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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
‘세바퀴’의 딜레마 / 김환표 전북민언련 사무국장
관리자(2008-11-18 18:43:48)
문화방송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한 코너인 ‘세바퀴’는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프로그램이다. 세바퀴는 ‘세상을 바꾸는 퀴즈’의 줄임말로, 제목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누가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 ‘주부’ 연예인이다. 무엇을 통해서? 퀴즈를 통해서. 그러니까 주부 연예인이 퀴즈를 풀면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게 이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인 것이다. 기획 의도는 달성되고 있을까? 조심스럽게 답하자면, 그런 것 같다. 우선 세바퀴는 ‘아줌마 시대’를 열었다. 세바퀴에는 우리가 흔히 ‘아줌마’라고 부르는, 그러니까 ‘주부’ 자격의 여성 연예인들이 집단으로 출연한다. 게다가 이들은 프로그램의 주도권까지 쥐고 있다. 드라마를 비롯해 대부분의 프로그램에서 여성, 특히 아줌마는 주변적인 인물이나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세바퀴에서 ‘아줌마’ 연예인들은 시종일관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주연’이자 ‘주역’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여타의 오락 프로그램에서 입담을 자랑하며 날고 기는 김구라, 이휘재 등 남성 연예인들은 ‘아줌마’ 연예인들에게 주도권을 뺏긴 채 놀림을 당하기 일쑤다. 때로 주눅이 든 채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도 있다. 세바퀴의 아줌마들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에 솔직하기까지 하다. 이들은 일상 생활과 밀접한 퀴즈를 풀면서 때로 젊은 남자 연예인에 대한 호감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도 하고, 가족과 부부 생활에 대해 솔직 담백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남의 시선은? 물론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거칠게 말해, 그런 솔직함은 세바퀴의 풍미를 돋우는 돋을새김이다. 하지만 명(明)이 있으면 암(暗)이 있는 법. 아줌마들의 ‘솔직 담백함’에 대한 상반된 시각도 존재한다. 세바퀴가 ‘아줌마는 창피함을 모르고 주책스럽다’는 아줌마에 대한 왜곡된 사회적 통념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주로 여성 단체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인데, 이게 세바퀴의 딜레마다. 세바퀴가 그 동안 방송의 주변부에만 머물러 왔던 아줌마 연예인들의 거침없는 수다를 통해 통쾌함을 주고 있는 동시에 아줌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브라운관의 ‘주연’ 역할을 하는 아줌마 군단의 등장에 우선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첫 술에 배부르지 않듯, 아줌마 연예인들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자유롭게 발설하며 프라임 시간대를 종횡무진하는 모습, 그 자체가 신선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바퀴를 좀 더 긴 호흡으로 바라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hopechest’와 ‘손태그릇’/ 김규남  언어문화연구소장 참 좋은 세상이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경이롭기 짝이 없다. 사람마다 전화기를 들고 다니며 집집마다 인터넷이 설치되어,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언제든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종종 편지를 기다리면서 마음 졸이던 때를 기억한다. 꼭 이성이 아니어도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서 알게 된 감정이 기다림과 그리움이었다. 그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다소 고통스럽지만 그 후의 만남이 주는 아뜩한 기꺼움은 그 때 이후로 애틋하다는 형용사에 대해 살뜰한 속살 같은 느낌을 지니게 된 동기가 되었다.   이와 비슷한 경로로 내가 즐겨 쓰는 단어가 hopechest이다. 컴퓨터가 상용되면서 가상공간에서 이른바 ‘닉’이란 걸 갖게 되는데, 내게는 이 단어가 지금껏 나의 ‘닉’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이 단어를 좋아하게 된 까닭은 hope과 chest라는 단어의 배열 때문이다. 나는 이 단어를 액면 그대로 ‘가슴에 희망을’로 생각하고 사용해 왔지만 기실 이 단어는 신부가 결혼 전날 혼숫감 혹은 자신이 소중에 여기던 물건을 넣어 두는 상자를 이른다. 나는 이 단어로부터 어떤 설렘과 애틋함, 아쉬움과 그리움 같은 온갖 감정들이 뒤엉켜 있는 덩어리진 감정 혹은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hopechest에 비등한 우리말 단어는 무엇일까 고민한 적이 있다. 아마 말 그대로 이바지함 쯤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이바지함에서는 으레 그래야 하는 의식적 행위의 일부만 남아있을 뿐 덩어리진 정서가 빠져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이 단어를 제외하면 그와 관련된 정서를 표현할 수조차 없다는 게 사실 믿기지 않았다. 왜 우리에게 그런 단어가 없단 말인가. 얼마 전, 이런 안타까움을 후련하게 날려버린 사건이 있었다. 올 여름 그 무더운 여름의 한복판에 고창 무장면 송계리 방고개에서 방언조사를 하며 지냈다. 그곳에서 이병권 할아버지를 뵙게 되었는데 이분은 연세가 79세신데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조사에 응대하시고도 조금도 흐트러지거나 싫은 내색을 하지 않은 분이셨다. 25년 방언 조사 상 이렇게 꼿꼿하고 반듯한 분은 처음이라고 해야 옳겠다. 그 분께서 일러주신 ‘손태그럭’ 저마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보관하기 위해 항상 가까이에 두는 상자나 함을 이르는 이 단어야말로 내가 그 동안 간절히 기다려온 단어임에 틀림없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들을 넣어두고 늘 가까이 보관하고 싶은 그 무엇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 기회에 ‘손태그릇’ 하나씩 마련해 보시기를 그리고 그 보관함과 더불어 이 ‘손태그릇’이란 단어가 우리 주변에서 각별한 정서를 가지고 널리 쓰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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