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6 | [특집]
소설 태백산맥과 '전주형무소 학살'
김재중 월간 '말'기자(2003-07-04 14:53:22)
"저희 할아버지도 1950년에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행방불명 되셨습니다. 혹시 당시 수형인 명부 같은 것이 있으면 확인할 수 없겠습니까?"
월간 『말』 5월호가 특종보도한 전주학살 사건에 대한 보도가 나간 뒤, 편집국으로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미 반세기가 지나버린 사건으로 생명을 잃었거나 행방불명된 가족의 소재를 알아보기 위한 가족들의 문의전화였다.
그러나 가족들의 애절함을 해소해 줄만한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1950년 당시, 전쟁의 혼란 속에 죽음을 입증할 대부분의 정부 기록들은 사라져버렸다. 오히려 한국전쟁 중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한 기록마저 미국에서 수입해(?) 오는 실정이었다. 물론 공개되지 않고 있는 빛 바랜 정부 문서의 한 켠에 그들의 이름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아직도 공인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1950년 전주에서 처참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은 학살 장면을 목격한 증언자들의 육성과 가족들의 애틋한 기억, 그리고 부스러지기 시작한 이름 없는 유골의 흔적을 통해서만 세상에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죽음은 비록 공인되지 않았으나 비극만큼은 선명하게 남았다. 다음은 기자가 '1950년 전주형무소 수형인 학살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증언내용과 소설 『태백산맥』을 비교하며 구성한 비극에 관한 보고서다.
김범우와 이기동, 소설과 진실의 차이
사상과 정견이 다르다는 이유, 이것이 죽음의 빌미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실제로 해방직후 미군정에 의해 통치되는 한반도 남쪽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허락되기도 했는데, 이때는 '남로당(남조선 노동당)'이라고 부르는 계급정당이 합법적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평범하게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보통 사람들, 아니 시국을 걱정할 정도로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은 시류에 휘말리는 것을 극히 꺼려했다. 마치 소설 '태백산맥'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중도주의자 김범우와 비슷한 인물들이 실존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이 이 비극에 대한 보고서의 주인공인 이기동씨였다.
때는 해방직후, 장소는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일제시대 동경상고를 졸업한 이기동씨는 당시로서는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으로 면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좌우 대립으로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에 칩거하게 된다.
그로서는 시대의 격동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은 지극히 본능적인 결단을 내렸던 셈이다. 그러나 그를 아깝게 여긴 신지면 초등학교 교장은 그에게 교사직을 제안했다.
'태백산맥'의 김범우가 중도주의자로서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갔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실존인물 이기동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비극적 종말로 접근해 간 것이다. 그가 교사직을 수락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죽음과 무관치 않았다.
앞서 서술했던 대로 해방이후 합법 공간에서 활동하던 한 남로당 관계자가 그가 근무하던 초등학교에 정치연설을 위해 찾아온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이 이 교사에겐 엄청난 화근이 됐다. 교장이 이 교사에게 달갑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라고 권유했고, 이 교사는 당연히 '손님접대'라는 예의를 갖췄다.
현실은 그런 것이었다. 소설 속에서 좌우 이념을 달리한 염상진과 염상구가 형제이기에 서로를 보호해 주었거나, 중도주의자 김범우가 좌우 모두에게 회색분자로 낙인 찍혔으나 죽음을 피해갔다는 사실은 실제 현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실존인물 이기동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손님접대'라는 빌미는 '태백산맥'의 극적 긴박함에 비추어 너무도 사소한 일이었다. 현실은 죽음의 이유를 거창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승만이 정권을 잡고 공산주의자에 대한 박멸작전이 시작되자 이 교사는 '손님 접대에 대한 대가'로 20년형을 언도받고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그에 대한 재판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지금, 그를 형무소에 가둔 죄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다만 최근 밝혀지고 있는 사실들은 당시 이승만 정권이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중도주의자까지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피해자는 전형적인 중도주의자 백범 김구였다.
이렇게 실존인물 이기동은 1948년 10월 전주형무소에 수감됐고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념에 대해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진 삶의 질곡을 스스로 책임지고 헤쳐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녹치 않은 것이었다. 실존인물 이기동의 처와 자식, 심지어 손자 손녀들에게까지 이어지는 '한(恨)의 대물림'은 태백산맥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 '한의 대물림'이야말로 소설과 진실의 가장 큰 차이 일지도 모른다.
