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 |
요령소리 울리면 한 많던 영혼도 발길을 재촉하고 / 정리 윤영래 편집장ㅣ 사진 유백영 사진작가
관리자(2008-11-18 18:37:01)
“나서부텀 여그서 쭉 살았지”
1928년에 태어났어. 여그서 태어났지. 여그가 11대조 할아버지가 임진왜란 때 여그를 들어왔어요. 터를 잡았어요. 11대 할아버지가 여그가 계셔. 여그 온지가 박씨가 한 삼사백년 됐지. 그대로 이어서 여그가 박씨가 많이 살죠. 여그를 박씨촌이라고 혀요. 임진왜란 때 피난 나와 가지고 여그서 자리를 잡아가지고 그 할아버지가 손을 퍼쳤어요. 여그서 전부. 수수천명을 퍼쳤어요. 밀양 박가요. 나서부터 계속 여그서 살았어요. 우리가 오형젠디, 내가 넷째여. 사형제가 이 부락에서 살었어요. 다 돌아가시고 나 혼자만 남았어요. 내가 넷째가 나 혼자 남고 동생도 죽고, 형님들도 진즉에 돌아가시고. 용복리는 박씨촌이라고 나가먼은 다 알어, 그냥. 여그서 몇 백 년을 살었응게 다 알지. 글구 이 동네는 넘도 사는 사람들도 보통 박씨들 추객들이 와서 살어. 추객들이 넘은 별반 없어. 넘은. 사우들 딸들 그런 사람들. 이 동네가 빈집이 많아요. 인자는 시내에서 젊으신네들이 빈집에 와서 사는 사람도 있고. 집을 세로 해서 사는 사람도 있고. 여그가 싼게. 여그도 시내권인게. 한 십 분이면 간게. 이사를 한 번도 안 갔어. 이 자리서 그냥 살었어. 다 내가 짓고 살었어. 그전에는 초집이었지, 지푸락으로. 지금 집은 우리 아덜이 와서 짓고.
“우리 아덜덜이 참 잘혀”
우리 안식구는 십년 전에 갔어. 여그서 혼자 살았어. 내가 아프고 근게 막둥이가 들어왔지. 결혼은 스물 네 살에 했는디 늙은 총각 장개간다고. 그때만 혀도 스물 한 살, 스물 두 살 에 한창 가는디 인력거를 타고 갔는디. 그때는 인력거보담 가마였는디. 처갓집에서 하루밤 자고 오는 것이여. 처갓집은 여그 용진에 상은리라고. 갔는디 늙은 총각 장개왔다더니 총각만 이쁘고 안 늙었다고. 그때는 울타리, 나무로 꼬챙이로 꽂아갖고 ‘아 이쁘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초례상으서. 나도 젊어서 미웁던 안 혔어. 미웁다고 그러던 안 트라고. 그전에는 부모가 짝 지워주먼 가고 그랬지. 부모가 선보고 와서 그리 가거라 하먼 그리 갔지. 연애하먼 큰 숭으로 알고, 망신이었지. 장개 간게로 장개 안 간지 알고 그런 사람도 있드라고. 지금이사 늙어서 그렇지만. 내가 그 얘기 듣고 우리 아덜덜은 스물 다섯 살 먹어서 다 여웠어. 시방은 스물 다섯 살이먼 일찍 가는 것이여. 지금 큰 아들이 쉰 네 살, 둘째가 쉰 한 살, 막둥이는 마흔 두 살. 가운데 딸 하나를 잃었어. 수술하다가 죽었어. 죽은 애기를 낳았어. 죽은 애기를 수술했어. 수술시간이 늦었어. 딸인디 가만 살았으먼 내가 호강헐턴디. 우리 막둥이가 참 잘혀. 회사가먼서도 아부지 다녀오겄다고 잘혀. 큰아들은 경기도 고양시 살고. 둘째 아들은 서울 은평구 거그 살고. 막내 아들은 전주 사는디 내가 수술을 했어. 코 축농증 수술도 허고 해서 두 번을 해 가지고 있은게 전주 사는디 야들들이 들어와서 살어. 나를 위해서 막둥인디. 그서 마흔 두 살 먹었는디 막둥이가 마흔 두 살인디 둘이 동갑내긴디 둘이 잘들 살어. 잘혀 며느리, 아들들이 참 잘혀. 참 잘혀.
