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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6 | [문화와사람]
'젊은' 노년의 삶 견인하는 50년 거문고 인생 '운상원 소리터' 개원하는 거문고 명인 김무길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3-07-04 15:24:38)
속 깊은 사내의 굵은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대나무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 같기도 한 것이, 달빛의 음악이요 어스름 저녁의 음악이다. 여섯 줄 거문고 소리는 명랑하기보다 철이 들었고, 이성의 낮보다 감성의 저녁에 한층 더 잘 어울리는 악기다. 예순을 넘긴 거문고 명인의 중후한 손놀림이 눈으로 보이다 이내 귀로 들려오는가 싶더니, 천천히 가슴으로 파고든다. 거문고 가락은 성급하지 않게 제 멋과 깊이를 알린다. 머리 위에 희끗희끗 서릿발 돋은 노 명인의 열정적인 몸놀림이 그대로 하나의 연주가 된다. 거문고 명인 김무길씨(63·남원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 남원국립민속국악원 연주단 악장을 거쳐 예술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최근 거문고의 유구한 전통과 맥을 이어가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풀어내면서 국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설적인 거문고 명인 옥보고. 십 수세기를 뛰어넘는 명인과 명인의 만남이 오늘에 이르러 새로운 인연의 고리를 만들어냈다. 서울 생활을 접고 2년 전 남원으로 내려온 그는 지리산에 자리한 남원 운봉 땅 운상원(雲上院)에서 50여년 동안 거문고 기법을 완성해온 옥보고라는 거문고 명인의 존재를 알게 된다. 옥보고는 30여 곡의 새로운 거문고 가락을 창작하고 세상에 알려낸 인물로 제자 속명득과 속명득의 제자 귀금으로 이어진 계보를 만들어 내며 남원의 거문고 음악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낸 거문고의 시조(始祖). 역사 속에서 잠자던 옥보고의 음악적 성과와 전통을 기리고 거문고 세계를 조명하기 위한 그의 땀과 노력이 '명인'의 칭호와 걸맞게 착실히 영글고 있다. 남원시 운봉읍 권포리에 위치한 옛 고남초등학교에 '운상원 소리터'를 설립하고 있는 김무길씨. 이곳이 남원의 거문고 전통을 잇고 전국적인 거문고 음악의 요람으로 만들어갈 그의 꿈의 공간이다. "옥보고 선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기록돼 있는 거문고의 악성입니다. 운봉 옥계동에 위치한 운상원은 옥보고 선생이 50년동안 머물며 금도(琴道)를 깨우치고 거문고 전통의 맥을 이은 성지입니다. 남원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을 맡으면서 운봉을 몇 번 드나들게 됐는데, 옥보고를 기리기 위한 사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남원은 국악의 성지이면서 거문고 음악의 유구한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고장입니다. 남원 판소리엔 송흥록이 있었고, 거문고에는 옥보고가 있습니다. 거문고의 요람으로서 이만한 역사와 전통을 갖춘 곳을 찾기 힘들죠."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는 옥보고와 관련한 자료 수집과 역사적 맥락을 튼실히 갖추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소설 『일지매』를 집필한 작가 최정주 씨를 통해 옥보고 관련 논문과 자료를 찾아 옥보고의 일대기를 연구하면서 창극 <옥보고>의 대본 집필이 진행되고 있다. 올 초 창극 <옥보고>는 전라북도 문예진흥기금 지원 사업으로 선정돼 3천만원의 예산을 지원 받게 된다. 옥보고 관련 사업은 남원의 문화예술인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지를 얻어 옥보고 기념사업회 발족을 시작으로 창극 <옥보고>, 전국거문고연주대회 및 학술대회 등으로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전국적으로 거문고 연주대회가 전무합니다. 창극이 발표되는 올 가을쯤 거문고 연주대회와 학술대회를 연이어 기획함으로써 거문고의 뿌리와 전통을 계승하고, 거문고 명인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전국적으로 소문난 거문고 명인들이 대거 참여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대회 장소는 운상원 소리터이고, 이곳이 명실상부한 거문고의 메카가 되길 바랍니다." 