지내도록 한 차례상에 술· 떡· 밥· 과일과 함께 정성껏 차를 올리도록 한 기록으로 보아 전래설을 넘어선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지리산을 중심으로 영남과 호남 지방이 우리차의 본고장으로서 자리할 수 있는 기록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42대 흥덕왕 3년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공에 의해 차씨가 유입되어 왕명에의해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대렴공 전래설을 들 수 있다. 또한 선덕여왕 때부터 있던 차는 이 시기에 이르러 흥행하게되었음을 알리는 기록으로 볼 때 7세기에 이미 토산차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우리차의 발전 시기 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차는 삼국시대의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가장 활발한 차문화를 누렸던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엔 차가 대중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 선비들의다도문화를 이어받았지만 임진왜란 때부터 위기를 맞게 된다. 불교의 배척으로 인한 유교적 이념에 따라 차례에 올리던 차는 술로 대신하면서 급속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면면이 이어온 우리의 차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지금 우리 곁에 다양한 이름으로 전통차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대에 따른 차(茶)이름 차는 살아온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시대의 차에 대해 최치원의 비문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 47호)에 엽전 모양의 떡차를 가루내어 마시는 전차로 기록되고 있다.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 발견된전차와 조선시대 청태전으로 불리는 전차는 엽전모양으로한 줄에 꿰어두고 몸살이나 감기에 걸리면 달여 마시던 같은차이다. 찐차를 갈아서 틀에 박아내 용뇌의 향기를 흡착시킨뇌원차, 자주빛 차순을 가진 자순차와 잎이 큰 차로 만든 대차는 고려의 차이고, 대나무 숲에서 자란 찻잎으로 만든 죽로차(竹露茶)와 작은 찻잎의 크기가 참새의 혓바닥을 닮아붙여진 이름의 작설차(雀舌茶)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다시(茶詩)에도 등장하는 차이며, 전남 장흥의 보림사에서 만든 보림차, 전남 강진의 백운 옥판차는 조선의 차이다. 그리고 차의 눈이 매의 발톱을 닮은 응조차(應爪茶), 차의 순이 보리의씨앗를 닮았다고 하여 맥과차(麥顆茶), 이른 봄 잔설이 남아있는 시기에 만든 설록차(雪綠茶)는 하나의 뿌리에 다른 이름으로 우리 땅에서 살아온 우리의 전통차인 것이다 이진수 원광디지털대학교 차문화경영학과 이진수 교수는 원불교 나포리교당 주임교무로서 원광대학교 대학원 예차(禮茶)학과석박사과정 교수를 겸임하고 있으며 (사)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 이사장, 한국국제차문화학회장 등을 역임하고 있는 국내 차문화의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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