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 |
휴머니즘연극의 이 질긴 생명력 / 홍석찬 창작극회 대표
관리자(2008-11-18 18:50:21)
가을날 토요일 오후. 관객도 가을의 감성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앞좌석에 앉은 아줌마들이 시종일관 추임새를 넣고 있다.
연출의 시작 큐와 함께 공연이 시작된다. 최근의 시립극단의 작품은 well-made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럴 것이 조민철 상임연출은 운영자적인 입장에서도 <광대학교>를 이을 또 다른 작품을 고대하고 있다. 안 본 전주시민이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진 <광대학교>를 능가하는 기획공연을 만들어 중국으로, 미국으로, 두바이로, 유럽으로, 세계상품을 만들려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2000년 5월에 만들어진 <광대학교>를 계속 업그레이드하면서 10년동안 전주시민의 사랑을 받아왔으니 이제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마치 저 블루오션의 집단 <태양의 서커스>가 15년 된 작품은 폐기하듯이. 전주시립극단이 최근 몇 년 사이 공연한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극은 시간벌기였고, 몇 개의 극단발주 창작희곡은 가능성 타진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조민철 연출의 고민이 읽혀진다. 이 작품에 거는 기대와 노력이 어떠했을지. 마을 주민의 수가 갈수록 줄어들어 마을간 통폐합 위기에 처한 어느 꿀쩍진 오지마을에 뜨내기 남자와 그의 임신한 처가 여행 차 들르면서 마을사람들은 기대에 부푼다. 이장을 비롯한 순박한 마을사람들은 갖은 애를 써서 부부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하지만 그들이 살인전과자 임을 알고는 내◎⃝으려 한다. 이장의 어머니인 치매할머니는 그 살인전과자를 베트남전에서 죽은 큰아들로 잘못 알지만 편한 마음으로 세상을 뜬다. 할머니의 애틋한 마음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은 고아로 살았던 살인전과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또 이러한 소식에 감동한 공무원 덕으로 마을은 통폐합의 위기를 면하고 30년 만에 출산자가 생긴 뉴스 속의 마을이 된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요약하다보니까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우연으로 진행되어 사실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세상과 동떨어진 오지마을이라는 설정은 일종의 ‘거리두기’이며, 별 희한한 이야기가 상징하는 바를 곱씹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죽은 아들을 못 잊는 할머니, 시골노총각들, 고아출신의 살인전과자, 죽음과 탄생, 뉴스를 전하는 기자들 등, 다소 상투적인 이야기를 끌어들인 것은 아이를 많이 낳아 농촌마을을 지킨다는 재미난 소재를 반감시키기도 했다.
희곡은 김정숙 작가가 썼다. 그동안 <봉숭아꽃>, <지금 이별할 때>와 같이 여성의 시선을 애써 드러내는 글쓰기로 소극장공연에 더 적합한 희곡들을 선보였었는데, 이 작품 <우리 마을 다산리>는 감정이입하는 것보다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대극장공연이라는 측면 때문에 이야기의 확장성, 객관성, 대중성을 더 고민했을 것이고 많은 숙제를 풀었을 것이다. 전북연극의 문제는 작가부재라는 말도 있다. 나의 순박한 생각이겠지만 글쓰기만 전념하는 작가였으면 한다.
‘난산이었지만 무사히’라고 연출과 작가가 입을 모을 정도로 진통을 겪은 작품이라면 배우의 열정도 더 요구 됐을 것이다. 주역들은 고집스러우면서도 안정된 연기스타일을 가졌고, 군중 씬의 배우들은 매끄럽고 조화로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해본다. 수많은 관객 앞에서 태연하게 연설하는 배우이지만 그가 연극이 아닌 실제 청중 앞에서도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무엇이 자유로움을 결정하는가? 완전한 이해? 완전한 대화? 유전적 완전함?
