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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6 | [특집]
그들만의 전쟁, 그들만의 의심
원도연 전북대 강사 사회학과(2003-07-04 15:18:15)
내 소년기의 사랑스러운 추억 속에는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교내 반공연극대회에 직접 희곡을 쓰고 연출을 맡아 당당 1등을 먹었던 그야말로 깜짝 사건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 그 찬란했던 연극의 제목은 <빨치산의 눈물>. 왕년의 무대를 빛냈던 명배우들은 지금은 모두 흩어져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 길 없지만, 그때 우리는 잔인한 빨치산 아버지의 회심(悔心)을 간절히 바라며 그가 자유대한으 품에 안기는 장면에서 아낌없이 눈물을 뿌렸었다. 말 많은 고등학생 시절까지, 내게 전쟁은 TV드라마 <전우>나 그 유명한 <3840 유격대>와 동의어였다. 그 속에는 자유의 신념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사나이들의 세계가 있었다. 나는 나중에, 아주 나중에 그것이 조폭의 논리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혼자서 잠시 분개했었다. 전쟁이 결코 낭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같은 80년대 학번들에게도 전쟁은 여전히 추상으로 남겨져 있다. 정말 미안하지만 내게는 한국전쟁의 참화와 드라마 <허준>에 등장하는 임진왜란은 동급의 비극이다. 이 두개의 전쟁은 내게 이성적으로, 학문적으로 비교분석되는 대상일 수는 있지만 추상의 영역에서 그것은 같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세대에게서 이런 식의 추상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되돌아보면 내 소년시절의 역작(?)이었던 <빨치산의 눈물>은 부모님의 전쟁에 대한 기억과 내가 눈물 흘리며 읽었던 어설픈 휴먼 반공드라마의 틀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게서 전쟁이란 우리 부모세대가 절절하게 체험했던 죽음의 공포와 굶주림의 두려움에 소설이나 TV에서 보았음직한 그럴듯한 전쟁의 영웅사가 더해지고 거기에 마지막으로 70년대 반공과 근대의 계몽성이 더해진 추상의 복합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금의 00학번들에게 전쟁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마 역사는 2000년대의 한국사회를 묘사하면서 붉은 악마의 물결과 노사모의 눈물을 결코 빼놓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저 골치 아프게 복잡한 20대의 머릿속엔 무엇이 들었을까. 내가 대학과 교회에서 만나는 20대들은 사실은 무척 한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존재들이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나이만할 때 잠 못이루고 고민했다고 믿는(믿고 싶은, 또는 착각하는) 민족과 민중의 고통에 대해서 눈꼽만큼도 고민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들이 전쟁을 고민한다고! 누구 말마따나 웃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해태 타이거스에 대한 애정과 응원열기도 결코 나만 못하고 애향심은 커녕 애국심이 뭔지도 도저히 알 것 같지 않은 그들이 전쟁을 생각이나 해본걸까. 의심의 연기는 걷히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정말 그들다울 때가 간혹 있기는 있다. 여성학 강의시간에 수많은 학우들이 쳐다보는 중에도 스스럼없이 남자친구와의 섹스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발언하는 한 여학생의 전혀 음란하지 않은 눈빛을 바라보면서 나는 절망한다. 아, 이제 나의 시대는 갔구나. 여자친구(진짜 친구)가 자기 애인의 조루증에 대해 상담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늘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는 어떤 남학생의 돌출발언을 들으면서는 나는 여성학 강의에서 은퇴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더이상 21세기의 진취적 지식인이 아닌 것이다. 많은 사회학자들이 지금의 20대를 분석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모두 다 그럴듯한 분석으로 그들을 설명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그들을 잘 모르겠다. 붉은 악마의 열풍과 유례없는 연예사업의 대호황, 거기에 대척점으로 서있는 노사모의 정치열풍과 효순이 미선이를 기리는 광화문의 촛불시위를 보노라면 나는 그만 돌아버릴 것 같다. 나와 내 친구들이 <전우>와 <3840 유격대>를 보면서 전쟁의 꿈(?)을 키웠다면 그들은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를 통해서 전쟁을 학습했다. 스타크래프트로 전쟁을 학습한 그들에게 걸프전과 이라크 전쟁의 CNN중계는 가상의 세계와 현실세계의 마지막 경계선을 허무는 사건이 되었다. 