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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
빛나는 조연, 일본문화 <오하루의 일생 (1952)>
관리자(2008-11-18 18:39:35)
서양의 눈으로 보면 좋을 영화 ‘아무개의 일생’하면 한 인간의 수난과 영욕에 따른 추락이나 타락을 다룰 것은 동과 서가 다르지 않을 것. <오하루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괜찮은 집 여성이 사랑을 잃고 화류계의 꽃으로 젊음을 살다가 노년에 파고다 공원에서 박카스 아줌마가 되거나 저 섬 어디에서 카페마담으로 살아가기도 할진댄, 17세기 일본 여성의 비극적 삶이 그리 새로울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하루의 슬픈 생애에는 하강의 내러티브 말고 눈을 붙들어두는 아름다움이 있다. 비련의 주인공이 오하루(다나카 기누요)라면 그 조연은 기모노(모아두면 박물관 하나가 될만한)와 수많은 문들의 선과 병풍, 빛이 쏟아지는 정원과 부채공방 그리고 악기와 웅얼거리는 노래 등 일본 문화의 자잘한 꽃들일 것이다. 유려한 카메라 워크 뒤에 숨은 이러한 소품들은 엑스트라 이상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눈 밝은 사람이 느낄 완벽한 화면구성에 귀 밝은 사람이면 알만한 전통음악과 악기는 귀를 간질인다. 미조구치의 영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서양사람의 눈으로 보면 더 좋을 터. 궁녀에서 씨받이로 남편을 기다리다 굶어죽어 유령이 된 여성의 이야기인 <우게츠 이야기, 1953>가 전쟁시의 인간상을 그린다면 <오하루의 일생>은 팍스도쿠가와 시대를 다룬다. 전쟁 이후 통일 시대 뛰어난 건축술과 상업이 발달한 세계최대 도시 에도가 그 무대. 물질적 부와 소비의 독보적 중심지 에도의 한 여성이 궁녀에서 거리의 늙은 창녀로 전락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담담하게 보여주는데. 맨얼굴을 알 수 없게 분칠이 과한 여인 하나가 절에서 오백 나한상을 바라보고 있다. 각기 다른 나한의 얼굴들. 회한에 잠겨 과거 자신을 거쳐 간 남자와 나한상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예전에 읽은 일본소설 속 어느 늙은 기생이 잠 안 오는 밤이면 남자 하나하나를 떠올리면 잠이 온다던 부분이 생각난다) 그 분칠한 늙은 창녀의 플래시백이라면 뻔한 것이다. 두루마리 족자를 펼쳐지듯 이 불쌍한 여자의 일생은 기승전결도 없이 꾸준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보자. 젊은 날 궁녀로 일하던 오하루는 하이쿠로 화답할 소질을 가진 여자였다. 그러나 이 교양있고 아름다운 여성은 젊은 하급무사를 사랑하다 부모와 함께 장안 밖으로 추방되고 만다. 죄목은 낮은 신분의 남자와 음란한 행위를 한 것. 1686년 11월이라면 에도시대가 열린 지 70여년이 흘렀고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되던 시절이지만 신분제도만큼은 엄격하기에 미인을 사랑한 하급무사는 목이 잘리는데, 감독은 서류를 보여주며 합법적 재판을 거쳤음을 강조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계급을 나타내는 의상들은 아름답지만 이 스산한 과정에서의 은유가 없는 대사들은 드라이 하다. ‘상하 구별 없이 자유롭게 사랑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지막 유언은 이게 일본만의 비극이 아니라 세상보편의 이야기라는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 미인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법. 잠시 떠돌이로 살던 오하루는 지방 영주 다이묘의 첩으로 들어가는 인생역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점 없고, 목덜미에 잔털이 없는 여자를 찾는다고? 취향도 독특하셔라. 별스런 조건을 다 갖춘 미인 오하루를 태운 2인거 가마꾼의 익살스러운 동작에 맞춰 다이묘의 거대하고 화려한 성안에 다다르고 다시 4인거를 타고 저택으로 들어간다. 채홍사부터 걸음걸이와 법도를 가르치는 자, 건강을 체크하는 자, 예법의 주체는 모두 남자들이다. 여기 정교한 미닫이문들에 둘러싸인 정갈한 다다미방에서 화려한 기모노를 걸친 채 찻잔을 감싸며 차를 마시는 모습은 서양인들을 위한 서비스 화면일 것. 단순한 구도는 더욱 단순하게, 병풍의 각과 장지문이 가지는 사각형의 단순함을 나타내는 문들은 심플하다. 소리도 없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면서 공간을 분할하는 종이로 된 미닫이 문 후스마 그리고 빛이 쏟아지는 대나무 숲의 야외장면과 혹은 둥근 창문들이 만들어내는 상류사회 공간은, 아름답다. 오하루는 에도의 꼭두각시 인형극을 관람하면서 아들 생산에 들어간다. 그녀 자신의 처지를 나타내는 장면이렷다. 다다미와 탁자 등 사각의 선으로 가득 찬 방안에 많은 남자들이 앉아있는데 다이묘는 무사들의 중앙에 자리한 것이어서 도대체 아이 아빠가 누구인지도 분명치 않다. 그에게 오하루는 그저 아이를 낳게 하고 싶은 여자일 뿐이라는 감독의 사인일 것. 결국 다이묘의 아들을 낳지만 젖도 물리지 못한 채 금방 쫓겨나는데, 댓잎이 낳은 수묵화 같은 밝은 창을 두고 어디로 갈까. 그래, 가부장제가 어찌 일본만의 일이고 씨받이가 오하루와 강수연만의 일이겠는가? 서민에서 천민으로 재물에 눈이 먼 아버지는 쫓겨 온 그녀를 시마바라의 유곽에 판다. 돈을 뿌리는 상인이 너는 도마 위 생선처럼 팔려온 거라는 말에 자신은 거지가 아니라고 말하는 유녀 오하루, 네 운명은 바로 이 돈에 달렸어 하던 그 녀석은 화폐 위조범이었다. 