그 답을 ‘집중’에서 찾고 싶다. 민간극단의 배우는 전주시립극단의 배우를 선망의 눈빛으로 대한다. 자기 분야에만 충실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전주시립극단은 그야말로 전문 연극인 집단이다. 역할구분이 되어있으며, 호미 만드는 사람이 호미질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시민들도 그런 전문예술인들이 만들어 내는 연극을 재미있어한다. 때문에 배우의 완전한 집중은 배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형식은 사실적인 틀을 벗어나기도 했다. 같은 장소에서도 조명은 분위기에 맞추어 수시로 변하고, 표현주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음향효과는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주었다. 시골을 배경으로 인간미를 다룬 내용치고는 다소 생경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를 신선하다고 해야 하나, 통일감이 깨졌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극 초반에 이야기전개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마을 아낙들이 집단으로 출산하는 장면, 군청에 몰려간 마을 사람들의 데모장면, 무대를 꽉 채운 꽃상여 장면, 자전거발전기로 밤하늘에 별을 띄운 장면 등은 조민철 연출과 전주시립극단 배우가 아니라면 보여주기 힘든 명장면이었다.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 사회에서 냉대를 받고 살 곳을
-가을에는 좀 느릿느릿 살아볼 일이다 / 정동철 시인, 우석대 전기공학과 교수
도대체 가을이 무슨 도둑놈처럼 와 버렸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겠거니, 언젠가부터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있다는 말을 안 들었던 것도 아니지만 시월 날씨가 한낮이면 30도 안팎을 오르내리다가 느닷없이 비 한 번 뿌리고 나더니 갑자기 가을이다. 그리고 세상은 시끄럽다. 경제 대통령이 등극하고 채 일년도 채우지 않았는데 주가는 폭락하고 이러다가 이거 다시 ‘IMF 구제 금융’ 시절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탄식도 들린다. 참으로 가을 같지 않은 가을이다.
아무리 없이 살아도, 사는 게 힘들어도 가을은 풍성한 계절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일주일에 한번쯤은 어디 조용한 산방에라도 찾아가 맑은 차 한잔에 좋은 시집 한 권 읽을 여유는 줘야하는 거 아닌가 투덜거리던 차에 ‘오창렬’ 시인의 첫 시집 「서로 따뜻하다」를 만났다. 제목처럼 그의 시집은 따뜻하다. 갑자기 사무실 창가에 들이닥친 가을볕처럼 반갑고 고맙다. 시집을 읽는 자와 오창렬 시인의 시집 사이에 비쳐드는 가을바람도 청량하다. 마치 이 가을의 빈곤한 읽을거리를 위해 그의 첫 작품집이 나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시집에는 대개 시인들의 첫 시집이 그러한 것 같은 터무니 없는 ‘과장’과 무모한 ‘실험’ 따위가 존재하지 않아 읽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늘 허투루 나지 않는 고향길/장에나 갔다 오는지 보퉁이를 든 부부가/이차선 도로의 양끝을 팽팽하게 잡고 걷는다/...중략../인도가 없는 탓인지 모르지/사거니 팔거니 말싸움을 했을지도 몰라/나는 또 혼자 생각에 자동차를 세웠다/차가 드물어 한가한 시골길을/늙어가는 부부는 여전히 한 쪽씩 맡아 걷는다/되돌아봄도 없는 걸음이 경행經行 같아서/말싸움 같은 것은 흔적도 없다/남편이 한쪽을 맡고 또 한 쪽을 아내가 맡아/탓도 상처도 밟아 가는 양 날개/안팎으로 침묵과 위로가 나란다/....하략 <‘부부’ 일부분>
위에 소개한 시, ‘부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시인은 섣부르게 자신의 시에 개입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골길을 걷는 두 노부부 사이에 적절한 긴장과 느린 속도를 유지함으로서 여백의 미를 담고 있다. 그의 시집이 이 정신없고 산만한 가을에 읽기에 딱 알맞은 것은 그의 시 편편에 담고 있는 바로 이 저속(低速)의 미학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그야말로 정신없이 초고속으로 돌아가고 거기에 매달린 일상의 생활들은 되돌이켜 볼 시간도 없이 이리저리로 끌려다닌다. 오죽했으면 유네스코 라는 UN의 단체가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좀 천천히 사람답게 살자고, ‘slow city'라는 것을 선정하고 다닐까. 빠른 속도가 분명 현대인들에게 더 많은 시간 여유를 줘야할텐데, 그래서 좀 더 많은 성찰의 시간과 여유를 줘야할텐데 그 빠른 속도만큼이나 우리들도 정신이 없다. 이 마당에 오창렬 시인은 이 바쁘고 정신없는 가을에 천천히 가자라고 속삭인다.
