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6 | [문화시평]
거침없고 자유로운 화면 위 자연의 향수
채성태 개인전
신현식 정북대 강사 미술학과(2003-07-04 15:21:50)
초여름 같은 화창한 봄에 한국화가 채성태의 작품전람회가 열렸다. 서신갤러리의 기획으로 지난 5월 7일부터 19일까지 펼쳐진 채성태전(展)이 바로 그것이다. 이미 몇 차례의 개인전을 가진 적이 있는 채성태는 지금까지 각종 공모전에서의 우수한 입상 경력을 통하여 그 이름이 많이 알려졌으며, 시공회 등의 저력있는 한국화 단체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 작가이다. 이러한 이력에 힘입은 탓인지 이번 그의 작품전은 주위로부터 적지 않은 이목을 끌었고, 특히 젊은 미술학도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벽에 걸린 커다란 작품들과 설치 작품으로 인하여 실내 공간이 비좁아 보였다. 무엇엔가 에워싸인 분위기라고 할까...... 그렇지만 작품들을 일별한 후의 전반적인 느낌은 작가의 왕성한 열정과 창작 열의를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역시 그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떠오르는 채성태의 주된 작업 경향은 화선지를 기본으로 한 서구적 추상 작품들처럼 보였다. 주로 사각형 프레임이 이용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작품은 원형 프레임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전시장의 상당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설치 작품의 경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아래로 내려다보게 의도되어 있다는 점도 관심을 끌었다.
채성태의 이번 작품들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독특한 소재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화선지로 처리되었음직한 화면들은 목화솜으로 처리된 것들이었고 참숯이나 천연 안료 등이 사용되었으며, 바탕에는 먹이 전면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들은 얼핏 보면 70년대 풍미했던 모노크롬 계열의 경향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떤 작품들은 서양화의 추상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떠올리게 하였다. 거기에다 '씨앗', '공기' 등 자연의 여러 양태들을 지시하는 제목들은 그의 작업 모티브를 궁금하게 만드는 요인들이었다. 그의 작품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전의 작업 경향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유용할 듯하다.
사실 지금의 작업 경향은 그에게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3년 전의 개인전에서 이러한 작업 경향을 이미 선보인 바 있다. 이전까지 그가 작품을 제작하면서 주안점을 둔 것은 다음의 몇 가지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는 자연성 자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해의 개인전에서 보여주었던 주된 테마를 '도드리' -'되돌아 간다'는 의미-로 설정함으로써 그는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모든 인위적인 것들을 거부하고 자연의 원초성을 자각하도록 촉구하였다.
'우리 스스로가 대자연의 개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문명의 발전을 위해 자연을 죽여 가면서까지 조금 더 편안한 생활을 위해 우린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우리의 목을 조여 가고 있는 현실에서, 그 옛날 인간이 대자연의 개체로 역할을 담당하며 자연과 인간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시절이 그리워진다.(2000년 개인전 '도드리'의 작가 노트 중에서)'
채성태는 자연의 파괴를 일삼는 현대의 문명을 거부하고 지금보다는 자연과 가까웠다고 생각하는 과거로 되돌아가자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그 과거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거나 파괴하기 이전의 시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론될 수 있는데, 이 점은 옛 여인들의 저고리를 형상화한 작품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물론 모든 작품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형상성을 띤 작품들 속에는 꽃, 열매, 초목, 동물, 그리고 분명치는 않지만 인간까지 포함하여 서로 얽히거나 공존하고 있는 형상들이 희미하게나마 확인된다.
'그 옛날로 되돌아가고자 [도드리]라는 작업들을 해 온 지금 나 또한 자연을 죽여 가는 인간으로서 작업을 통해 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이 모순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내 자신부터 변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2000년 개인전 [도드리]의 작가 노트 중에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자연을 파괴하는 모순을 자신만은 범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작업에 이용되는 매체들을 자연 속에서 손수 얻는다. 자연으로부터 자신의 손으로 직접 경작하거나 채취하고 만든 매체(媒體)들로만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작업 방식에서부터 자신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그는 손수 만든 닥지에 먹으로 기본 바탕을 덮는다. 그리고는 그 위에 역시 직접 제작한 목화솜을 이용하여 표면을 쌓아 간다. 어떤 부분은 바탕을 그대로 두기도 하며 또 다른 부분은 솜을 수없이 반복하여 덧입힘으로써 가장 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을 백색이 우러나도록 처리하였다. 게다가 제한적으로 사용된 채색은 작가가 직접 자연에서 채취한 천연 안료로써 화면에 자연스러움을 동반한 부드러운 변화를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전체적인 화면에 더욱 풍부하고 깊은 맛을 제공한다.