여그 저 생이소리를 그것이 자꾸 없어진다구 면에서 면장님이 추천을 해 갖구는 부락이 생이마을로 지정이 됐는가벼. 그래 가지구서나 엠비씨에서 나와서 촬영을 하더만. 생이 나가는 거를. 생이까지 다 미고. 사진이랑 다 나와서는 회관에도 걸어놓고.
구경거리가 돼 버린 상여
생이소리는 다 동네마다 틀려요. 여그는 '어 허이 이여 허 허' 생이소리가 이렇게 가, 요 근방은 다. ‘인제 가면 언지 와요’하고 메기는 사람이 이렇게 메기면 ‘어 허이 이여 허 허’하고 후렴이 이렇게 받지. 메기는 것도 소리라도 조금이라도 부를 줄 아는 사람이 메기지 아무나 못 메기는 거 거든. 저그 저 충청도 아산이라고 있드만. 아산 거 가서 저 부락으서 한 거시기를 생이메기는 것을 관광지를 맹들었드만. 생이메기는 그것을 전부. 생이널까지 전부 혀서 생이집이랑 우리가 가서 헐라고. 그것을 그대로 헐라고 보고 왔어요. 면장이랑 가라고 해서. 차가 두 대가 갔어요. 가서 본 게로 생이집을 잘 지서 생이도 잘 보관해놓고 관도 잘 해놓고 그랬드만. 우리 동네도 그대로 가서 사왔지. 생이를. 관이고 뭐시고 여그 다 있어. 상복까지 건이고 뭐시고 짚신이고 거서 보고 와서 그대로 사 온거여. 여그 다 있어. 관까지 생이까지 다 있어. 생이모양도 다 틀려. 팔아 머글라고 거시 다 틀려. 요렇게도 만들고 저렇게도 만들고. 옛날에는 우리가 직접 다 만들었어요. 그것은 인자 깨깠한 것 쓴다고 종이 사다가 우리가 직접 꽃을 맨들고, 연꽃이고 뭐시고. 거 계가 있었어요, 생이계가. 계가 있어갔고 부락에서 전부 한 이삼 십 명이 묻어갔고 전부 생이를 안 썼어, 사다가는. 집에서 맨들어 썼지. 그래갔고 나중에 전부다 늙고 젊은 사람들은 나가고 그래갔고 사람이 있어야 맨들지. 그래갔고 폐지가 돼 버렸지. 이어서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디 젊은 사람들이 여그 촌에서 뭣허고 있겄어. 다 벌어먹고 살라고 다 객지 나가서 직장 따라서 나가고 다 가고 그러지. 농촌에서 뭐 용나는 것이 있어야지. 생이집. 외뚜로 갖다가 놓거든, 그것이. 아들들이 무서워 하거든 그것을. 아들 안 댕기는 디로 안 보이는 곳으로 한쪽으로 이렇게 지어 놓고는 거따가 너놓고 필요할 때는 갖다가 쓰고 그렸어요. 인자는 다 없어졌어요. 인자는 안 쓴게. 쓰덜 안 헌게. 생이 허는 것이 없거든. 전부 양 장례식장으로 가서 한게로. 전부 양 차로 헌게로. 차로 헌게 백날 생이 쓸 필요가 없지.
