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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
익살의 풍요로움과 단아한 백색의 향연 / 강경숙 충북대 고고미술학과
관리자(2008-11-18 18:51:31)
-조선시대의 도자기2⃞ 발전기 발전기(1432~1469)는 인화기법의 절정시기이며, 자유분방한 박지와 조화기법이 창출되는 한편 백자가 분청사기 가마에서 동시에 제작되기 시작한다. <분청사기 인화 집단연권문 ‘곤남군장흥고’명 접시>는 문양 구도가 단정한 접시이다. 곤남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1419~1437년간 존속했던 군이며 지금의 사천시 곤양면에 해당되므로 이 기간에 제작된 경상남도 집단연권문의 정황을 보여 준다. <분청사기 인화 국화문 ‘장흥고’명 발>은 정통3년(1438)의 세조의 태지석과 함께 경북 성주에서 출토되었다. 이 대접은 장흥고 3자가 내저 중앙에 상감되었고 국화문 도장을 하나씩 인화했다. 접시와 발의 두 예를 통해 1430년대에는 집단연권문과 낱개의 도장 문양이 동시에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1450년대의 인화기법의 분청사기에는 <분청사기 인화 집단연권문 ‘덕령부’명 발>과 <분청사기 인화 국화문 ‘덕령’명 접시>가 있다. <분청사기 인화 집단연권문 ‘덕령부’명 발>은 충북 영동의 제품이고 <분청사기 인화 국화문 ‘덕령’명 접시>는 광주광역시 충효동의 제품이다. 덕령부(德寧府)는 1455~1457년까지 존속했던 단종의 상왕부이므로 편년의 기준이 되며 경상도와 전라도의 분청사기를 비교 · 연구하는데 자료가 된다. <분청사기 인화 국화문 월산군 태항아리>는 태지석과 함께 알려졌다. 이는 광주광역시 충효동 제품으로 지석의 내용으로 보아 태항아리로 사용했다. 이처럼 발전기의 분청사기는 인화기법이 중심을 이루며 지역에 따라 도장무늬가 달랐던 점이 흥미롭다. 발전기의 하한과 변화기의 상한으로 설정한 1469년은 경기도 광주에 관영 백자가마 운영이 법제화된 해이다. 1469년에 완성된 『經國大典』 공전(工典) 사옹원(司饔院) 경관직(京官職) 조에 사기장 380명이 법으로 제정되어 있다. 이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백자의 제작은 관영체제로 운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토산 공물의 조달에서 벗어난 각 지방의 분청사기 가마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백자 생산으로 전환하여 갔다. 실제로 1450년 경에는 분청사기 가마에서 소량이나마 백자가 함께 제작되고 있었다. 광주광역시 충효동에서는 모두 7기의 가마와 교란되지 않은 높이 3m의 폐기물 퇴적층이 발굴되었다. 현재 2호 가마와 퇴적층이 현장에 복원·전시되어 있다. 2호 가마는 총길이 20.6m, 너비 1.3m로 13도의 경사면에 진흙과 돌로 축조한 일자(一字)형의 단실요 구조이다. 아궁이가 깊어 불턱은 0.9m나 되고 가마의 끝부분은 얕은 웅덩이가 달린 배연시설이 있어 특이하다. 폐기물 퇴적층에서는 인화문 발과 접시가 중심 기종이며, 박지와 조화기법의 병과 항아리는 독특한 특징을 보이는데 <분청사기 조화박지 모란당초문 병 편>이 주목된다. 또 분청사기 제기편, 백자, 명문편 등은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보·궤·준(尊)·작(爵)과 같은 금속제기를 도자기로 번안한 예가 <분청사기 제기 보> 몸체와 뚜껑이다. 세종 12년(1430)에 동이 부족하자 금속제기를 도자제기로 바꾸도록한 기록을 뒷받침하는 실물이다. 『世宗實錄』卷49, 世宗 12年 8月 6日 條 “…제기의 주조는 우선 자기를 구워서 만들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其鑄器姑以磁器燔造從之)” 제기는 처음 동기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리한 선이 사라지고 둥글둥글한 형태로 변화해 갔다. 鄭素羅,「朝鮮前期 吉禮用 粉靑沙器 硏究」,『美術史學硏究』223, 韓國美術史學會, 1999, pp. 5~33. 충효동 가마터에서 출토된 명문에는 ‘무진내섬(茂珍內贍)’·‘내섬’ 등이 있고 공물 표시로는 광상(光上)·광별(光別)·광공(光公) 등이 있다. 무진은 광주의 옛 지명으로 1431~1450년간 사용했다.