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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9 | [문화와사람]
‘단순한’ 사람의 단순하지 않은 외출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3-07-04 11:34:06)
늘 공부가 그리웠노라고 말하는 이, 그저 뜻없이 마주한 우연을 그 ‘공부 욕심’때문에 지나칠 수 없었다는 사람이 있다. 공주사대를 졸업한 뒤 전주 해성 중?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 홀연 국악공부에 몰두해 이제는 국악 이론가로, 국악 단체 ‘도드리’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남상숙씨(52). 영어를 전공하던 사람이 가야금과 거문고, 양금을 연주하고 국악 이론을 가르치게 된 데에는 그 자신, 스스로 ‘단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학 1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가 많이 적적해하실 것 같아서 가야금을 권해드렸어요. 마침 친정 동네에 가야금을 연주하던 할아버지가 계셨거든요. 그런데 진도가 많이 느렸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저라도 어머니를 가르쳐 드려야겠다고 마음 먹은게 국악과의 첫 인연이 된 셈이죠” 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변영숙 가야금 연구소에서 우연히 변영숙 선생의 동생인 변성금 선생을 만나 국악공부를 시작해 보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다가온 우연이 서른여섯의 늦은 나이에 국악 공부를 시작하도록 만들었고, 1년여의 준비 끝에 한양대 음악대학원 국악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뚜렷한 동기나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영어라는게 학문으로서 평생을 바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회의감이 들었던건 사실입니다. 주위에는 영어 전공자들이 오히려 우리것에 더 많은 애착을 갖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것에 대한 애착없이 남의 말을 한다는건 선후가 뒤바뀐 것이나 다름없죠” 그래서 별스레 큰 미련도 없이 교사일을 그만두었다. 언젠가 동료 교사가 웃으면서 내뱉던 말처럼 ‘아찔할 만큼 단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젖먹이까지 둔 두 아이의 엄마로서 공부를 시작한다는게 결코 쉬운일은 아니었다. “남편이 석사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이제 당신이 공부할 차례라고 하더군요. 남편은 늘 제가 무언가를 배우고 시작하도록 독려하는 편이에요. 그런 남편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던게 사실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가 많이 그리웠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지금 돌이켜 보면 대학원에서 내로라 하는 국악계의 대가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었던게 큰 행운이고 행복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학원에 입학한지 꼬박 9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원광대학교 겸임교수로,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로 하루 24시간이 짧기만 하다. 현재는 이리 향제 줄풍류 양금 이수자로 한달에 한 번 정기 연주 모임에 나가고 있고, 도드리 멤버로서도 열심이다. 그래서인지 행·불행을 크게 느껴볼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그의 말이 오히려 더 행복하게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분명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남이 발견하지 못했던 이론을 찾아냈을 때, 혹은 자신의 작업이 새로운 이론정립에 밑바침이 됐을때 희열을 느낀다고 했으니, 공부하는 일이 그토록 행복하다고 했으니 말이다. “학생들과 학문적 교감이 오갈 때 몸 안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샘솟는 것 같아요. 서울로 출퇴근 하는 일이 고단하다고 느껴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수업을 끝내고 나면 저는 오히려 더 원기왕성해져요” 단순히 맞딱뜨린 우연이 인생의 ‘희열’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일견 행운일 수 있다. 그러나 삶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가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그 행운을 발견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사람에겐 슬픔과 기쁨의 몫이 있다고 생각해요. 행·불행, 그리고 슬픔과 기쁨은 공존하는 것이고 내게 어떤 몫이 주어지더라도 우주가 순조롭게 운행하는데 필요한 그저 내 몫일뿐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때문인지 주위에서는 그를 두고 싫은게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들 말한다. 모든 일에 긍정적일 수 있는 힘은 아마도 삶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양금에 대한 매력과 애정도 그의 삶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양금은 국악기 중에서 줄이 쇠로 된 유일한 악기에요. 그래서 미세한 조율이 필요한데, 이 조율이 제대로 돼야 음 전달이 정확해지거든요. 아주 예민한 귀와 감각을 지녀야 조율이 가능한거죠. 그런데 신기한건 조율이 잘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악기와 연주를 하게 되면, 소리가 귀에 거슬리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조율이 되는거에요. 그럴 때에는 악기에도 생명이 있구나, 그런 느낌이 들죠. 양금은 생명력이 느껴지는 악기에요” 실력파 영어교사로, 알아주는 과외교사로, 그리고 이제는 양금연주자와 국악이론가로서 ‘단순한’그의 외출이 단순해 보이지 않는 것은 도전과 변화를 행복과 기꺼움으로 만들어내는 그만의 ‘순수함’의 위력때문이 아닐까.