운상원 소리터는 폐교를 사들여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6월 중순께 공연장과 세미나실, 야외무대, 숙박시설 등이 들어선 어엿한 소리 공간으로의 변신을 앞두고 있다. 대지 4천평에 건평(2층) 6백평으로 규모 면에서도 손색이 없다. 장소 매입비용과 공사비를 합쳐 대략 10억원이 소요되는 대규모 공사인지라, 땅값 비싸다는 서울 방배동 자택을 팔았는데, 그래서 더더욱 '운상원 소리터'는 그에게 소중하고 값진 공간이다. "미쳤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경기도 양평에 개인 연수원이 있는데 그것도 처분할 예정입니다. 방배동 집 처분할 땐 솔직히 마음이 좀 쓰렸어요. 운상원 소리터는 그만큼 저에게 의미 있고 소중한 작업이고 중요한 삶의 전환인 셈이죠." 그의 아내 박양덕 명창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슬하에 둔 남매가 아쟁과 거문고를 전공해 그의 가족은 명실상부한 국악 가족이다. 아들이 거문고가 아닌 아쟁을 전공한 것은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라는데, 요즘엔 스스로 거문고를 배워보고 싶다고 해 내심 반가운 마음이라고. 그는 열 네살에 거문고에 입문해 50년 인생을 거문고 하나를 붙들고 달려왔다. 그의 아버지와 그 유명한 한갑득 명인이 친분이 있던 터라, 거문고를 만나는 일은 어떤 운명처럼 절실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국악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신쾌동 명인을 은사로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섬세한 가락의 한갑득류와 굵직한 가락이 탁월한 신쾌동류를 두루 섭렵하면서 그의 거문고 세계는 깊어지고 음악적 지평도 넓어졌다. "국악을 좋아했지만, 배울 때는 많이 힘들었죠. 하지만 연주 기법이 상이한 두 분에게서 거문고의 멋을 전수받게 돼 행운이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카세트나 악보가 없었던 시절이라 일일이 구음과 가락을 외워야 했어요. 한갑득 선생님 댁에서 저희 집까지 걷기엔 조금 먼 거리였는데 일부러 걸어다니며 그 시간에 구음을 외우곤 했지요. 한번은 동네 어른들이 멀쩡한 아이가 참 안됐다면서 혀를 끌끌 차시는 거예요. 혼자서 중얼중얼하고 다녔으니 그럴만도 하죠." 명인의 길이 어디 쉽기만 할 것인가. 밤낮 없이 중얼거린 탓에 급기야는 식구들의 반응도 냉담해져 결국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형설지공'의 정성은 비할 바가 못될 만큼 눈물겹다. 책상과 의자를 기둥 삼아 솜이불로 '텐트'를 친 뒤 그 안에 백열등까지 켜놓고 구음을 외우기 시작했는데, 한 여름엔 그 열기가 한증막에 비할 것인가. "고달플 때도 많았지요. 하지만 인생을 알고 삶을 체험해 가면서 거문고의 깊이가 느껴지더군요. 한번은 하도 답답해서 선생님과 똑같이 연주를 하는데 왜 나는 소리가 다릅니까, 하고 여쭤본 적이 있었어요. 선생님 하시는 말이 수만 독(獨)을 타면 된다, 하시더군요. 지금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지요. 그 깊은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수 만번을 홀로 타야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외롭고 외로워야 자신만의 경지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아세아민속예술경연대회 특상,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기악부 장원, KBS 국악대상 기악부문 등에서 수상하며 명인의 반열에 올랐다.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와 한갑득류 거문고 산조 발표회 등을 꾸준히 벌여오는 한편, 목원대와 서울 국악예고 등에 출강하면서 국악과 거문고 발전에 자신의 삶 한켠을 고스란히 내어주었다. "거문고는 여 섯줄 앞뒤에 문현과 무현이 있고, 그 한 가운데에는 굵은 줄 대현이 있는데, 든든한 중심과 문무를 고루 갖춰 음양의 조화가 가장 돋보이는 악기입니다." 남원에 노년의 삶을 뿌리내린 거문고 명인 김무길씨. 거문고 가락의 깊은 울림이 운상원 소리터에 가득 울려 퍼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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