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6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범인은 시대다, 80년대의 송가
신귀백(2003-07-04 15:34:25)
인형을 들고 다니던 딸아이가 댄스가수의 사진을 들고 다니는 시간이 온다. 터닝 포인트다. 마찬가지로 사회나 시대 혹은 문화규칙에 대한 구분이 가능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으로 80년대의 후반부 그 애매한 지점을 변곡점으로 집어낸다. 일찍이 김동리가 '무녀도'에서 크리스트교로 대표되는 서구적인 것과 샤머니즘적인 것들의 부딪힘을 그렸듯 그는 전작 <플란더스의 개>에서 식용 개와 애완용 개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대립각을 농담의 터치로 형상화했으니.
동시대의 비동시성. <양들의 침묵>에서 연쇄살인범을 쫓는 조디 포스터와 안소니 홉킨스가 지성과 오관으로 발산하는 귀기에 비해 경기도 화성판 스릴러의 설정은 일단 촌스럽다. 허수아비가 서 있는 한적한 시골, 빨간 옷을 입은 여자들이 비오는 날 성폭행 후 무참히 살해당한다. 이 엽기적 범인을 잡기 위해 2년제 출신 시골 형사 송강호는 주먹과 감으로, 서울서 파견된 4년제 출신 서 형사는 서류와 증거로 범인을 추격하지만 그들에게 남는 것은 분노뿐. 의무감보다 훨씬 강한 동기인 분노를 간직한 채 증오하면서 닮아 가는 지친 형사들은 부적을 붙여가며 안간힘을 쓰지만 범인은 오리무중. 현재진행형일지 모를 이 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감독은 범인을 대령하는 상업적 선택을 하지 않고 시대가 바로 범인이라고 결론짓는다. 권력의 그물망을 지키느라 충원경찰이 하나도 없어 민생이 뚫린 80년대의 그 공기가 범인이란다. 동의한다.
나? 80년대의 후반은 혁명 광주와 월드컵과 인터넷으로 이어지는 오늘에 어정쩡하게 편입되어 쉼표로 진행된다고 믿었다. 팔륙팔팔을 전후한 쉼표사이에 음습한 공기로 기억나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죽어간 박종철 기사를 보느라 주체할 수 없던 눈물. 6.29전 풍년제과 대로와 창인동 성당 앞에서 최루탄과 방패에 밀릴 때 저쪽에서 같은 구호를 외치던 대오가 밀려오던 감격. 분열을 기대로 잘 못 짚은 보라매 공원에서의 노란 물결 등을 거친 후일담 소설 방식으로 기억하는데 반해 봉준호는 그 프리즘을 달리한다. 이명랑의 소설 '삼오식당'에서처럼 야매(暗) 간호사가 영양제 놓아주는 장면으로 그 그늘을 처리하고 논두렁 깡패가 휘두른 못 박힌 각목에 찍힌 형사가 파상풍으로 다리를 자르는 장면으로 시대를 장송 한다. 미국에서 DNA 검증 서류가 오기 전까지는 오직 조져서 용의자를 묶어놓아야 하는 영화 속의 80년대는 <친구>나 <품행제로>처럼 결코 낭만적이거나 귀엽지 않다. 그렇다고 사회비판적 메시지로 결코 오버하지 않는다. 미덕이다.
돈 안 되는 영화를 만드느라 무수히 꼬라박은 제작자 차승재, 입신의 연기를 펼친 시골 쥐 송강호, 허우대 멀쩡하던 사이비 지식인에서 배우가 된 서울 쥐 김상경, 해사한 얼굴로 독기를 뿜는 살해 용의자 박해일, 평생토록 짜잔한 역을 한 변희봉을 칭찬한다. 변사체에 대한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고 불판 위의 이글거리는 살코기 장면으로 넘어가는 빠르고 날카로운 편집으로 기찬 화면구도를 만들어낸 봉준호 앞에서 옥의 티를 찾는 것은 야박한 일이다. 그는 임권택의 시대적 강박관념을 홍상수의 냉소를 허진호의 예쁨을 이창동의 비루한 분위기를 뛰어넘는다.
아들이 잘 나가는 출판사를 경영하지만 29만원밖에 없는 당당한 대머리 거지,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했다고 발표한 검사, 문귀동 선수가 꼭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한다. 왕년의 민방위 강사님과 교련선생님들도.
거북이란 이름의 아이들이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공장엔 작업등이 밝게 비치"는 가슴아픈 노래 '사계'를 방방 튀는 댄스음악으로 부를 때, 이제 나는 OB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긴 했지만 <살인의 추억>으로 80년대를 확실히 봉인한다. 이제 서재 아래쪽에 박힌 거름, 보리, 이삭, 등의 출판사 이름으로 발행된 사회과학의 책들을 박스 어디에라도 넣어 창고로 보내야 할까 보다. 열정의 시대라고 믿은 한 시대는 이렇듯 쓸쓸하다. 잘 가라. 80년대의 공기여, 젊은 날들이여.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