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성화정유(成化丁酉)’명 묘지석 편과 정윤이(丁閏二)명 분청사기 발과 백자 발로서 이들은 모두 1477년에 제작되었다. <분청사기 귀얄 ‘어존’명 고족배>는 한글 명문으로서 세종 28년(1446)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외에 사기장의 이름을 굽 안바닥에 새긴 예는 충효동 가마의 특징으로 김화중(金禾中)·득부(得夫)·한생(閑生)·막생(莫生) 등 다수가 출토되었다. 충효동 분청사기가마에서 백자의 제작은 1450년대 이후 시작되며, 147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분청사기와 함께 생산되었다는 사실이 ‘丁閏二’ 3자가 새겨진 분청사기 발과 백자 발이 출토됨으로써 밝혀졌다. 따라서 경기도 광주 관요 이외의 지방에서의 백자 제작의 시기를 구명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는 곳은 충효동 분청사기 가마터 퇴적층 유적이다. 충효동 가마의 활동은 『세종실록』「지리지」의 무진군의 자기소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광산현 토산조의 기록을 통해 볼 때,『世宗實錄』「地理志」長興都護府 茂珍郡 條  “자기소가 하나 있는데 군 동쪽 이점에 있다(磁器所一在郡東梨岾)”; 『新增東國輿地勝覽』光山縣 土産 條  “자기는 현 동쪽 석보리에서 생산한다(磁器縣東石保里)” 세종시대부터 성종시대까지 약 90여 년간 요업이 계속되었다. 공주 학봉리 분청사기 가마터는 충효동 가마터와 함께 한국의 2대 분청사기 가마터이다. 학봉리 분청사기 가마터는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발굴되면서 학계에 알려졌지만 무차별히 훼손되어 왔다. 『세종실록』「지리지」충청도 공주목 토산조에 의하면 동학동에는 중품으로 평가한 자기소가 있다. 『世宗實錄』「地理志」忠淸道 公州牧 土産 條  “주동 동학동 중품(州東 東鶴洞 中品)” 동학동은 지금의 학봉리로서 이 곳에서는 수십 기의 가마터가 확인되며 1420년대~1530년대까지 100년 이상 요업이 계속되었음이 수습도편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15세기 후반경에는 철화분청사기와 더불어 백자가 제작된 상황도 파악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92년에 5호가마를 재발굴한 바에 의하면 폐기물 퇴적층은 거의 훼손되어 체계적인 학술 자료는 얻지 못했으나, 가마구조는 깊은 웅덩이형 아궁이와 일자형 번조실의 형태이며 번조실의 중앙에는 등간격으로 진흙 불기둥[停焰柱]이 일정하게 하나씩 시설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변화·쇠퇴기 변화·쇠퇴기(1469~1540년경)는 중앙 백자 관요의 영향 아래에서 지방마다 변화를 겪는 시기로 지역의 특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시기이다. 공납의 의무가 없어진 가마들은 얕고 조잡해진 인화문 위에 백토를 귀얄로 슬쩍 바르거나 혹은 무늬가 없는 대접의 내외면에 백토 귀얄 자국만이 한번 휙 돌아간 그릇을 제작했다. 충남 공주 학봉리의 철화분청사기는 지역적 특징이 가장 뚜렷하다. 특히 철화기법의 묘지석인 ‘성화 23년명 묘지석 편’, ‘홍치 3년명 묘지석편’, ‘가정 15년명 묘지석편’ 등이 이 곳에서 수습되어 학봉리 철화분청사기의 제작시기는 1489년, 1491년, 1536년의 어간일 가능성이 높다. 이 곳 철화분청사기의 문양은 붓놀림이 전문화원의 필치와는 다르지만 해학적이고 활달한 필력은 한국인의 미적 정서의 또 다른 일면이다. 왜 공주 학봉리에서 유독 철화분청사기가 특징을 이루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봉리에서 철화분청사기가 제작되던 시기에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는 회회청 안료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던 시기이다. 관요에서는 도화서 소속의 전문 화원이 세한삼우(歲寒三友)의 매화 · 소나무 · 대나무를 청화안료로 그리고 있을 때, 학봉리에서는 물고기·연지·초화 등의 무늬를 철화안료로 그렸다. 그러므로 구애됨이 없는 학봉리의 분청사기 철화무늬는 서민풍의 해학이 살아 숨쉬는 특징을 지닌다. 