화려한 바탕의 객잔 문양들 사이로 천한 웃음소리가 상인문화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공간에서 그녀는 또 남자를 만난다. 한 때의 영화를 잊고 눈높이를 낮추어 성실한 부채공방 장인의 아내가 된 낮은 가채의 오하루는 새 삶을 시작하는데. 얄궂게도 기모노의 요대를 사다준다던 남편 야키치는 강도에게 죽고 만다. 식물 같은 여인으로 로맨스는 순간이고 오하루의 사랑에는 하방경직성만 있을 뿐. 이제 허물어져가는 누각 아래 사미센을 켜며 노래 부르는 거리 여자에게서 오하루는 자신의 앞날에 대한 예감을 느낀다. 이 여자 세상의 욕망을 끊고 스님이 되고자 비구니 사찰에 들어가지만 결국 여기서도 남자의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절에서까지 쫓겨나는 장면은 의미 깊다. 감독은 그녀의 관능에 카메라를 들이대지는 않기에 오하루의 벗은 몸을 보여주지 는 않는다. 하지만 방석만한 히라가나 글씨가 쓰인 병풍이 걸린 절집에서 모진 놈 만나 기모노를 벗는 장면은 여체를 드러내지 않고서도 에로틱의 정점을 보여준다. 길고 넓은 소매와 목선이 드러나게 디자인되어 착 가라앉는 어깨선과 요대의 화려함과 뒷태가 더 아름다운 일본 원피스를 벗는 모습은 끈끈하다. 단추나 끈 없이 풀어지는 속곳과 속속곳이라니. 여자라면 한번쯤 입어보고 싶은 기모노, 그 화려한 문양의 안쪽 옷들을 한번쯤 벗겨보고 싶다는 남자들의 욕망을 미조구치는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이대로 끝나면 너무 싱거울 것 같아서인지, 오하루가 낳은 아들이 다시 다이묘가 되는 반전이 없지는 않다. 하여, 오하루에게 잠시 해뜰날이 찾아오지만 과거 유곽에 살던 행적에 따른 악플이 그녀를 괴롭히는 것. 오로지 남자와 가문의 체면만 중요하기에 장성한 아들은 그녀를 찾지 않고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사람은 더 이상은 없다. 이런 비극을 가끔씩 위에서 굽어보는 카메라는 무심하고. 이제 허물어진 성터에서 돗자리 몸 장사를 해야 하는 천민으로 떨어진 그녀는 인생무상을 가르치는 사악한 고양이가 되어야 한다. 장죽, 술병 등 서민들의 소품 속에서 야한 기모노를 입어야 밥을 먹는 처지. 허물어진 벽과 무너진 돌더미 사이 흙바닥에서 사미센을 켜야 하는 매음녀의 종생이라니…. ‘덧없는 세상의 그림'을 닮은 미장센 구로사와 아키라가 굵고 거친 선으로 보여준 <라쇼몽>이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타자 질투심을 느낀 노년의 미조구치 겐지는 서양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금방 알아차린다. 국가경쟁력의 상품은 문화상품이란 것, 일본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미조구치는 <오하루의 일생>을 시작으로  <우게츠 이야기>까지 베니스 영화제에서 3년 연속 수상으로 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린다. 사실, 자신 스스로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벗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추락하는 여성을 표현하는 데는 흑백이 나았을 것이다. 컬러화면이었다면 의상과 건축 그리고 에도시대 고유의 인테리어들이 너무 고혹적이어서 몰입에 방해를 받았을 지도 모르겠다. 한번도 클로즈업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늙은 오하루가 걸어가는 수미상관의 롱테이크 장면은 아름답다. 감정이입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일 것. 이 고단한 여자의 일생을 감독은 빈번하게 크레인 숏으로 보여주는데. 하나 더, 여기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원신 원샷'. 카메라가 주인공을 따라 팬 혹은 트래킹 하면서 서서히 좌로 이동하면서 상대방의 반응이 끊어지지 않게 드러내는 미장센, 고수의 수법이다. 자포니즘, 도자기를 싼 포장지 그림을 통하여 유럽인들은 인상주의를 창조했다. 그 사람들의 눈으로 <오하루의 일생>을 보시라. 생선을 날것으로 먹는 깔끔함과 함께 열도의 습도가 몸을 감쌀 것이다. 유럽인들이 모아놓은 그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에 걸린 에도시대의 우키요에(浮世畵)들, 다완, 그리고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기모노의 나라를 생각하노라면 쿄토나 나라의 거리를 혼자 조용히 산책하고 싶어질 것이다. PS. 최진실의 일생 최진실이 갔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카피와 얼굴이 제대로 어울린 시대의 첫 번째 아이콘. 수제비 먹고 자란 처녀가 밝은 모습으로 나타나 드라마와 영화에서 스타로 성공한 허스토리는 감동스러웠다. 인생의 부침 속에서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쓰는 용감함과 아줌마 신데렐라로 거듭나는 그녀가 조금 더 이기는 삶을 보여주었으면 좋으련만, 어쩌랴. 후일 누군가 ‘최진실의 일생’을 영화로 찍는다면 급격한 상승과 하강의 파동은 심하겠지만, 늙고 지친 최진실은 없을 것이다. 최진실은 더 나쁘지 않을 때 갔다. 안타깝다. 정말 좋은 작품을 남길, 살아갈 나이가 덧없지만, 삼가 명복을 빈다. butgood@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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