세월 따라 변해가는 장례문화
나는 늘거서 늙은섬부텀 젊은 사람들 죽으면 안 메기거든. 늙은이가 가서 뭐시 좋아서 가서 생이 메기겄어. 나보다 나이 많은 먹은 사람 돌아가셔야 가서 메기지. 나보다 연하사람 죽었는디 내가 뭣 한디 가서 앞장 서 갔고 소리를 헐 수가 없거든, 체면상으로. 나도 부끄럽고. 그리서 안 댕겼어. 안 댕기고 시방 한 이 장례식장도 생이도 허는디도. 동네로 들어와서 차가 산을 못 간게 생이를 허기는 허드만. 거까지 생이를 메고 가는 사람도 있드만. 소리는 못혀. 소리는 않고 떼미고 가드라고. 누가 메기는 사람도고 받는 사람도 없고. 떼미고 가드라고. 한 삼년 전에도 있었어. 생이소리는 메기고 받고가 맞어야 혀. 발도 맞추야 허고. 발도 참 인자 ‘어 어’ 하면 유대군들이라고 혀서 당군들이 있거덩. 그러니까 이런 촌에는 비싼게 안 싸다 써. 시내에서는 순전 당군을 사다 썼어. 하루에 얼매씩, 한 앞에. 그럼 인자 그 사람들이 메기는 게 ‘어 허 헤 어 허 허 헤’ 이렇게 발을 맞춰 감선 그 사람들은 싸게 가덜 안 혀. 그냥 꼭 발 맞춰서 그대로 가. 근게 외나무다리서도 당군들은 이렇게 훈련을 받았은게 잘 건너가지. 지금은 싹 없어졌지. 당군들도 다 없어졌어요. 시방 저 장례식장이 생김서부텀은 일절 없어졌어요. 시방은 글구 전부 다 화장을 많이 하잖아. 산이 있는 사람도 화장을 혀. 납골당이라고 해 갖고. 한 돈 천만 원 들이면 잘 해놔. 몇 대로 그전의 조상을 파다가 사루갖고 태워갖고 시방 그렇게 해 논 사람이 많여. 그것도 괜찮것더만. 그것도 괜찮고, 누가 시방 벌초하는 사람도 없어요. 벌초할 사람 없는 디도 많여. 자손들이 나가서 묘도 몰라서 못하는 사람도 있고. 우리 동네 같은 디는 집안들이 많은 게 알켜 주는디 묘라도. 타관서 살다가 어디 인자 와서 느닷없이 즈그 아버지 돌아가시면 즈도 나가버리면 즈 아버지 묘도 못 찾고, 그냥. 그런 사람이 많단게. 시방은 화장법이 잘 생기고 그전에는 화장이 있어지만, 화장법이 잘 생기고. 이 납골장 그것이 또 잘 생겼드라고. 돈 없는 사람은 그냥 솔나무 밑에다가 묻어놓고 그러거든. 우리 어릴 때는 화장하면 큰 숭으로 알았지요. 근게 공동산이 있잖아. 정부에서 맨들어서 산 없는 사람은 공동묘지에 갔다 쓰라고. 일정 때는 묘를 전부 아무데나 못 써, 제 산이라도. 공동묘지에다가 정해 논데다가 쓰지 암다 쓰면 들키면 징역가고 벌금물고 그려. 들키면. 인자 내 산이 있으면 육탈된 뒤여 몰래 저녁에 가서 파다가 산에다가 썼어. 몰리 내 산에다가.
담배 한 봉과 만사
만사라는 것은 그전에는 돈을 부의를 허는 뱁이 없었어. 석자 반 떠다가 자기 아무 거시기가 왔다고 그리 갔다 줘. 그러면 그 놈을 달고.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여그서 저 마그네 다리까지 뻗쳤잖아. 친구가 많고 그전에는 돈 부의가 없었고 댐배 한 봉, 장수연이라고 있어. 댐배이름이. 그거 한 봉씩 사 갖고 오고. 그란으면 만사 그, 만사도 돈 없는 사람은 창호지 거그다가 글씨 써 가지고 갖고고. 시방은 근게로 부모 돌아가시면 빚지는 사람이 많았잖아. 돈은 안 들어오고 쓸 디는 쓰야헌게. 시방은 부의돈도 들어오고. 박정희가 한참 못 허게 했잖아. 부의도 못 허게 허고, 예식장에도 못 허게 허고. 박정희가 유신헌법이라고 해 놓고는 그거 내면 벌금 물고. 박정희 죽은 담부텀 부의를 막 허잖아.
