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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
전북의 자존심이더라 - 무성서원
관리자(2008-11-18 18:40:37)
원촌마을엔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다. 행정구역명 무성리는, 무성서원에서 따서 무성리이고, 서원이 있어서 원촌(院村) 즉 서원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무성서원은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때 전국 47개소의 서원과 사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철폐되기에 이른다. 이때 전라도에서 3곳, 즉 장성의 필암서원, 광주의 포충사, 정읍칠보의 무성서원이 남는다. 전북에서는 무성서원이 유일하게 훼철을 면하게 된다. 이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무성서원 누각인 현가루 바로옆 “영상 이공 최응 불망비(領相 李公 最應 不忘碑)”이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회응은 바로 대원군 이하응의 형님이었다. 아마 영의정 자리에 있었던 형님에 대한 각별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누각이 현가루(絃歌樓)이다. 누각의 현가는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말이다. 거문고를 타며 노래함을 그치지 않는다는 뜻의 현가불철은 공자가 진(陳)·채(蔡)·광(匡)나라에서 횡액을 당하였을 때, 현가(絃歌)를 계속하였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과 수양을 계속함’ 을 뜻한다. 무성서원의 건축구성과 배치는 옛 백제지역의 기본적인 조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나의 중심축선을 중심으로 누각과 강당 그리고 사당이 일렬로 배열되어 이다. 문루인 현가루는 평지건축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2층 규모의 누각을 평지에 세우면, 뒤쪽의 강당과 사랑이 가려지고 강당에서의 경관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런 이유로 누각을 갖추게 되면 출입이 불가능하다. 높아도 안되고 낮아도 안되는 이 어려운 상황을 건축조형으로 절묘하게 구현해 냈다. 5칸의 강당을 호남지역의 평야가 많은 지역에 어울리는 옆으로 기다란 수평적 조형을 갖추고 있다. 5칸 강당 가운데 3칸 대청마루는 앞뒤 모두 문이나 벽이 없이 시원하게 툭 터놨다. 마당이나 누각에서 바라보면, 강당을 투과하여 사당의 내 상문이 보이고, 사당영역이 모든 시선의 중심을 이룬다. 태산사인 사당을 강조하는 것은, 무성서원 강학을 하면서도 제향(祭享)위주의 공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원촌마을에는 불우헌(不憂軒), 즉 근심걱정이 없는 집이라는 정극인 선생의 17대손인 83세의 정병길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 정극인 선생묘는 등하불명(燈下不明)혈 이란다. 즉 이 원촌마을에 살면 밝지 못해서 외지 즉 타관에 가서 살아야 번성한다는 명당이라고 한다. 원촌마을에 불우헌선생의 후손인 영광정씨가 두집 살고 있다. 한집은 정병길씨 댁이고 또 한집은 영광정씨 남편이 죽고 부인 혼자서 살고 있으므로 사실상 한집이 살고있는 셈이다. 조선을 성리학의 유토피아로 꿈꾸었고, 이 사상을 조선 초 먼저 받아들인 정극인 선생은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을 통해, 조선사회가 나아가야 할 철학을 천명 했던 것이다. 16세기에서 18세기 까지는 불우헌 정극인이 우리지역의 슈퍼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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