전북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가마는 가마구조와 출토도편에서 특징을 보인다. 가마구조는 불기둥이 세 개씩 시설된 계단식 구조로 길이 25.6m, 너비 1.5~1.6m, 14도의 경사면에 축조한 ‘단실 불기둥 계단식요’이다. 이는 한국 가마 발달사상 계단식 구조의 시원을 밝힐 수 있는 가마이며 가마안에는 3개의 불기둥을 시설하고 있어 1개의 불기둥을 가진 공주 학봉리의 단실 불기둥요와는 구별되는 지역성을 보여 주목된다. 출토유물은 <분청사기 조화 물고기문 항아리 편>과 같이 박지 조화기법에서 특징을 이루며, ‘내섬(內贍)’과 ‘예빈(禮賓)’의 관아 이름이 분청사기와 백자에서 모두 보인다. 출토유물의 양상은 충효동과 유사하며 활동 시기는 대체로 15세기 중후반이므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기록된 바 없다. 변화·쇠퇴기의 분청사기 가마들은 백자로 이행하면서 귀얄분청사기와 분장(덤벙)분청사기로 그릇 전체 표면의 백자화를 시도했으며 한편 무늬가 없는 회백자를 제작했다. 좋은 백자 태토의 확보가 백자 제작의 관건이기 때문에 태토 문제만 해결된다면 백자 제작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백자 원료는 광맥 중에 백토띠가 형성된 토맥을 찾으면 가마를 짓고 백자를 생산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분청사기의 개념·특징·변천·가마구조 등을 보아 왔다. 분청사기는 15세기의 그릇이며 세종 치세년간에 크게 발전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창제에서 보듯 민족문화를 완성시킨 임금이다. 훈민정음·음악·천문기기·농서·약학서 등을 창의적으로 제작 저술하였다. 심지어 장영실(蔣英實)과 같은 발명가가 민중에서부터 나온 시대이다. 이처럼 민족문화가 고취된 시기에 도자공예에서는 분청사기와 같은 그릇이 생산되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특별한 이름을 붙일 필요 없이 그냥 자기였던 것이다. 자기는 원류가 청자여서 그 위에 백토로 분장했고 또 표면에는 자유분방한 그림을 그렸다. 관아에 공납하는 그릇은 정성들여 도장을 찍은 인화기법의 분청사기로서 관사명과 지방명이 새겨 있는 특징이 있다. 이처럼 분청사기는 상감청자로부터 자연히 시작되었으며 표면 백자화의 길을 걷다가 자연스럽게 백자에 흡수됨으로써 약 200여 년간 생산되었던 한국을 대표하는 도자기이다.   분청사기의 시작과 종말 그리고 백자로 이행해 가는 모습은 광주 충효동 가마에서 보여주었고 또한 계단식 가마구조의 시작은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가마에서 보여 주었다. 번조실 안에는 불기둥을 세워 효율적으로 불꽃을 유도했던 단실 불기둥요의 구조를 공주 학봉리 분청사기가마에서 확인되었다.   분청사기에는 한국인의 심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도 조화분청사기에서 새·물고기·나무 등의 표현은 절로 웃음을 자아내고 때로는 거침없는 활달한 필력에서 한국인의 원초적인 미감이 표출되었다. 그래서 한국미술품 가운데 가장 한국적인 작품을 하나만 선택하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주저함이 없이 분청사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바로 순수한 한국인의 마음이 맑게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평생 천직으로 알고 하루에 수 백 개의 사발을 빚어내는 동안 신기(神氣)가 그릇에 베어들 수밖에 없다. 끝없이 반복하는 과정에서 절로 도(道)가 텄고 흙을 빚어 불에 구워내는 동안 사발은 불속에서 예술로 승화되었다. 이러한 평범한 진리의 산물인 분청사기의 끝시기에 만들어진 사발이 이웃 나라 일본인들의 다기(茶器)로서 말없는 감명을 주어 일본의 귀중한 문화재로 대접받고 있다. 그러므로 분청사기는 한국 도자문화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도자문화에 공헌한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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