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7 | [한상봉의 시골살이]
얽히고 설킨 채로 사랑하기
한상봉(2003-07-23 11:14:32)
잡초의 계절이 왔다. 밭에 심은 작물들이 자리를 잡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람이 손길이 조금이라도 비켜난 곳이라면 온통 '싱싱한' 풀밭이다. 비 한번 오고 나면 일제히 소리지르며 일어나는 잡초들의 기세를 바라보며, 연약한 작물들은 전전긍긍 농부들의 보호를 타전하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럽고 안타깝다. 어떤 이들은 작물들의 구호요청에 전격적으로 응답하여 구석구석 풀약(제초제)을 들고 잡초 소탕작전에 돌입한다. 어떤 이들은 진작에 든든하게 비닐멀칭을 하여 예방책을 마련해 두기도 하고, 우리 같은 어설픈 농부들은 그제서야 호미를 들고 김매기에 나서보지만, 잡초들의 원시적 생명력을 막아낼 도리가 없다. 비탈이 심해서 두 해째 묵혀두었던 밭은 그 넓은 천지가 온통 개망초꽃으로 하얗게 물결친다. 작물들도 그저 '풀'에 지나지 않았을 때에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던 시절엔 저것들처럼 시퍼런 생명력을 누리고 있었을까. 잡초들의 싱싱함이 부럽고 두렵다.
산골 도처에 널려 있는 묵정밭에는 칡이 엄청난 기세로 줄기를 뻗어나가고, 그 사이로 엉켜 있는 풀뿌리는 아예 겉흙을 대신해서 땅의 표면을 송두리째 움켜 쥐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밭을 개간할 때는 풀을 뽑고 낫으로 베는 것보다 아예 겉흙을 삽으로 들어내는 게 손쉬울 정도다. 그래서 시골생활은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전원주택이나 별장처럼 상상한다면 잘못 계산된 것이다. 도시의 얽힌 교통망처럼 시골생활 역시 나름대로는 그야말로 천신만고(千辛萬苦)를 두고 산다는 말해야 옳다. 적은 수의 이웃들이 밀접하게 관계 맺으며 얽히고 설키면서 상처도 주고 정도 깃든다. 가깝고도 먼 이웃들이, 정 많고 감정의 기복도 많은 이웃들이 버티면서 안으면서 구르면서 사는 곳이 시골이다. 넓은 밭에서 외롭게 밭을 매는 때가 있는가 하면, 고기를 구워놓고 술을 마시고 정담을 주고 받는 저녁도 있다.
나는 가끔 시집을 읽을 때, 본문보다도 '후기(後記)'에서 마음이 움직일 때가 많았는데, 강은교 시인은 <소리집>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고맙습니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살아서 시간마다 흐느끼고, 또는 괴로워하고, 또는 사랑하고, 또는 화를 내고, 또는 그리워하며 허적거리는 것이…… 4월이면 바람에, 7월이면 장대비에, 12월이면 눈발에 온몸 적시는 것이……
고통이 결국 우리를 구원합니다. 고통할 수 있음이야말로 삶의 증거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끝내 연결되리라 믿습니다. 나는 당신과, 당신은 또 당신과, 오늘은 어제와, 어제는 또 내일과 ……"
산다는 것은 산너머 산이다. 모내기를 마치면 대충 봄농사는 끝날 줄 알았는데, 바야흐로 작물과 잡초의 생존투쟁이 시작되고, 장마를 견디고, 땡볕을 이겨내고, 태풍을 거슬러야 한다. 한가할 때는 잡념이 많아지고, 바쁠 때는 정신이 없다. 사람이 좋아지는 시절도 있고 정 떨어지는 때도 찾아온다. 손님이 반가울 때도 있고 번거로울 때도 있다. 시인들은 고통이 우릴 구원한다고,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끌어안는 정신이 예술이며 종교라고 말하는데,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식의 '당위(當爲)'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도 있다. 그것은 결국 근기(根氣)의 문제일 텐데, 살아 있음, 그래서 희노애락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사랑할 능력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 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