냄새나는 쌀겨와 깻묵으로 연명했던 시절
왜정 때는 그 전에는 순전 먹고 사는 것이. 여그서 농사지먼은 일본사람들이 싹 뺏어 가버려. 전부 다 뺏어 가 갖고는. 몰리 인자 땅 속에다 묻으먼은 쪼금씩 먹을라고. 용케 삿대 갖고 댕김서 쑤셔갖고는 찔러봐서 푹 들어가면 파 갖고는 확 파서 가져가 불고. 되지게 뚜들고 파 묻었다고 되지게 맞고 그냥. 팍 사지 없이 막 뚜들고. 그럼은 인자 여그 사람들은 중국서 강냉이, 콩, 쪄, 쪄 있잖여? 시방 쌀쪄. 다 썩은 거 있잖여, 냄시가 푹푹 나는 거 깨묵. 그런 걸 배급을 줘. 일본놈들이 여그 것을 싹 뺏어가 갖고. 그놈은 먹도 못 혀 그냥. 배고픈 게 안 죽을랑게 물에다가 담궜다가 남새 남게롱. 안 죽을랑게 썩은 남새가 풀풀 남게롱 그것 먹고 골치가 아프고 긍게롱. 글도 안 죽을랑게 그놈 먹어야지. 걍 물에다 담궈 갖고 우리갖고 남새 가라앉으면 갈아서. 그놈으로 인자 갈아서. 그놈이나 많이씩 주간디, 배급이라고. 쪼맨해 갖고 죽으로 갈아서 죽 끓여서 순전 풀만 먹고 살었어요, 어렸을 때는. 산에 가서 풀 뜯어갖고 넘새, 그런 걸 넣쌌고 이런 데서 쑥 같은 거. 모다 그냥 봄에는 그런 걸로 살고. 시한에는 뭐 먹을 것이 있까디? 농사짓는 사람이라고 해야 부락으서 별반 없어요. 왜냐하면 천석꾼, 만석꾼들이 숭년들으면 논을 싹 사. 싼게. 배곯는 사람 담은 얼매래도 팔아서 굶어죽응게로 팔아서 먹으야 허거든. 긍게로 그때부터 인자 천석꾼, 만석꾼이 생겼잖어. 만마지기면 만석꾼, 천마지기면 천석꾼. 그 도지를 받아가. 한마지기에 쌀 두가마니씩인가 한가마니씩인디 가져가 갖고는 그 나머지 갖고 먹고 살고 그려 인자. 그것도 여간 사람은 짓도 못 혔어요. 맨맡허면 그 전에는 산아제한이 없어가지고는 보통 자식이 칠팔명씩 됐네. 칠팔 명씩 된게로 가르칠 맘은 먹도 못 허고. 뭐 학교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여간해선. 학교란건 가도 못하고 저 거식허면 서당, 돈이 쪼매 있으면 서당이래도 쪼매씩 댕기고 저녁으로 밤으로 댕기고. 배우는 사람도 있고. 학교 갈라니 그때 돈 일원씩인디 월세금 한달에 일원씩인디. 그 때 일원이면 쌀 한말값이여. 한말값을 주고 갈칠 사람이 있까디. 한달에 한말값인디 그 놈 가지고 한달 머글라고 허는디 갈칠 심도 없고. 못 배웠지. 우린 학교 문앞도 가보도 안했어.
