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7 | [이성호의 문화비평]
도지사 삭발과 지방정부의 역할
이성호(2003-07-23 10:30:41)
요즘 우리는 우리 사회에 이렇게 수많은 갈등과 대립의 요소들이 잠재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 교육, 정보, 개발, 인권, 자원, 운송, 금융 등 어디 한군데 심각한 갈등에 직면하지 않은 곳이 없다. 특히 최근에 우리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은 그 갈등의 심각성이나 표출 양상에 있어서 예사롭지 않은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부지선정 문제라든지 새만금 간척사업의 지속여부, 그리고 며칠전 마무리된 전주권 그린벨트 해제 요구 등은 모두 지역주민과 중앙정부를 축으로 한 대립구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은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추진되어 온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앙(정부)과 지방(주민)의 갈등은 늘 중앙에 대한 지방의 저항으로 표출된다. 그도 그럴것이 지방이 중앙에 순응할 때는 적어도 갈등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앙과 지방의 갈등은 중앙 권력의 정책이나 의도가 지방의 주민에게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가(또는 아닌가)가 핵심이 된다. 따라서 중앙에 대한 지방의 저항은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이 수사적으로는 최대의 목표가 된다. 말하자면, 지역경제의 발전, 지역주민의 소득 증대, 나아가 지역주민의 생존권 등이 지역 수준에서의 저항의 명분인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저항과 갈등이 내세우는 명분처럼 지역주민 전체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마늘재배농가들을 파탄에 빠뜨렸던 중국산 마늘수입 쿼터는 휴대폰 제조업체에는 큰 이익을 안겨 주었다. 이런 경우 국가의 경제정책이 농민과 제조업체의 이익에 미치는 영향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요즘 농촌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칠레산 농산물 수입 반대" 현수막도 같은 논리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한에서 새만금 사업을 둘러싼 대립과 논쟁은 그러한 사례의 결정판이다. 형식상 대립의 구도는 지방과 중앙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그게 아니라면 일만명씩 관광버스에 나눠타고 여의도까지 올라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사실 이 대립은 다름아닌 개발론과 환경론 사이의 오래된 논쟁이다. 더 구도를 간단히 정리하면, 개발을 통해서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집단과 개발을 통해 피해를 받는 집단, 또는 피해를 우려하는 집단 사이의 갈등이다.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갈등은 지역적일 뿐 아니라, 전국적이며 세계적이다. 그러므로 이 갈등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수사인 "전북인의 염원"이나 "지역경제의 부흥" 등은 논쟁을 지역화하기 위한 구호로서만 타당하다.
최근 새만금 관련 논쟁의 시작은 조촐하고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삼보일배'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기껏해야 수십명의 순례에 불과했던 삼보일배에 대한 개발론의 대응은 6월 3일 만명 이상이 여의도 광장에 모이는 세의 과시로 나타났다. 그중 특히 압권은 '전혀 예정에 없던' 도지사의 삭발 감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지방일간지에서 호들갑스럽게 적어놓은 바와 같이, 이것은 "역대 도지사 가운데 최초"여서 그야말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이를 둘러싸고 크게 두 가지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쪽에는 그야말로 지사의 "투사다운 면모"에 대한 찬사와 격려가 자리하고 있다. 지사 스스로도 삭발에 앞서 "새만금 사업의 완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투쟁하겠다"는 각오를 밝힌 것으로 알려져, 그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이들이 지사의 삭발에서 투사다운 면모를 발견한 것은 과장만은 아닌 듯하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그 행위의 경솔함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그날 TV 저녁 뉴스에서 자못 결의에 찬 표정으로 아랫입술 지그시 깨물며 이발기계에 머리를 맡긴 전북지사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부란 무엇인가. 지방분권의 시대에 지방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을 것 같은 이 같은 물음의 해답을 위해 오랜 고전적 논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국가란 무엇인가를 두고 진행된 오랜 논쟁에서 얻은 최소한의 합의는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단 간 이해갈등은 필연적이며, 국가는 그 속에서 중립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집권을 목표로 하는 각 정당들은 스스로 서민대중을 위한다거나 중산층을 보호한다거나 하는 정책적 입장을 밝히지 않던가?
현대사회에서 국가권력은 자신이 모든 국민의 이익을 공평하게 보호할 수 없다는 점 자체를 부담으로 안고 있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오늘날의 국가는 스스로 복지의 실현체로서, 서로 대립하는 집단 간 이해갈등의 조정자이자 중재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하며, 거기에 많은 노력을 투자한다. 요컨대 집단 간 이해갈등이 불가피하게 발생한다는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을 전제로, 국가는 그것을 원만히 조정함으로써 각 세력집단들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합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정의는 지방정부에 대해서도 별 수정없이 적용된다. 이제 지방정부는 국가통치의 대리기구가 아니라 자율성과 정책적 독자성을 지니는 지방국가이기 때문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이 요즘 지방정부 스스로 목청을 높이는 지방분권의 의미이다. 이제 지방정부는 지역주민간의 이해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중립적 균형유지자의 역할을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전국적 수준에서나 지방에서나 정부의 행위는 이성적이고 성찰적이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새만금 사업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그것이 몇 차례에 걸쳐 반복된다 하더라도 개발론과 환경론 간의 대립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적, 전국적, 지역적으로 매우 보편적이고 일반화되어 가는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6월 3일 전북 지사의 삭발은 그냥 사건이 아니다. 그것이 그냥 우발적으로 욱하는 심정에서 발생한 일이라면 차라리 한차례의 해프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사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새만금사업의 완수"를 위해 싸우겠다는 각오를 표현한 것이라면, 지사의 삭발은 지방정부가 이성적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겠다는 명백한 선언이거나 아니면 코미디다.
개발론자들의 입장에서는 지사에게 강력한 의지표명을 요구할 수도 있고, 지사의 삭발을 정치적 결단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아가 지사에게 모자를 선물하는 행위도 자율적인 판단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200만 도민의 요구와 욕구를 조정하고, 다양한 지역적 사안에 대해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지방정부의 역할이라는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도지사의 삭발이 이성적이지 못했다는 비판을 제기하여야 한다.
개발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새만금 사업이 전북경제 발전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믿을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반대로 새만금 사업이 전라북도에 경제적 순기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지역경제와 주민 삶의 증진을 위해 도지사가 단호한 의지를 보이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은 타당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올 가을에 추곡수매가 인상을 요구하며 다시 한번 삭발하는 지사의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것인가? 그것은 전국 최고의 농도인 전북에서 지사에게 걸어봄직한 기대 아닌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사가 농민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인가? 이것이 왜 정부의 행위가 이성적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