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6 | [특집]
'시체 옆에 있는 자는 항상 응시의 대상'
이정훈 전북대 강사 국문과(2003-07-04 15:19:36)
한참 이라크와 미국의 전쟁이 보도될 무렵에 나는 한 남학생과 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 아이는 이제 중학교 2학년이 된 아이였다. 아이는 전쟁 찬성론자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밌을 것 같아요' 나는 제법 상기된 목소리로,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많이 죽는 게 너와 같은 아이들일텐데? 이 앞에 고양이 한 마리 갖다 주고 죽이라고 하면 죽일 수 있어?' 그 아이는 주눅든 목소리로 '아니요'라고 했다. 그나마 그 아이가 그렇게 대답해 줘 속으로 나는 감사했다. 만약 그 아이가 '그럼요. 그깟 고양이 한 마리쯤 대수인가요?'라고 반문했다면 나는 어찌했을까? 『전장의 기억』(도미야마 이치로, 임성모 옮김, 이산, 2002)이란 책이 있다. 그 책은 군사적 폭력에 대항할 가능성에 대해 사고한 책이다. 그 책의 발문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죽은 자의 망막에 포착된,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에서부터' 폭력에 대항할 가능성을 사고해야 하며 '시체 옆에 있는 자는 항상 응시의 대상이며, 그런 의미에서 총살을 기다리는 사람들조차도 아직 결판이 난 것은 아니다.
어떻게 내 일상엔 한국 전쟁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오히려 일제 식민치하 시절보다 심정적인 거리감이 더 멀다. 언젠가 명절에 고향길을 밟다가 내 어미가 슬몃 전한 '저 산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라는 문장과 '네 외할아버지가 인민군에게 붙잡혔는데 동네 사람 하나가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니 그냥 보내 주라'는 말을 듣고 풀려났던 것이 내 부모로부터 유전된 한국 전쟁의 편린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차에 전쟁에 관한 책들을 주섬 주섬 챙겨 읽고 이렇게 글을 쓰는 내 심정은 찹찹하기 그지없다. 내가 이렇게 앉아있는 아파트의 땅 속에도 멀지 않은 과거에 이유도 없이, 운 없어 총살 당한 뼈가 묻어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라는 섬뜩한 기운 때문이기도 하고 내 몸과 더불어 그 모든 생명이 내장한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나를 응시하는 시체들이 도처에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요기(妖氣)때문이기도 하다. 전쟁을 다루고 있는 문학을 어찌 손으로 꼽을 수 있을까? 작게는 힘있는 아이가 작고 허약한 아이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딱지 몇 장을 빼앗는 것에서부터 전쟁은 시작되고 외계인을 가상의 적으로 설정해서 지구를 수호하는 이야기를 관람하는 극장 안에서도 전쟁의 메타포는 질기게 인간을 따라다닌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소설은 어찌보면 객관적 선별 기준도 없이 중구난방이 되기 십상이겠다. 그래도 그 대강을 제시하면 임진왜란을 소재로 승리한 전쟁을 가상한 임진록, 전쟁 중에 죽어간 여인들이 혼령이 되어 나타나 남성들이 망쳐놓은 전쟁에 대해 열찬 성토를 이룬 강도몽유록, 전쟁 직후 시체 수습을 둘러싼 일들을 다룬 피생몽유록, 신립의 죄과와 패전의 원인을 밝힌 달천몽유록, 전쟁 후유증을 다룬 안정효의 하얀 전쟁, 은마는 오지 않는다. 김원일의 불의 제전, 이문열의 영웅시대, 조정래의 태백산맥, 홍성원의 남과 북, 윤흥길의 장마, 완장, 기억 속의 들꽃, 군사정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불타는 한반도' 김훈의 칼의 노래, 황석영의 손님, 김주영의 '천둥소리', 김경진의 데프콘 중의 '한미전쟁' 등의 책이다.
혹자는 전쟁만큼 문학의 훌륭한 소재가 되는 것은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꼭 전쟁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놓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은 다양하며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던가. 그런데 전쟁 직후의 문학적 성과에 대해 혐의를 포기해버리는 행위는 사체의 입 속에서 금이빨을 탈취하는 것과 같은 썩은 재주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인육을 먹을 수도 있게 만드는 전쟁을 왜 인간은 포기할 수 없는 걸까? 그것은 동물의 말을 귀담아 듣고 신성시하던 원시시대로부터 연장을 개발하여 건설한 도시라는 안전 감옥에 갇힌 인간의 구별됨을 스스로 지우는 행위임에도 말이다. 위에 열거한 문학 속에 드러난 한국 전쟁의 모습은 몇 가지의 특징들이 발견된다. 임진록과 데프콘으로 대변되는 강자가 되는 길에 대한 모색. 임진록은 임진왜란을 무대로 실패한 전쟁에 대한 보상심리를, 데프콘은 일어나지 않은 가상 전쟁으로 저력있는 통일한국의 위용을 점쳐보고 있다. 전자는 난세를 헤쳐나갈 전쟁 영웅을 고대하고 후자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열강과 한 번 겨루기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 담겨있는 셈이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전 18권의 가상 전쟁 소설(한중,한미,한일전)을 집필한 저자의 변은 '정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짧은 소감이 피력되어 있다.