군인으로 징용으로 끌려가고
왜정 때 열일곱 살인가 먹었었는디, 일본놈들이 여그 사람들 다 강제적으로 영장이 나와. 일본으로도 가고, 북한으로도 가고. 북한에다가 공장이 많었어요. 함경북도, 함경남도가 거가 맨 공장이었어. 남한사람들은 공장이 없어. 거그다가 순전 북한다가 많이 지어 놓고는. 여그 사람들 전부 모집을 혀. 알선을 혀가. 여그서 반장이 있어 갖고 하나 모집허는디 개인적으로 얼매씩 먹어. 그 모집을 허는 사람이. 그서 인자 인부들을 백명이든지 이백명이든지 인자 모집해가지고 열차를 타고. 그전에는 버스가 뭐고 암것도 없었어요. 열차타고 가는 거여. 인자 북한으로 가지. 전주로 혀 갖고. 삼례에도 기차가 있었어요. 거가서 여관서 하루밤썩을 재와. 전부 하루밤썩 재우고는 집결되는 것이 여그 용진면만이 오는 것이 아니라 각처에서 뫼와가지고 몇 백 명이 열차 하나에다가 북한으로 가거든. 임실군이건 진안군이라든지 군에서 뫼아가지고 가거든. 거그서 도망하는 사람이 많애. 도망하다가 잡히면 되지게 맞고. 강제적으로 가 허는 사람이 일도 제대로 해 주겄어? 밥은 쬐만씩, 요만큼씩 줘갖고는 그놈 먹고 헐 수가 없고. 배고프고. 그려갖고 도망오는 사람이 많았었어. 그리고 일본으로 스물 한 살이 넘으면 영장이 나와. 군인으로 보내야. 우리 형님이랑도 일본으로 군인으로 갔었지만. 군인 갔다가 해방된 뒤에 나왔지요. 군인 갔다가 스물 한 살부톰 스물 네 살까지 인자 탁 보내야. 영장가지고. 그래가지고 일본놈들이 부락사람들 전부 다 나와서 환영해 주라고. 전부 일본기 들고 그 일본 애국가 기미나 요우와 어쩌구. 다 알지. 일정 때 그거 못 외면은 차도 못 타고. 고오코 신낸나리 가덜 신조거든. 아침에 자고 인나면은 그걸 외야 하고. 그걸 못 외면 기차표도 안 줬어. 근게로 어덜 갈라면 그걸 외고 있어야지 그란으면 어딜 가도 못 했어. 못 외면 순전 걸어다녀야지. 여그서 전주 갈때도 전부 걸었지. 쌀 한가마니 짊어지고 순전 걸었지. 그란으면 소달구지, 부자사람은 달구지가 있어. 거그다 한가마니 얹어갖고 끌고 시장에다 내고. 왜정 때는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다 그렸응게. 다 그려러니 하고 살었응게. 원통하기도 하고. 왜정 때는 어린 처녀덜을 다 시집 보냈어. 열 다섯 살, 열 여섯 살 막 보냈어. 일본으로 안 끌려 갈라고.
큰물이 지고 먹을 것조차 귀하던 때
여그도 많이 변했지. 옛날 얘기허면 젊은 사람들은 얘기허면 그짓말이라고 혀. 굶고 너물이라도 삶아서 먹고 날마다 풀 뜯어다 먹었다고 허면 라면이라도 사먹지 뭣허러 그러고 댕겼냐고 그려. 젊은 놈들은 그런당게. 여그서 팔십년을 살았응게. 이 앞에 대로 같은 디도 순전 나 살아서 다 만들었지. 거가 일도 댕기고. 그전에는 지게를 짊어지먼은 장정은 왼표를 주고, 저 얼매씩 못 지면 반표를 줬어. 왼표짜리가 있고 반표짜리가 있어. 인부도 반절삯을 주고 장정들은 왼삯을 줘. 도루꼬라고 손으로 밀고 댕기는 인자 도루꼬 구루마라고 있어. 거그다 흙을 실고 밀고 갖다가 푸고. 근게 인자 여그 앞에가 대보가 없응게로 물이 지면은 시방 저수지가 있어서 큰물이 안지지만은 여그 동네 앞에 여까지 물이 들어 왔었어. 저 내깔물이. 동네 앞에까지. 시방은 저수지를 사방에다 막아 논게 비와도 큰물이 없어요. 그전에는 왜정 때 여그 저수지가 없었어요. 고산 가서 큰 저수지가 있었는디, 원체 그 때는 숭년이 많이 들었어. 하여튼 날이 가물어서 나락이 못 먹고. 일본놈들이 골짝골짝마다 다 저수지를 많이 짓어. 그거 막어갔고는. 저 우에 하고 저 너메도 있고, 저수지가. 한번엔 못 막고 차근차근 차례로 막어주고 그랬어요. 지금 인자 고산 거그다가 보를 크게 막었어. 여그 보는 별거 없구, 그 물로 농사를 짓고 있어요. 산에다 구먹 뚫어갔고 그 구먹으로 똘이 산밑으로 있어요. 고짝으로 물로 농사를 짓고 있어요. 여그는 지대가 높은디 저 아래 논까지 물이 올라 왔당게. 시방 요그 이짝으로 신작로 난지가 얼매 안됐잖여. 저쪽으로는 오래 됐지만은 산가상이라. 인자 그 호반공사라고 요리 막아놓고 인자 막응게로 토지도 많이 생기구. 하천이 전부다 토지 돼았잖아. 많이 좋아졌지.
