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 |
[테마기획] 차(茶) 3
관리자(2010-02-02 13:38:22)
차(茶)
차(茶) 한 잔, 마음(心) 한 잔
- 정목일 수필가
촛불의 미학
촛불은 어둠의 추방이 아닌, 어둠 속에 빛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어둠을 보여주는 것, 그 속에 빛이 있음을 알려준다. 어둠과 빛이 한 세계에 닿아 있다. 지나간 일의 추억과몽상, 또한 미래의 일을 연결시켜 준다. 차는 혼자 끓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촛불은 침묵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었다.‘당신들도 조용하게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침착하게 빛의 일을 하고 있는 경쾌한 불꽃 앞에서 가만히 숨 쉬어보라’.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시인인 가스똥 바슐라르(1884~1962)가‘촛불의 미학’에서 한 말을 상기한다.촛불이 방안에 켜지는 순간, 촛불이 놓인 자리는 우주와 사색의 중심점이 된다. 공간의 중심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촛불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바라보도록 강요하고 있다. 촛불을 함께 응시함으로써 우리는 이 순간 한 공간에 있음을 인식한다.“창조에 있어서‘삶’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모든 형태,모든 존재를 통하여 오직 하나의 동일한 정신, 즉 유일한 불꽃이다.”바슐라르는 촛불을 보면서 몽상과 철학과 존재의 미학을탐구했다.
물과 촛불의 관계
몇 개의 촛불이 선 자리, 그 곁에 찻잔이 놓였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침묵이 좋을 때가 있다. 달빛일 때와 촛불일 때이다. 촛불은 바람에 너울거리며 말없이 타오르고, 한 잔의차가 있다. 전등불은 스위치만 작동하면 손쉽게 환한 빛을 얻을 수 있지만, 촛불은 자신을 태운다. 시간을 태우고 영육을불살라 빛을 만들어 낸다. 빛을 만들기 위해 소신공양을 바치고 있다. 엄숙하고도 장열한 순간이다. 촛불 앞에선 숨도 함부로 쉬어선 안 될 듯하다. 영혼의 뼈를 태우면서 내는 빛과촛농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본다.촛불은 성스럽다. 정신 집중력의 한 가운데 심지가 있으며,일생이 타오르고 있다. 효용성으로 따지면 현대에 벌써 없어져야 할 촛불이 왜 존재하는가. 전등불은 실용과 장식을 위한 인위적인 것이라면, 촛불은 무한히 정신세계를 확대시켜주며 우주와 신의 영역까지 이끌어준다. 전등은 정전 사고가일어나지 않고 스위치를 꺼지 않는 한 불빛을 제공하지만 의미를 만들지 못한다.촛불은 자신을 태우고 사라지는 존재이기에 영원을 말하고, 어둠을 보여준다. 빛 뒤에 어둠의 공간과 실체가 있음을느끼게 한다. 현재의 공간만이 아니라, 미래의 공간을 알려주며, 모든 공간이 상호 연결돼 있음을 알게 한다. 짧게 일회성으로 사라지는 것이며 인간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제의에서 촛불은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제단엔 물과 촛불이 놓여진다. 물과 촛불은 공간을 정화하는 작용을 하며 신성 공간으로 바꿔 놓는다. 물과 촛불은 생명을 상징하는 장치물이다. 초를 태워 빛을 만드는 것을 보는 순간, 사람들의마음은 하나가 되며 집중력과 정신의 심지에서 촛불이 되어타오르는 걸 느끼게 된다. 마치 주술에 걸려 신령 세계에 빠져드는 듯한 순간을 느낀다.
한 잔의 차, 인생을 보다
S 선생은 문갑 안에서 화선지에 싼 것을 풀어내 놓았다. 관솔가지처럼보였다.‘ 침향(沈香)’이라했다. 침향은향나무가땅 속에 묻혀서 천 년간 안으로만 향기를 품고 있는 동안 절로 심오한 향기를 지니게 된다고 한다. 지각변동이나 홍수로인해 땅 바깥으로 나오는 수가 있는데, 귀한 약재로도 사용된다고 했다.S 선생은“옛 차인들이 차를 끊여낼 때, 땀 냄새를 없애기위한 방법으로 침향을 손으로 비벼서 그 향기를 찻잔에 적셔권해드린다”고 했다.침향은 천 년의 향기이며, 영원의 향기임을 뜻한다. 녹차에묻은 침향을 맡으며 순간 속에서 영원의 숨결을 들이 마셔보았다. 바람도 없는데, 촛불이 심장박동처럼 뛰면서 펄럭거리고 있었다. 촛불도 타면서 천년의 향기를 맡고 있음이 아니었는지 모른다.심지의 불꽃은 초를 태우며 촛농을 떨어뜨린다. 그 곁에 말없이 찻잔이 놓여 있다. 한 개의 촛불과 한 잔의 차-. 사라지는 것과 흐르는 것의 만남을 본다. 불꽃이 초를 태울수록 영혼의 세계는 더 확장되고 깊어진다.촛불이 타는 시간 동안 초는 줄어들지만 운명이 확대되는듯한 느낌을 주는 건 무엇 때문일까. 촛불은 심령적인 세계를 거느리고 있다. 촛불은 사색의 심연에서 불타오르고 삶의중심에서 빛을 낸다. 불꽃에의 조용한 응시, 차를 들고 명상에 빠져드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타고 있는 촛불과 마음의모습을 들여다보는 일이 아닐까.촛불 앞에서 차 한 잔을 들면 알게 된다. 인간은‘일생’이라는 한 자루의 초라는 것을…. 자신에게 남겨진 초가 얼마나 있는가를 바라본다. 자신이 태우는 빛을 상상한다.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의 엄숙과 이미 타버려서 사라진 시간과 앞으로 남겨진 시간을 보는 순간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다. 불꽃에의 조용한 응시는 찻잔으로 옮겨진다. 촛불과 함께 차 한 잔을 마시면, 침향이 없더라도 찰나속에서 영원을 느낀다.이제 나에게 남은 초는 과연 얼마일까? 소리 없이 타는 초와 한 잔의 차-. 고요의 한 복판에 인생이라는 초와 차가 놓여 있다.한 방울의 촛농도 없이 영육을 불살라 의미의 빛을 내고 싶어진다. 타오 촛불을 보며 차 한 잔을 마시는 마음-. 하늘에 별이 기울고 강물은 몇 천리 흘러 갈 것인가.
정목일 1975년『월간문학』지, 1976년『현대문학』지에 수필이당선되며 이후 수필 외길을 걷고 있다. 현재 마산 창신대학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이자 한국문인협회 이사로, 한국의 고유미와서정을 재발견하여 한국 서정미학을 수필로 담으려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