한편 채성태가 철저하게 자연적인 매체를 통하여 자연성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면, 그 자연성을 드러내는 형식은 철저하게 조형적 원칙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먹색과 백색의 적절한 안배와 부분적으로 가해진 채색의 조화, 목화솜의 부드러움과 거칠게 붙여져서 드러나는 특유의 까칠한 질감과 골판지의 균일한 골선과의 대조, 기하학적인 직선과 곡선을 통한 면 분할 등 화면의 조형성이 기본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필묵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어떤 면에서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회화를 만들었던 셈이다. 이와 같이 그는 다양하고 심도있는 화면의 질감을 동반한 탄탄한 조형성을 유지하였고 이와 더불어 거침없이 자유로운 화면을 창출함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아 왔다.
위와 같은 종전의 작품세계와 비교할 때, 금번 개인전에서 보여지는 그의 작품 경향의 가장 큰 변화는 화면의 조형적 구성 형식으로부터 과감하게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화면상의 추상적 형식성은 유럽에서 19세기이래 시작되어 20세기 현대 추상미술의 중추를 이루었던 서구적 개념이다. 청년 작가로서 채성태 역시 서구 추상미술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금번 개인전에서 그는 조형성이라는 형식적 개념을 분연히 떨쳐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감상자에게 아무런 사전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감상자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우려되는 점이다. 한편 그가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매체는 닥지, 천연 안료, 먹, 목화솜 등 이전과 다를 바 없다. 다만 비닐이라든지 숯, 혼합 재료 등 표현 매체를 좀더 다양화해 가는 점도 눈에 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채성태가 여전히 자연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놓고 볼 때 그는 이전의 관심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관심사에 약간의 변화가 엿보인다. 무엇보다도 금번 작품전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의 하나는 작가가 자연의 현상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자연의 양태로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動-씨앗'에서는 씨앗의 현 상태보다는 씨앗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태로의 전이(轉移), 혹은 전이를 유발하는 자연의 기운에 주목하고 있다. '動-길'에서는 들판에서 흔히 보여지는 이름 모를 들꽃들의 주변에 흐르고 있는 바람의 움직임을 포착하였고, '動-굴절'은 따사로운 태양 빛이 자연에 투사될 때 발생하는 빛의 변화를 포착하고 있다.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공통 요소는 만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자연의 기운이다.
이러한 자연 상태에의 강조에 더하여 그는 시간성을 작품에 과감하게 도입한다. 예컨대 '動-13시 30분'은 특정한 시간대에 물상의 양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지를 포착해 낸 작품이다. 같은 맥락에서, 설치 작품 '動-층'은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서로 다른 지질의 층에서, 즉 오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과적으로 보여지는 나무와 지층의 상호 연관성을 통해서 드러난 자연의 기운에 주목한 작품이다.
금번 전시회를 통하여 표출된 채성태의 작품 경향을 이전과 비교하여 본다면 큰 폭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종전에 그의 주된 관심사였던 자연성 자체나 인간의 정서적 자연 회귀 등을 뛰어넘어 그가 이번에 자연의 보이지 않는 기운에 주목한 것은 작가의 끊임없는 내면적 성찰의 결과일 것이다.
이처럼 젊은 화가로서의 채성태가 자신의 독특한 경험이나 주관의 세계를 작품으로 구체화하는 것은 긍정적인 일면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조형성을 배제한 지극히 추상성을 띤 나머지, 화가의 설명이 없이는 감상자가 작품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점은 아쉽게 생각된다. 좀더 쉬운 언어 형식으로 자신의 시선과 관점을 드러낼 수 있다면, 좀더 즉각적으로 의미가 전달되며 동시대의 현실 속에서 공감을 자아낼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채성태의 관심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변해갈 것이다. 어느 한 군데에 고여 있거나 머무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연을 관찰하며 실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연의 신비를 좀더 생생하게 알아갈 것이며 자연의 언어를 보다 풍부하게 익혀갈 것이다. 그의 살아 있는 시선과 타오르는 열정이 빚어낼 다음의 싱그러운 작품들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