명절이나 돼야 먹어보던 고기
왜정 때 십대들 얘기허면 그짓말 어딨냐고 그려. 모이면 인자 여그서 순전 시한에는 저 지푸락으로 멍색이라고 있어, 멍석. 그거 한 시한에 하나씩 맨들고. 시한내. 여그 저 그렇게도 하고 지푸락 갖고 짚신 엮어 갖고 시장에다가 팔기두 하고. 신발 삼어 갖고 팔고. 시한에 노느니. 일철 돌아오면 인자 논에 가서 일혀야 한게. 순전 그때는 죽으라 일해야 한게. 땅꾼이 땅을 파서 지게다 짊어 날르고. 구루마가 있어 뭐가 있어. 순전 지게로만 져 날랐지.
추석 같은 것은 인자 젤로 대명절이였어. 왜그냐면 명절 때 되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괴기 한 근 맛봐. 괴기맛은 명절 때나 한번 맛볼까 괴기 맛은 일절 보덜 못 했어. 제사 지낼랑게로 헐 수 없이 인자 그 양 명절 때 추석하고 설하고 괴기 사다가 제사 지내고 그때 맛보고 여간헌 사람은 맛도 못 봐. 쇠고기 같은 것은 보덜 못 했당게. 대보름 같은 때는 동네서 여기 전부다 풍물도 치고 윷도 놀고 제기도 차고 늘도 뛰고. 늘 여기 저 여자들은 늘 뛰고. 그전 놀던 것은 그런 것이 많았죠. 보름 때는 정월 대보름이라고.
일전짜리 다마사탕, 쌀 한말에 일원
삼십 전, 삼십 전이먼은 그 때는 일전 이전 허는 때여. 일전이먼 오다마 두 개썩을 줬어. 다마사탕이라고, 사탕. 엽전이 있다가 엽전은 일본놈들이 와 갖고는 없애버렸잖아. 대정팔년, 명치십이년, 소화이십년, 소화가 이십년 동안 살아 먹었어. 그러고 망해버렸지. 손 들었지, 미국헌티. 그전에는 돈에다가 다 명치 몇 년, 소화 몇 년 허고 다 박았지. 일전, 오전, 십전 그렇게 나오고 십전이 열이먼 일원. 일원이먼 쌀 한말이여. 장정이 하루가서 죽게 일해야 칠십전 줘. 여자들은 삼십전. 근디 품 팔을 디가 있어야지. 그렇게라도 팔으먼 먹고는 사는디 일헐 것이 있간디. 장정들은 한평에 얼매씩 퍼다가 논에다가 그려서 먹고 살고. 목화를 가지고 베를 짜먼은 일본놈들이 보먼은 낫 갖고 와서 싹 끊어 버려. 베틀을 베 짜는 것을 싹 끌러서 전부 불질러 버려. 못 해입게. 목화 같은 거 밭에다가 의복을 해 입을라고 그러먼 다 베 버려. 그러거 있으면 싹 허니 가져가 버려. 목화 같은 거, 삼 같은 거 집에서 해 입었응게. 비단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응게. 저녁이먼 집에서 불 써 놓고 굴 속으서 베를 짰어. 그걸 짜서 의복을 혔어.