'한(恨)의 대물림' 살아남은 자의 비극
"그 양반 빼낼라구 논을 팔아서 그때 돈으루 7만원인가 8만원인가를 챙겨가지구 전주로 올라왔당께요"
실존인물 이기동씨의 처 김영금(85)씨는 전재산과 다름없는 이 돈을 형무소 소장과 부장들에게 건넸다. 형무소에서 목회일을 보던 강 목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오히려 소설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당시에는 소위 뇌물을 통해 몰래 감옥을 빠져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세상이 그 만큼 허술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전쟁은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한치의 허술함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출옥할 것으로 믿고 완도로 내려가 모내기를 마친 김씨는 뜻밖에도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닥칠 비극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부랴부랴 전주로 다시 올라왔던 것이다.
"형무소 정문에서 본께, 군인들이 트럭에다 죄수들을 싣고 쩌어기 공동묘지 너머로 가더랑게요. 그리구 쬐끔 있다가 '우당탕탕' 총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올라오더랑게요"
현재 팔순을 넘긴 김영금 할머니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눈가엔 눈물이 번지고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어쩌면 이기동씨의 비극은 1950년 7월의 어느 날 영원히 끝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겨진 가족들의 비극은 이렇게 반세기를 넘어 현재에 이르고 있었다.
"구덩이에 사람들이 죽어 널부러져 있는데, 우째 사람을 그 모양으로 맹그러 놓았는지, 흙은 덮다가 말구 기름을 찌끄려 불을 꼬실렀는지 눈 뜨고는 못 보겠더랑게요. 며칠 지난 시체도 있는지 발싸 구데기가 꼬이기 시작했드라구요"
당시 갓 서른을 넘겼던 젊은 아낙은 끝내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겹겹이 쌓여있는 시신을 일일이 뒤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더구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그을린 시신을 보고는 '남편의 시신이라도 찾아야겠다'는 일념을 접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영화 <태백산맥>, 사라진 엑스트라의 행방
피켓을 들고 벌교 거리를 지나는 행렬, 피켓에는 '빨갱이를 처단하자'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보도연맹원의 행진을 담고 있는 '태백산맥'의 한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 남로당 지하세포로 활동했던 서점주인도 이 대열에 끼어있다.
당시 정부는 좌익전력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반공산주의 시위를 조직했다. 물론 자신들의 전력 때문에 이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여 '빨갱이 처단'을 외쳐댔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자 이들은 '예비검속'이라는 초법적 국가권력 남용으로 체포돼 집단 학살 당하고 말았다. 소설과 영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대목이다. 영화속에서 벌교 거리를 가득 메우며 '빨갱이 처단'을 외쳐대던 보도연맹원들의 종말은 어떠했을까. 죽음이었다. 그것도 정식재판도 받지 않는 떼죽음.
1950년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의 대다수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제주 4·3사건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등 중형자 외에도 지하조직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심부름을 했던 부역자, 단순 가담자, 등 그야말로 무고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남하하기 시작하자 군경은 이들을 트럭에 싣고 인근 야산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서너 명씩 뒤로 묶은 이들을 미리 파두었던 구덩이 앞에 일렬로 늘어 세웠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손톱 만한 총알들은 이들의 가슴을 뚫고 허공을 갈랐다. 군인들은 흙을 몇 삽 떠 축 늘어진 이들의 주검 위에 뿌렸다. 이들 엑스트라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이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입에 담지 못했다.
이들은 '태백산맥'에서 역사적 배경을 구성하는 엑스트라로 등장했다. 그리고 역사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만 같았던 이들 엑스트라의 행방은 최근에 와서야 밝혀지기 시작했다. 반세기동안 억울하게 묻혀졌던 유골들이 하나 둘 땅속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은 역사의 의미를 설명하려 애썼지만 정작 엄청난 죽음을 비껴가며 역사의 본질을 피해나갔다. 소설은 역사가 그렇게 만들었고 이념이 사람들을 미치게 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역사의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의 의미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은 역사가 아니고 사람이며 학살자들을 미치게 한 존재도 다름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