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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9 | [문화저널]
풍부한 문화교류는 정서적 "공존"의 지름길
김창희 전북대 교수?정치외교학과(2003-07-04 11:20:49)
지난 6월 25일은 공교롭게도 일요일이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50년이 되는 날이었다. 남북관계가 현 상황과 같지 않았으면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대대적인 상호비방에 적의를 불태우는 장을 마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화해의 분위기는 2000년 6월 25일자 북한의 『로동신문』이 6.25에 대한 언급을 한마디도 하지 않게 만들었다. 실제로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간에는 교류?협력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남북한간에 사회문화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198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84년 북측에서 제공한 수해물자의 인수와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의 상호교환은 실질적이고 가시적인 사회문화교류였다. 그후 1988년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를 적극 추진”한다는 7?7 특별선언을 계기로 보다 적극적인 남북교류가 시작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비교적 다양한 사회문화교류가 실현되었다.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1990년 ‘범민족통일음악회’(평양), ‘90년 송년 통일전통음악회’(서울) 그리고 1990년과 1991년에 걸쳐 ‘남북통일축구대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단일팀 참가가 이루어졌다. 1991년 12월 남북사이에 도출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라는, 소위 ‘남북기본합의서’의 제16조는 “남과 북은 과학 기술???문학 예술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교류협력을 실시한다”고 규정하였다. 남북한의 문화예술교류는 남한의 시민단체가 주도하였다. 그러나 제3국에서 이루어진 교류사업이 많았다. 남북한이 아닌 제3국에서 이루어진 대표적인 교류로는 학술교류가 가장 많았다. 종교교류의 활성화는 종교 본연의 것보다는 북한의 경제난과 무관하지 않았다. 북한에 95년과 96년에 수해 등의 자연재해로 식량난이 심화됨에 따라 식량지원과 같은 인도적 지원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종교계가 명분을 확보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결과 종교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남북문화교류에도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1998년 11월 18일부터 시작된 금강산 관광사업은 비록 제한된 지역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반주민의 대규모 방북으로 사회문화 교류협력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특히 리틀엔젤스 예술단의 평양공연과 윤이상 음악제 개최는 민간예술단체의 첫 북한 공연 성사라는 의미를 가졌다. 1999년에는 한국의 대중가수들이 북한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고, 민노총이 주도한 남북노동자 축구대회가 평양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다. 그 후 현대 남녀 농구팀의 평양 서울 교환경기가 이루어졌다.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발표된 이후 북한의 소년예술단과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희망과 아픔을 동시에 느꼈다.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한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제3항과 제4항에서는 이산가족 교환과 경제협력 그리고 사회문화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의 활성화를 천명하였다.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가 8월 15일에 이루어졌고, 이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던 온 민족은 눈시울을 적셨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제한된 인원만으로 이루어진 이산가족은 모두에게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남겼다. 더 많은 사람들의 ‘한(恨)’을 풀고, 민족애를 찾기 위해서는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을 통한 상봉의 정례화 내지는 상시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문화교류란 정치분야와 경제분야를 제외한 것으로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인 차원의 대북 지원까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것이다. 남북간의 분단과 장기간에 걸친 대결구조 속에서 이질성이 심화되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만나고 교류하고 서로 알고 느끼면서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독일의 경우에서도 동서독 사람들의 만남과 매스미디어의 교류 등은 통일의 촉진제가 되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사회문화교류의 폭도 확대되어 질적?양적으로 풍성해가고 있다. 남측의 언론사대표단의 북한 방문이 이루어졌고, 우리 방송사에 기획 주문하여 ‘조선중앙TV’에서 제작하여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우리 방송사에 의하여 방영되었다. 북한의 ‘조선국립교향악단’이 서울에 와 KBS교향악단과 합동공연을 갖는다. 앞으로도 많은 인적?물적 교류가 이루어질 것이다. 최근에 나온 백두산 한라산의 교차 관광이나 개성관광 특구 등이 실현될 때, 남북한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회문화교류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 교류나 경제적 협력과는 달리 사전 정지 작업이나 큰 비용이 들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진다. 물론 북한의 호응이 있어야겠지만 교류와 폭을 확대하는 것은 그 추진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정치?경제분야 못지 않은 효과가 있다. 궁극적으로 사회문화교류는 통일을 향하여 나아가는 걸음이지만, 이는 통일 이전의 평화적 공존을 위해 더욱 더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통일을 전제로 한, 다시 말하면 사회?문화적 통합을 전제로 한 사회문화교류는 불필요한 상호비교를 유도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경우 남북한간에 또 다른 차원의 사회?문화적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 사회문화교류의 목표는 분단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여기에 맞는 상호이해와 공존이라는 차원으로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dam@moak.chonb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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