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7 | [문화시평]
숨은 명인과 함께 한 유어예(遊於藝), 열 두해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김선희 새전북신문 문화팀장(2003-07-23 10:19:13)
무대 위에 명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갈망해온 그 등장에 나는 잔뜩 긴장했다. 시나위 반주를 타고 그녀는 서서히 어깨를 들먹였다. 새하얀 치마 저고리에 새파란 옷고름을 길게 늘어뜨린 차림은 일순 소복의 연상을 깨뜨리며 아무렇지 않게 태연한 멋을 낸 가장 적절한 무복(舞服)임을 일러준다. 그래, 살풀이를 추려면 무색의 무복이라야지. 춤을 추는 내내 나는 그녀의 눈길을 잡아채는데 실패했다. 객석의 나는 집요하게 그녀의 눈빛을 살폈지만 기대는 번번이 빗나갔다. 대신 그녀 양 볼의 홍조를 보았다. 파란 옷고름을 뺀다면 유일한 색조였으므로. 무대 위의 그녀는 객석에 누가 앉았든 개의치 않겠다는 듯 지긋이 눈길을 내린 채 그 자신의 소임에 열중할 뿐이었다. 그 큰 무대를 수건 한 장 없이 오로지 몸뚱이만으로 채워야하는 춤꾼의 숙명을 그녀는 묵묵히 다해냈다. 살살 건들거리며 일렁이는 작은 어깨, 언뜻 내비치는 버선발, 어깨 높이를 맞추다 치마 뒷자락으로 숨곤 하던 손가락, 희미하게 끄덕이던 쪽진 머리, 늙은 몸을 감싸준 소복, 아니 새하얀 무복. 이전 그녀의 춤이 어떠하였는지 알지 못하는 나는 이날 눈앞의 춤에 매혹된 채 한 많은 춤꾼의 인생을 겹쳐 느끼곤 했다. 삶이 실린 춤, 너그러운 양친 아래 탈 없이 살아온 무난한 삶이 아닌 열 세살 어린 나이에 권번에서 춤을 시작해야 했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춤이고 뭐고 중도에 작파해야 했던 굽이굽이 곡절 많은 그녀의 삶이 목에 걸려왔다. 민살풀이의 주인공 장금도 명인과의 조우를 나는 이렇게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자 했다.
내가 고대하던 또 한 명의 명인은 박복남 명창이었다. 박 명창의 고향 순창군 적성면 운남리는 매미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김두규 교수에 의하면 터가 이렇다 보니 당골이나 소리꾼들이 끊임없이 들고나고 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소리판을 풍미했던 이화중선은 출세하기 전 장덕진의 첩으로 들어와 이곳에서 그에게 소리공부를 했다. 장덕진은 남원 순창지역 소리꾼들의 혈맥을 상하좌우로 잇는 중심인물인 장재백(장자백)의 조카이다. 순창에서는 장재백이 적성 출신이라고 주장하지만 근자에 남원시 김용근씨의 추적에 의해 장재백의 출생지가 남원 주생인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소리 공부를 위해 순창에 머물렀던 것은 사실이다. 이렇듯 김세종과 장재백, 이화중선의 기운이 펄펄하던 순창 출신인 박복남 명창은 열 한 살 때부터 유성준·송만갑·이동백에게 소리공부를 했고 특히 송만갑에게서 내려 받은 흥보가는 상성과 하성의 구분이 명확하여 신의 소리라는 찬사를 들었다.
이날 박복남 명창은 수궁가 중 '별주부가 토끼 잡으러 세상 나가는 대목'을 불렀다. 아들 박종호가 북채를 잡았는데 부자간의 소리꾼과 고수라는 설정이 관객을 즐겁게 했다. 부친인 소리꾼의 아니리에 아들인 고수가 "그렇지, 얼씨구"하는 허용된 야자타임에 관객들 모두 기분 좋은 방관자가 되었다.
박 명창의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의 표현처럼 고향을 지키는 한 그루의 늙은 소나무를 떠올렸다. 그 소리의 내력은 울울창창하되 여유작작한 산수화처럼 여백으로 숨통을 트여주었다. 명창의 아량에 나는 그나마 숨결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소리의 집산지라는 전주로 나오지 않고 순창에 머물며 소리선생을 하던 박 명창을 무대로 끌어 모신 것이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여섯 번째('97)였다. 칠십이 다 되어 명창대회에 나가 상을 받아야했던 사연이야 알 길 없으나 그는 누가 뭐랄 수 없는 깊은 소리의 보유자였다.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아쉽게도 나는 이 희소한 기획의 열 두번 째 무대에 이르러서야 직접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첫 공연을 하던 1992년, 이런 저런 이유로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서울 살이를 준비하면서 문화판에 걸음을 하지 않았던 탓에 만나지 못했다. 93년부터 서울 살이를 시작해 97년까지 살았고, 전주에 와서는 식구들 얼굴 보기도 힘들 정도로 관청에 매어 살았으므로 역시 공연장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공연을 알리는 문건을 통해 기획이 어찌 되어 가는지를 짐작했을 뿐이다.