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빛 바랜 봉투가 눈에 띤다. 제법 두툼하고 묵직하다. 이게 뭐지? 생각이 안 난다. 이내 꺼내본다. 아! 너희들이구나. 순간 내 몸은 어느새 18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먹머루빛 눈망울과 단발머리 교복의 사랑스런 1-5반 아이들. 교사가 되고 처음 맡은 담임. 여름방학 직전의 지루하고 짜증나던 오후시간. 난 너희들에게 10년 후 자신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글짓기를 시켰었다. 어떤 아이는 마지못해 손바닥만한 메모쪽지에 몇 자 쓱 적어냈고, 또 어떤 아이는 원고지를 꺼내 진지하고 차분하게 5장도 넘게 써낸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스프링으로 왼쪽이 묶여진 연습장을 북북 찢어 적어냈지. 물론 몇 녀석들은 그게 싫어 제출하지도 않았고…. 이걸 바로 읽지 말고 10년 후 아이들을 다시 불러모아 같이 읽어 봐야지 하며 봉투에 고이 담아 책상 서랍 깊숙이 넣어 둔 거였다. 근데 까마득히 잊어 버린 채 10년을 넘기고 말았다. 이내 후회되며 부끄럽고 떨리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꺼내 읽어본다. 아... 이름은 기억이 분명한데 얼굴이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아, 그렇지. 다시 서랍을 뒤져 작은 옛 교무수첩을 찾아냈고, 신상기록란을 펼치니 아이들의 사진들이 빛바란 채 나를 쳐다본다. 얼굴과 글을 대조하며 하나씩 읽어 나갔다. 외교관이 되어 넓는 세상 두루두루 돌아다니고 싶다던 지영이. 그래 요녀석은 실장이었지… 피아니스트가 되어 있을 거라던 지연이. 참 요녀석은 졸업후 한동안 편지하더니 지금은 어찌 지내는지 되게 궁금하네…. 외국 유학을 하고 있을 거라던 창숙이. 그래 이 녀석은 끝내 미국으로 이민 갔지…. 선생님이 되고 싶다던 명애. 넌 내가 3년내내 담임을 했지. 지겨웠을거야… 간호사가 되겠다던 은경이. 가만가만 은경이… 은경이… 그래 은경이. 네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솟는다. 여름방학이 끝났는데도 넌 며칠이나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반아이 두명을 앞세워 주소만 가지고 네 집을 찾아갔었지. 주소는 분명 전주시 삼천동이었는데 시내버스는 금천 저수지 근처의 산언덕에 우리를 내려놓았고, 산에 난 오솔길을 따라 높은 언덕 두 개를 지나서야 너의 마을에 도착했었다. 마을 아이가 가르쳐 준 네 집에 당도했을 때 우리는 그저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어. 세상에… 이런 집이 있다니. 깊은 산골에서도 볼 수 없는 초가집이 그랬다. 네 집은 초가 움막이었어. 민속촌에서도 볼 수 없는, 지붕이 어른 키보다 조금 높고, 부엌 하나 방 한 칸이 전부인, 동화책 그림에나 나오는 그런 집이었어. 경계도 없는 마당엔 자그마한 장독대가 있었고, 둘레에 피어있는 붉은 봉숭아 꽃은 왜 그리 처절하게 느껴졌던지… 그 옆에 넌 동생을 등에 업은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지. 아이들이 다가가 네 이름을 부르며 울먹이는데도 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선리야, 집 찾느라 힘들었지. 여기에 좀 앉아라. 선생님도요.` 방문 앞에 걸쳐진 평상 반쪽만한 마루에 앉아 햇빛을 피하면서 담임인 나는 네 형편을 미처 알지 못한 게 너무 부끄러웠었단다. 막노동과 날품팔이로 생계를 꾸려가시던 부모님, 아버지의 잦은 주벽과 생활고에 어머니는 급기야 정신이상으로 가출해 버리고, 아버지는 무작정 어머니를 찾아 떠난 지가 일주일… 삼남매의 맏이인 은경이는 가장이 되어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던 것이다. 아빠 오시면 꼭 학교에 나오라고 다짐해두고 돌아오는 길에 마을 어귀까지 나와 배웅하던 네 모습이 아직도 아련하구나. 학교로 돌아오는 동안 네 친구들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다시 찾아갔고 아버지를 만나 학비 걱정 말고 은경이를 학교에 꼭 보내달라고 부탁했지. 한달이 지나서야 네가 아빠와 같이 학교에 나오던 날 아이들은 기뻐 소리치며 달려나갔으나 그날 넌 결국 자퇴를 하고 학교를 떠나버렸지. 아버지 뒤를 따라가며 손 흔드는 아이들을 향해 눈물짓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난 어느 날 수영이가 교무실에 달려와서는 빨리 밖으로 나오란다. 은경이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반가워 달려가보니 아이들보다 훨씬 성숙해지고 밝은 표정의 네가 서 있었다. 너무 기뻐 손을 잡고 흔들며 안부를 물으니 엄마가 집에 돌아오신 후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으며, 잠깐 집에 다녀가는 길에 선생님과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들렀다고 했다. 그저 열심히 바르게 살며 학업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말라고 부탁하고 헤어졌었지. 또 한 3년쯤 지났을까? 강아지 약을 사러 후배의 가게로 가는 길.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웬 아가씨가 선생님하고 부르면서 뛰어온다. 선뜻 알아보지 못하고 당황하는 내게 “선생님 저 은경이예요. 멀리 선생님 모습이 보여 너무 기뻐 달려왔어요. 그동안 소식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저 서울에서 식모살이 그만두고 팔복동에서 공장다녀요. 그리고 이제 엄마랑 함께 살아요.”하며 숨돌릴 사이도 없이 빠른 말들을 쏟아냈다. 그 순간 난 이게 바로 교사만이 느낄 수 있는 보람이요, 기쁨이라고 생각했다. 널 보내고 난 후 한참이나 흐뭇한 마음으로 들떠있는 내게 영문도 모르는 후배는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자꾸 물었다. 난 이제 교사생활을 접는다. 그 아이들이 글을 남긴 지 10년이 흘렀고, 또 그만큼이 다시 흘렀다. 그동안 난 무슨 꿈을 꾸며 살았을까? 혹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나의 꿈많은 아이들이 선생님이 되어 훌륭한 뜻을 펼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있지나 않았을까? 나도 그 아이들과 함께 10년 후의 내 모습에 대해 글을 남겼어야 했다. 내가 그 글을 읽으며 부끄러워하고 내일을 다시 준비할 수 있도록. 이 해가 저물기 전에 우리 아이들에게 이 원고를 돌려줘야겠다. juc-ki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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