그 외에 이문열, 홍성원, 이문열, 현기영, 김주영, 황석영, 조정래로 대별되는 작가들은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 대한 소설을 썼는데 이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당시에 10대이거나 2-3살이었던 작가들이다. 이들이 쓴 문학은 전쟁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과 합리적 이유도, 지적인 성숙도 없이 받아들인 이념의 허울이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인간을 어떻게 광기로 몰아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전쟁에 대한 추체험적 문학은 그들 스스로도 자신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한 기억이며 남북 분단 이후 남북한의 권력을 위해 봉사했던 이념 속에서 억압된 상처와 연결되어 때론 작품을 위해 정치적인 순교(?)까지를 각오할 정도로 비장한 색채를 띠기도 한다. 특히 이문열과 홍성원의 서문에서는 전쟁을 말하는 것 자체가 사상 검증의 물증이라도 된 듯한 고통이 읽히기도 하니, 한국 전쟁은 아직도 미완인 셈이다. 이와 반면 전쟁은 남북 분단의 현실에도 복역한다. 군사정보에서 나온 '불타는 한반도'는 자료 수집차 갔던 시립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이 책에서 설정은 북한의 재 남침을 설정하고 모든 싸움에 있어 필요한 것은 철저한 군기/살기(軍氣/殺氣)이며 전쟁의 차가운 방정식을 무사히 치르기 위해서 거칠고 잔인해질 것을 두 권에 걸쳐 요구하고 있다. 김훈이 유려한(?) 문장으로 이순신의 무사도를 미학적으로 조형해놓은 것 역시 수사의 고하(高下)나 시제(時制)의 상이(相異)함을 슬쩍 비껴간다면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 나는 조금 아쉬워진다. 일련의 작가들의 소설 속에 재론(再論) 삼론(三論)되는 동일한 설정들, 예를 들면 농지개혁, 유교적 인간형,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기독교와 공산주의, 남로당의 행적과 몰락, 빨치산의 여정, 인민군과 국군에게 번갈아 가며 학살 당하는 사람들, 신분을 보증하기 위해 결혼하거나 개종해야하는 사람들, 따지고 보면 의사(疑似) 근친상간이기 쉬운 이 조그만 땅덩이에서 사상을 검증받아야 보존되는 목숨의 처절함 등에 대해 혹자는 이념적 냉소와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대처하거나 관조적인 조망 혹은 냉정한 고발의 입장을 취하기도 하고 아니면 그나저나 목숨이 소중한 산자들의 사적인 화해를 다루기도 하더라도 그 무엇인가 전쟁을 다루고 있는 문학 속에 빠진 것이 있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상기란 내적 성찰이나 회고처럼 평온한 행위가 결코 아니며... 정신적 외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조각난 과거를 다시 일깨워 구축한다고 하는, 고통이 수반된다"(호미 K. 바바 :상게서에서 재인용)
그래서일까? 한국 전쟁을 추체험하는 아이는 성장했으나 그것을 대면하는 작가들의 음성은 사뭇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아이가 성장한 시절만큼 우리 사회는 더 평화로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불안해졌다. 그런데도 남한 사람들의 전쟁에 대한 무관심에 놀라움을 표시했던 외신처럼 우리는 전쟁을 망각하고 있다. 고작 5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이 곳에서, 전쟁의 원인을 미소 제국주의자들의 대리전으로 보든, 남북한의 이념적 갈등에서 오는 내분으로 파악하든 더욱 무서운 것은 그 망각이라는 병이다. 그리고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을 일상 속에서 확인한다. 간토 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의 현장에서 '조센진인가?'하는 물음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 위협은 아직도 건재하다. 전쟁을 정면으로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통일-전쟁-문학-사상이라는 얼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전쟁에 대한 담론이 연속적으로 조망되지 못한 이유일 것이며 그 곳에 막가파식의 전쟁 소설들이 600원의 대여료를 챙기며 팔려나가고 있다. 문득 반딧불의 묘란 영화가 떠오른다. 억압자인 동시에 패전국가였던 일본이 기억하는 전쟁이란 무엇일까? 죽은 자의 시선에 대해 외면하려는 단편적이며 차가운 시선 속에 자본의 씨앗이 사람이 사람을 팔아 목숨을 구명했던 한국 전쟁의 참혹함에 그대로 심겨 지금 우리는 국부를 위해선 전쟁도 필요하다는 설득론에 솔깃해 있지 않은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터 위해서 전쟁을 기억해서는 안된다. 전쟁을 재현의 재료로 삼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 대한 고통스러운 예감으로 전율할 수 있는 문학, 반딧불의 죽음마저도 슬퍼하며 묘를 마련해주는 심정, 그리고 연약한 생명이 야차처럼 징글맞고 귀찮아질 때, 그 각질을 벗겨내 버릴 수 있는 아픈 칼끝이 펜촉으로 박힌 펜대를 만나고 싶다. 우리는 아직 시체를 수습조차 하지 못한 셈이다. 왜 황석영이 빙의의 몸짓에서 벗어나 영돈을 말아 쑥물로 망자의 한이 맺힌 이슬을 정성스레 털어주는 씻김굿을 글로 했겠는가. 이제 색깔론 시비는 낡은 것이라고 외치는 젊은이들을 본다. 한반도를 이념으로, 제국의 이해로 나눴던 유산이 축소된 듯한 망국적 지역론에 대해 젊은이들은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들을 향해 전쟁을 모르는 철부지라는 말은 필요없다. 아니, 지금으로부터 먼 미래까지 전쟁에 저항할 수 있는 생명력에 대한 질문을 놓치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