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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6 | [한상봉의 시골살이]
초록빛 화두
한상봉 농부(2003-07-04 15:40:37)
아침에 일어나 마루에 서면, 숲이 온통 짙은 초록빛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초록이다.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읊조렸다. "흙을 확실하게 움켜잡은 것들만이 저렇게 푸르지." 도시에 있을 때도 어느 한순간 그 삶에 온전히 만족스럽게 뿌리박지 못했다는 것, 시골에 내려와 살면서도 산골생활에 충분히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아 마음 한편이 흠칫 놀란다. 가끔 서울에 올라가면, 말그대로 인파(人波)에 휩쓸려 걸어다니는 것 같고, 내 의지대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을까봐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살아난다. 그리고, …… 저 많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보람으로 하루 하루를 연명하고 있는지 궁금한 적이 많았다. 내 처지를 돌아보면, 그네들과 다를 바 없으련만, 익명의 사람들은 헤아릴 길 없는 막막함으로 쓸쓸한 뒷모습으로만 남겨진다. 그래도, …… 그 사람들은 다들 나보다 '열심히' 사는 것 같았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한 줌 만큼의 개선을 기대하면서, 단칸방에 네 식구가 옹당봉당거리면서도 '열심히' 하루분의 노동과 즐거움을 누리고자 한다. 우리가 산골로 들어온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즐거움도 포함되야 하겠다. '즐거움'이라는 다소 경박한 낱말로 담을 수 없는 것일 테지만, 흙을 밟고 흙을 일구고 흙을 만지면서, 건강한 땀을 흘리는 삶이 주는 혜택을 이르는 말일 테다. 귀농 사년차를 사는 우리 가족은 올해 들어서 그 혜택을 알아듣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온통 농사일에 적응하느라 부산했던 마음을 달래고 나니, 틈틈이 고사리를 말리고, 죽순을 벗겨먹고, 취나물이며 돌나물을 데쳐서 먹어본다. 토마토 지지대 위에 올라앉은 작은 새에 주목하기도 하고, 이름은 모르지만 얘네들이 어딘가 우리집 근처에 둥지를 틀었음을 가늠해 보기도 한다. 오이 줄기를 지지망에 엮어주면서 잠깐 행복해 할 줄도 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막막한 구석이 남겨져 있는 것은 생활고에서 온 것인지, 뚜렷한 전망의 부재에서 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포트에서 연두빛 모종을 키우다가 밭에 정식(定植)을 하고 나면, 오이며 토마토며 고추들은 비좁은 포트에서 엉켜 있던 뿌리를 펴고 이젠 밭흙 속으로 깊고 넓게 뻗어나간다. 땅을 향한 갈망만으로 충분히 그들은 연두빛에서 진초록으로 잎을 변색시킨다. 생기를 드러내고 짙어진 잎색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생애의 어느 틈에 저렇게 싱싱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한 해 한해 새로운 생애를 사는 작물들과 달리 우리 사람의 일생이란 예측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그 푸릇한 시절이 언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낼지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기대에 찬 것이면서도 답답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마음 속에선 첨탑에 갇힌 것처럼 현기증을 일으키는 뭔가가 있다. 여전히 뿌리보다 꽃을 먼저 그리워하는 불안정함 때문일 것이다. 뿌리가 닿는 땅에 주목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몸짓으로 꽃망울을 바라보는 불균형 때문일 것이다. 요즘처럼 몇 주간에 걸쳐 비가 없는 갈수기에도 퍼렇게 물오르는 산색(山色)이 조금은 두렵고, 그 시선을 멈칫거리게 만들어주는 빛깔이 어디 없나, 찾아본다. 설천에서 캐어다 심어놓은 작약 중에서 한 송이가 막 꽃봉오리를 열었다. 분홍빛이다. 며칠 후면 선연한 붉은 빛 작약도 꽃을 피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흙에 대한 상념, 초록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일 먼저 작약꽃을 들여다 보는 일부터 시작한다. 은은하고 품위있는 꽃이다. 그러다 생각한다. 붉은 빛은 땅의 색깔이라는 글을 어느 책에서 읽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초록이란 흙의 생기를 갈무리해서 흙의 생기 자체를 꽃피우는 작업이 아닐까? 초록빛을 거치지 않고 목숨이 붉은 빛을 만들어낼 요량은 없다는 말일까? 나는 결국 다시 초록빛에 대한 생각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럼 다시 묻자. 어떻게 흙을 온전히 기쁘게 거침없이 움켜잡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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