기획의 열 두 번째이면서 12년 세월의 베스트를 담았다는 이번 공연에서 두 명인과의 만남을 그토록 고대했던 것은 어쩌면 이번 공연이 선생들의 마지막 무대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세한 춤동작의 흐름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늙은 몸, 특기인 고성을 벽력같이 내지르기에 목이 너무 쇠한 것을 명인인들 어쩌랴. 그러나 몸의 생리적 힘이 딸리면 딸리는 대로, 이날의 명인들은 자신의 힘이 다다르는 데까지 지극한 마음을 열어 무대를 채웠다. 무대의 진실이 객석에 전달되지 않을 리 없다. 아직도 너무나 젊은 유명철·강정열 명인과 선배들을 빛내기 위해 조연한 춤패 연과 전북도립국악관현악단 사나위단, 막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나왔다는 명사회자까지, 격을 헐고 푸근하고 느슨하게 삶의 예술을 즐겨도 무방했던 그 자리를 나는 '유어예(遊於藝)'로 칭하고 싶다.
순탄한 삶의 예술이 아름답긴 해도 심금을 울리기 어렵듯 깊은 울림의 예술은 평탄치 않은 삶의 예술인이 자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분야의 일류코스를 중단 없이 달려온 예술가 보다 고초 자심 했던 예술에 더 마음이 쏠린다. 비록 일류는 아니었어도, 지금도 예술의 상류사회에 속하지 않아도 그 자신만의 소리와 색을 가진 예술인을 마음에 둔다. 일제에 의해 천시되고 왜곡됐던 전통문화가 다시 조명 받기 시작해서도 여전히 주변을 서성이며 비주류의 삶을 살거나 발굴되기를 거부해온 숨은 명인들이 분명 있었다. 발굴되기를 거부하며 애써 세상을 피한 이들은 자신의 삶의 이력이 후손들에게 누가 될까봐 적이 주저했으니 명인을 찾아내고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게 하기까지의 과정 또한 지난한 것이었다.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이 허구 많은 공연기획에서도 독야청청한 것은 숨은 명인을 발굴해왔다는 고유영역 때문이다.
공연연보를 보면서 이 기획이 10년만 앞섰더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세상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스러져갔을 숨은 예인들을 그냥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는다. 그들을 발굴하여 명인의 족보에 등재하는 것이 전라도 예술의 뿌리 찾기에서 얼마나 소중한 작업인가를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김이월의 한량춤과 김용순의 소고춤, 전금순의 씻김굿과 무대에서 들어본 임실상여소리, 유지화의 상쇠놀음과 강송대의 전라도 육자배기, 장녹운의 살풀이와 조공례의 남도 들노래, 위도 띠뱃놀이와 배치기소리, 박동매의 남도 들노래, 김인옥의 못방구 소리 등이 지나치게 늦기 전에 발견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토록 젊었던 한량춤의 금파 선생은 이 기획의 다섯 번째('96) 무대에 선 후 2년 뒤에 홀연 세상을 버렸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은 기획의 전환기를 맞은 것 같다. 숨어사는 예인의 자원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복잡다단한 인간사가 '0' 아니면 '1'로 표식 가능하다는 디지털 시대에 더 이상 숨을 곳도, 은둔할 사람도, 은닉할 정신도 없을 터이다.
60년대에 태어나 70년대에 10대를 보내고 80년대에 20대를 살아야 했던 우리 세대는 어정쩡한 구세대 부류이다. 초가 얹은 흙담집에서 여름과 겨울을 나 본 적이 있는 우리들은 고무신 바람으로 고샅길을 내달리고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뒹굴었던 기억이 있으므로 고향의 흙에 대한 사무치는 감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오래된 것과 숨은 것에 대한 동질감은 원천적인 것이다. 70년대에 태어난 이들이 이런 감상을 가진 척 한다면 그 위장을 실컷 비웃어 줄 것이다. 강산을 능히 변케 하는 10년 세월을 함부로 뛰어 넘으려 하지 말라고. 하지만 솔직히는 오래된 것과 숨은 것에 마음 줄줄 아는 70년대 산이 있어만 준다면 좋겠다. 숨은 명인 부재한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외로운 우리 부류는 그런 부류와 어깨동무하고 싶은 것이다.
김선희 /전북대 국문과 82학번이며 89년 전북도민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 지금은 새전북신문 문화팀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