한 점 온기를 전하기 위해 덜컹거렸을 유리창은/가장 먼저 데워지기 위해 그 여윈 몸 한쪽을/한데로 내놓고 밤새 기다렸던 것이다/그리곤 반짝, 아침햇살 머금기 시작했을 것이다/온몸으로 퍼져가는 조용한 온기를 느끼며/누군가를 위해서 먼저 스스로가 따뜻해져야 한다는 걸,.....< ‘서로 따듯하다’의 일부>
그리고 이 저속의 시간이 가져다주는 따뜻함이 바로 ‘누군가를 위해서 먼저 스스로가 따뜻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한번이라도 따스한 삶을 살고 있는 거 맞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그 느린 속도로 더 기다리자고 얘기하고 있다.
배를 기다린다/밀물이 들기 시작하고 오래지 않아/배는 올 것이다 배를 기다리는 동안/퉁퉁 부은 집게발로 농게 한 마리 섬에 오른다/건넛 섬의 안부가 궁금한 농게/손차양한 발이 붉다/이내 배가 올 것이고/기다림보다 빨리 우리는 바다를 건널 것이다.....하략 <‘하섬에서’ 일부>
기다리면서 ‘만지작만지작 우리의 생각도 말리자고, 비틀거리지 않는 꿈 좀 얽어보자고 <저문 봄날에도>’말하는 오창렬 시인의 시들은, 더불어 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초고속의 세상에서 우리가 잊고 살아가거나 마음은 있어도 챙기지 못하는 소중한 것들을 그의 시(詩) 속으로 끌어와 우리들 앞에 펼쳐놓는다. ‘오종종 새끼 거느린 자식들이 봄 일구는 동안 당신의 몸이 벌써 어두운 밭인,/통째로 늙어가는 씨감자처럼 쭈글쭈글해지는 어머니 <독>’가 그러하고, ‘면 소재지로 난 작은 길/눈속에 묻혀 우체부도 못오는/겨울 한철 <까치소리>’가 그러하다.
여기엔 새가 없고 새가 떠나는 모습도 없고 새를 바라보던 나도 없습니다. 옛날처럼 내리는 햇살에 새가 떠났다는 생각조차 잘게 부서집니다. 부서지고 흩어져 텅 빈자리, 새와 나 사이에 맑은 자리 하나 들어섰을 뿐입니다.............. 새와 나의 좁은 간격을 울리며 배롱나무 꽃이 피어납니다. 지는지 모르게 자꾸 피어납니다 <‘텅 빈자리’ 일부>.
비가 와도 올 사람은 오고/못 올 사람은 갠 날에도 못 온다/오거니 가거니 젖은 생각을 털어내면/사흘은 사흘이고/내리는 비는 그냥 내릴 뿐이다.....<‘비닐봉지’ 일부>
아무리 정신없는 가을이 와도 올 사람은 오고 오지 못할 사람은 오지 못할 것이다. 그 생각조차도 부질없는 것이려니,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이다. 그래 이 가을에는 ‘새가 떠났다는 생각’조차 잘게 부서지고 흩어져 텅 빈자리 하나 곁에 두고 볼 일이다. 그리고 그 텅 빈자리에 홀로 앉아 가을볕을 벗삼아 느리게 느리게 오창렬 시인의 시집 한권을 읽어볼 일이다. 그것도 맑고 따듯한 차 한 잔과 함께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이 지긋지긋한 속도도 잊고, 세상의 시끄러움에 귀닫고 도적처럼 찾아온 가을도 잊고 오창렬 시인의 시가 품은 ‘느림’까지도 잊다보면 가을이 가고 또 흰 눈 내리는 겨울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