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 |
갯벌 한 자락에선 소금을 굽고...
관리자(2008-11-18 18:38:50)
소금의 문화인류학
사람은 소금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소금은 우리 몸에 들어와 체액의 삼투압 균형유지, 신경계의 전기적 산도 유지, 혈액의 압력과 양의 유지, 근육세포에 출입하는 물의 조정, 탄수화물과 단백질의 신진대사, 살균 및 소화 작용 등 중요하고 꼭 필요한 많은 일들을 한다. 그래서 사람은 소금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영어 'Salt'의 어원은 라틴어 'Salarium'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군인들의 봉급이란 뜻으로 로마시대에는 관리나 군인들의 봉급으로 소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다고도 한다. 북미 대륙의 태평양 연안의 원주민들은 소금기 있는 해조류를 주로 먹었고, 내륙지방에서는 풀을 태워 그 재를 먹기도 했다.
인류가 수렵·어로생활을 하다 농사를 지으며 곡물과 채소류를 주식으로 하면서부터 사람들은 더 많은 양의 소금이 필요해졌고, 이에 치열하게 소금 만드는 방법을 개발해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최초로 시작한 곳이 소금을 쉽게 얻을 수 있는 해안지방일 것이라는 것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빗살무늬토기는 해안이나 강 하구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소금은 식품의 저장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봄이 되면 칠산바다에 바다를 뒤엎을 정도로 많은 조기떼가 밀려오는데, 냉동기술이 없었던 시절에 이 많은 조기를 건져 올린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나? 염장가공술이 발달했기에 유통이 가능했다. 특히 긴 겨울을 나는 한반도에서는 대부분의 먹을 것을 소금에 절여 저장해 두었다가가 두고두고 먹었는데, 굴비와 젓갈,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등이 그 대표적 식품들이다.
이렇듯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금은 왕조의 성쇠를 좌우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제염업은 예부터 국가의 주요 기간산업으로 내려왔다. 옛 문헌을 보면 서해안 곳곳 갯벌 한 자락에선 소금을 구웠다. 부안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중환은 그의 택리지에서 변산을 “...주민들이 산에 올라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업으로 하여...”라고 소개했다. 1926년에 간행된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에는 “버드내’로 하여 야영(野營)같이 산재한 염막(鹽幕)을 보면서 포변(逋邊)으로 나가노라면...”라고 소개되는데, 그는 당시는 해변이었을 영전으로 해서 버드내(유천리), 검모진을 지나 내소사 가는 길에 무수히 산재한 염막(鹽幕)들을 봤던 것이다.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 보더라도 예전에 변산반도의 전 해안은 한발 건너 염막, 한 발 건너 어살로 이어졌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소금창고가 지금의 부안 계화면 창북리에 있어 마을 이름도 창고 ‘倉’자를 써서 창북리이고 마을 뒷산은 ‘염창산(鹽倉山)’이다.
바닷물을 끓여서 만든 소금 ‘자염’
최남선이 내소사 가는 길에 무수히 산재한 염막(鹽幕)들을 보았다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의 전통 소금은 자염(부안에서는 육염이라고도 부른다)이다. 문자 그대로 끓일 자(煮)자, 소금 염(鹽)자를 쓰는 자염은 바닷물을 깨끗한 갯벌흙(함토)으로 걸러 솔가지불로 끊여서 만드는 소금이다. 그래서 ‘소금을 굽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고 자염을 아무 갯벌에서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 서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조석간만의 차가 커 썰물 때에는 드넓은 갯벌이 드러나는데, ‘조금’ 동안 즉 열세물때부터 네물때까지 약 7~8일 동안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모래가 약간 섞인 갯벌이라야 자염제조에 적합하다. 제조 과정은..., 갯벌에 함수(염도를 높인 바닷물)를 모으는 웅덩이를 만들어 놓고 조금 때를 이용하여 웅덩이 중앙에 통자락(물이 모이는 통)을 설치한다. 그런 다음 웅덩이의 흙을 통 주변에 펼쳐놓고 물이 닿지 않는 7~8일 동안 갯벌이 잘 마르도록 소를 이용해 써레질을 하여 말린다. 잘 마른 갯벌흙이라야 좋은 소금을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마른 갯벌흙을 다시 웅덩이에 밀어 넣고 사리 때 바닷물이 그곳에 스며들어 염도가 높은 물이 중앙에 묻혀 있는 통속에 모이게 한다. 다시 조금 때가 되면 통속에 고인 함수를 물지게를 이용해 건너편에 있는 벗터(가마터)로 옮기고, 가마솥에 솔가지불로 8시간 정도 끓이면 부글부글 소금꽃이 피어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소금은 훨씬 덜 짜고 구수할 뿐 아니라 영양면에서 으뜸이다. 천일염보다 15배나 높은 칼슘덩어리인 반면 염분은 정제염, 천일염, 중국산 천일염에 비해 인체에 알맞게 이상적으로 함유하고 있다. 특히 자염은 다른 소금보다 5배나 많은 유리아미노산이 들어 있어 자체로도 맛이 있지만, 된장과 김치 등을 담갔을 때 젓산균의 개체수를 증식시켜 발효 음식에 궁합이 잘 맞는다. 또한 은근한 불로 끓이는 동안 거품(불순물)을 걷어내기 때문에 쓴맛과 떫은맛이 없고 뒷맛이 깔끔하다. 한마디로 자염은 갯벌이 인류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이다.