그들 일부에게 전쟁은 공포보다는 일종의 유희에 가까운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전쟁에 대해서 극단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그것을 감성적 차원에서 받아들인다는 점은 나나 그들이나 별 차이가 없다. 70-80년대 학번들이 고등학교 시절 교련시간의 추억과 '뺑이'치는 군대생활을 겪으면서 전쟁을 대단히 친숙한 가상의 경험으로 내재시켜왔듯이, 2000년대 학번들은 컴퓨터와 TV를 통해 가상의 전쟁을 형상화 시켜왔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숱하게 다가왔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멸하곤 하는 한반도의 전쟁위기도 전쟁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에 관해서 그들과 나의 진정한 차이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해주는 논문 한편이 얼마전 봄학회에서 발표된 바 있었다. 전북대 사회학과의 정철희 교수는 이르기를 현재의 N세대가 60년대 유럽을 뒤흔든 신좌파와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즉 신좌파가 보여주는 지향성이 여성, 환경, 반전 등의 주제로 모아지고 그 근거에는 삶의 질, 자기표현 등의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흥미로운 분석에서 언급되는 60년대 신좌파는 계급, 국가, 혁명 등 우리의 80년대 학번들이 보여주었던 거대담론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과 질적으로 다른 지평에 서있다. 그리고 60년대 전세계를 뒤흔든 신좌파의 혁명은 68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전환으로 발전했다. 한편에서는 그들이 일군 68혁명을 맑스의 '공산당 선언'이 탄생한 해인 1848년의 유럽혁명과 더불어 양대혁명으로 꼽기도 한다. 60년대 미국의 청춘은 청바지와 장발과 마약으로 대표되는 히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장발과 기묘한 복장, 시끄러운 음악,무절제한 섹스와 마약, 인디언들이 종교와 사이키델릭한 전위예술'. 이러한 무정부주의적인 자아발견의 씨앗은 비트족이 뿌린 것이며 메리 프랭크스터들이 마침내 모든 미국식 생활방식에 대항하는 반란자로 떠올랐다. 이들은 정부와 돼지들(경찰)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에게 네이판탄을 투하하는 혐오스런 미국의 전쟁기구에 대해서도 본능적으로 저항하였다.(<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中에서) 60년대 미국의 히피들을 후세의 사가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미셀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썼던 것도 1961년의 일이었고 남미의 영원한 영웅 체 게바라가 죽은 것도 1967년이었다. 베트남 전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반항하고 마리화나를 피워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브레이트는 그의 시 <의심을 찬양하며>에서 '학대받고 낙담한 사람들이 머리를 치켜들고 지금까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압제자들의 힘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될 때 가장 훌륭한 의심이 생겨난다'고 했다. 1960년대 신좌파들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에 그들을 감싸던 모든 가치관을 부정하면서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갔다는 것이다.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자 장점이었다. 그리고 그 의심이 결국 68혁명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로 터져나와 세계를 변화시켰다. 오늘날 한국의 N세대들을 60년대의 신좌파와 같은 항렬에 놓을 수 잇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미 낡아버린(여성학 강의를 은퇴해야 할) 나의 세계관이 그들을 아직 용납지 못하고 있어서인가. 아니면 아직 그들이 60년대의 신좌파와 같은 사상적 진전을 갖지 못한 것인가 나는 여전히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 속에서 적어도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다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거대한 문화산업의 자본가들과 시스템이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다소간 째째한 구석이 있다손 치더라도 의심의 고개를 치켜들며, 깜냥에는 무지무지 진지해지기도 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왠지 미덥진 않으나 그들이 이 세상의 주인임을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더 강력하게 더 깊이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60년대의 히피들이 상대했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또 다르다는 것이다. 자유를 달라고 외치며 집을 뛰쳐나와 거리의 부랑아로 떨어졌던 히피들의 낭만마저도 으시딱딱하게 팔아먹을 수 있는 자들이 지금 문화산업을 지배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 자본가들에게 N세대는 그야말로 '밥'이라는 사실도 넘어야 한다. 한물 갔지만, 그대로 나는 아직 그들과 친해지고 싶다. 그들이 아무리 나와 다르다 한들 그래도 한일전만 열리면 거의 미쳐버린다는 점에서 나와 그들이 소통하는 하나의 길은 아직 있노라고 &#48715;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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