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3.7 | [삶이담긴 옷이야기]
옷장을 치우면서
최미현 패션 디자이너(2003-07-23 11:11:55)
오래 전부터 치우리라고 마음만 먹고 있던 옷장 안을 정리했다. 입던 옷을 제멋대로 걸어 놓기만 하고 정리를 안 하다 보니 급하게 외출이라도 하려면 찾는 옷이 도무지 보이지 않고 결국은 짜증만 내다가 다른 옷을 입고 나간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이래저래 생긴 옷들이 옷장 안에 꽉 들어차 있지만 막상 입으려고 보면 입을 만한 옷도 없다. 언제 큰맘먹고 안 입는 것들은 버려야지 하고 미루다보니 옷들이 뒤엉켜서 어떤 옷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나절이면 충분하겠지 하고 시작한 것이 저녁이 다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나 싶은 생각에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기분을 어쩔 수 없었다. 한번 입지도 않은 것에서부터 대학 시절에 입던 것들까지, 이 좁은 장안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물건이 들어갈 수 있나 싶다. 어떤 옷을 버리고 어떤 옷을 간직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도 어려워서 몇 번씩 이거? 아니면 저거? 하고 고민을 해야 했다. 더하기는 쉬워도 덜기는 어렵다더니 버리는 일이야말로 고통의 연속이었다. 아무런 느낌이 없는 옷도 있지만 그 중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들도 있어서 비록 오래되고 유행에 뒤쳐졌지만 간직하고 싶은 것들도 많았다. 어떤 옷에서는 잊고있던 기억이 되 살아나기도 하고 내가 지나온 시간의 어떤 순간이 떠오르기도 했다. 마치 옷장을 정리하는 것이 내 삶의 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과도 같았다. 나도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이르렀구나, 이렇게 반추해야할 시간들이 많이 쌓여 있는 걸 보면....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는 것 역시 스스로에게 괴로운 시간이었다. 동시에 내가 좀 더 부지런히 살았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옛일을 되돌아보면, 지나가 버린 순간들과 사람들이 아쉽고, 그때 그 소중함을 못 깨우친 것이 내 미련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기지기만 한다. 당나라 진자앙(陳子昻)의 시에 앞으로는 옛사람을 만날 수 없고 뒤로는 오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버린 옷을 그 누군가가 입어도 좋고 찢어져서 걸레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어린 도령이 엽전을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더니 그 도령이 장가갈 때 여러 가지로 방해하는 내용이 있었다. 물건도 사람의 감정도 막힘이 없고 적절한 순환을 가져야지 나처럼 오랜 동안 묶어 두기만 하는 것도 옳지 않을 듯 싶다. 오늘 하루 옷장을 정리하면서 행복했다 슬펐다 하는 감정 사이를 왕복했다. 한 사람의 흔적을 여러 면에서 찾아볼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이 죽으면 망자가 입던 저고리를 가지고 지붕에 올라 흔들며 혼을 불렀다는데 아마 평소에 입던 옷에 어린 이런 감정, 애착을 상기시켜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함 이였을까. 내 생각은 또 한번 열심히 가지를 치며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