자염 밀어낸 천일염
이렇듯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전통 소금인 자염은 일제에 의해 선보인 천일염에 밀리게 된다. 갯벌을 써래질하고, 가래질하고, 걸러진 함수를 퍼나르고, 8시간 이상 불을 지펴 굽는 등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는 자염은 드넓은 갯벌에 바닷물을 가두어놓고 햇볕과 바람에 증발시켜 만드는 천일염에 경제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자염에서 천일염으로 바뀌는 이 시기 천일염의 짜고, 쓴맛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들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천일염을 왜염이라고 부르는 노인들이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본은 서남해안의 드넓은 갯벌 곳곳에 염전을 만들고 천일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부안의 곰소염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일제는 줄포항이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자 1942년에 범섬, 까치섬 등의 무인도와 곰소를 연결, 제방을 쌓아 육지로 만들고 곰소항을 축조하여 줄포항을 대신해 물자를 수탈해가는 한편 칠산어장의 어업전진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제방 안쪽으로 염전을 축조하던 중 8.15를 맞아 중단하고 물러갔다. 그 후(1946년) 전북지역 주주들이 모여 남선염업을 창업하고 95정보에 달하는 드넓은 염전을 완성하여 천일염을 생산해 오고 있다. 서해안의 광활한 간석지는 지형, 토질, 기후 등 천일염 생산의 적지로 꼽히는데, 특히 곰소만은 주위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큰 강이 유입되지 않으며 인근에 공장이 없어 갯벌도 바닷물도 오염되지 않았다. 곰소 천일염은 바로 이 깨끗하고 영양분이 많은 바닷물을 사용하는데다, 간수(후짠물)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염에는 견줄 수 없지만 그래도 쓴맛이 나지 않고, 소금발이 가는 양질의 소금이다.
우리 식탁의 점령군 ‘수입염’
그런데 자염을 밀어냈던 이 천일염마저도 수입염에 밀리게 된다. 냉동기술의 발달과 식생활 패턴의 변화 등으로 소금 소비가 급격히 준 데다 값싼 중국산 소금에 밀려 고사 위기에 놓여 있는데 문제는 이번엔 천일염이 자염 밀어낼 때보다도 심각하다는 것이다. 천일염은 원래 양질의 소금이기에 한 시기 입맛을 바꾸는데 애를 조금 먹었다지만 다른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수입염은 우리네 식탁을 망치고, 또 우리나라 제염업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 ‘수입염으로 음식을 했더니 써서 못 먹겠더라’ ‘수입염으로 김치를 담가 망쳤다’ ‘수입염으로 장을 담갔더니 발효가 안되더라’ 수입염에 우리네 식탁을 점령당한 후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소리들이다. 그러기에 좀 비싸더라도 국내산 천일염을 구하려고 해도 여기에는 또 그놈의 불량상혼이 판을 치고 있다. 수입쇠고기를 한우로 속아 구입하듯이 수입소금을 국내산 천일염으로 속아 구입하게 되는 것이다. 한우야 아예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소금이야 어디 그런가. 소금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게 인간인 것을.
제염업 기반은 또 어떤가. 우선 전라북도만 해도 칠산바다를 끼고 있는 고창에서 군산까지의 해안에는 고창의 동호, 부안의 곰소, 군산의 옥구 염전이 남아 있었으나 몇 해 전에 폐전되고 부안의 곰소염전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지난 해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이의 보전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곰소염전을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지만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법적 보전 장치는 아니다. 아무튼 곰소염전마저 문을 닫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세계 5대 갯벌 중의 하나인 서남해안 갯벌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밥상은 수입소금에 점령당하고, 제염업 기반은 형편없이 무너지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한국산 천일염이 외국산 천일염에 비해 성분상에서 특히 미네랄 함량이 높다는 사실이 속속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는데다 국민들의 천일염에 대한 인식 또한 높아지고 있다. 더하여 지난 봄(2008. 3. 28)부터 천일염이 식품으로 정식 인정받게 됨에 따라 유통업체들이 앞 다투어 천일염 판매를 시작하고 있다니 한층 더 고무적이다. 그동안 국내 소금 소비량의 43%를 차지하고 있는 천일염이 1963년 염(鹽) 관리법에 의해 광물로 분류되면서, 법적으로는 식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바람에 유통업체들의 공식적인 판매가 불가능했었다. 그런데 이제라도 천일염이 식품으로 정식 인정되었다니 우리나라 제염업의 발전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