먹고 살기 위해 베어버린 울창한 숲
먹고 살라고 그 때는 나뿐만 아니라 목구멍 풀칠할라고 거따만 힘을 다 썼지. 놀고 뭣 허고 그런 것은 있도 안 혔어. 뭐시라도 나무라도 해다가 때고. 일본놈들이 솔가지 요런 놈이라도 하나 새파란 거 쳐다가 때면 대번에 벌금이 나와. 저런 솔나무 가지 하나 치먼은. 산림계에서 나와 갖고. 갸덜들이 지가 와서 여기서 살라고 그냥 전부 조사를 해 갖고는. 숲이 굉장히 컸었어요. 이런 데도 꽉 쩔어 갖고. 여그도 돼야지가 많이 내려왔었어요. 그래갖고 해방된 게 전부 그놈을 양 땔감으로 전부 싹 비어다가 시내사람들이고 뭣이고 전부 불 때고 살았거든요. 여그서 나무를 해 갖다가 시내로 갖다 팔어. 나무를 혀 갖고 팔어. 시내도 병원이고 뭐시고 불 때서 혔지. 순전 장작, 나무지. 얼매 안 간게 뺄간해져, 산이. 먹고 살아야 된게. 그리고 춘게. 셋째를 낳는데 그전에 도립병원이라고 저그 저 전주 경기전 옆에 그 쪽에가 있었거든. 도에서 운영했어. 그 병원이 인자 대학병원으로 갔어. 도립병원이 그리 왬김서 대학병원이라고 혔어. 도립병원은 없어져 버리고. 거그서 하고 있는디 불을 때서 산모가 수술혀서 낳는디 불을 여간 때서 따숩가디. 차디찬 놈의 방, 빈방에다가 불을 동지섣달에 여간 때야 추워서. 이부자리가 얼매나 있었간디, 그 전에 여자들이 고생 많이 혔어. 먹도 못 하고. 나도 뭐 멕이도 못하고 입히도 못하고. 여름에는 애기 밭고랑에다가 뉘여 놓고. 넘의 밭을 메서 품 팔아서.
쳐다도 안 보던 우리 소리
그때는 소리는 안 했어요. 일정 때는 소리고 뭐시고 없었어. 없어져 갖고 임방울씨 같은 분이 우리 동네 와서 구걸해갖고 먹고 그랬어. 동냥하듯이 먹었어. 우리 배우는디 와 갖고는 내가 참 그때 임방울씨 북 한번 쳐 봤는디. 임방울씨 와서 소리허면 다 걷어서 주거던. 와서 저그서 놀다 한 서너씩 소리 불르는 동네는 암데나 가덜 안혀. 그전에는 뭐 가먼은 소리 배우덜 않는 동네를 가먼은 누가 알아주기나 허가디. 그때는 없어지는 판이여. 소리가 없어지는 판인게. 나중에 차차 국악이 발전돼갖고. 임방울씨가 온 거시 한 오십년 전이여. 임방울씨가 쑥대머리를 혔거든. 임방울씨가 쑥대머리가 장기거든. 쑥대머리를 내가 북을 쳤어요. 북치는 것은 따듬따듬 친게 임방울씨가 뭐 허는 말이 그려요. 내가 친게로 촌에 와서 불르기가 젤로 애렵다고. 요만큼만 틀리면 임방울선생도 틀린다고 그런다고. 근게로 양 이런데 와서 불르기가 땀난다고 그러드란게. 소리 부르는 사람은 흔들다 보먼은 느는 수도 있고 줄는 수도 있고 글거든. 이것이 흔들다 보먼은 박이 좀 느는 수가 있고 양 미리 끝나는 수가 있고. 그것이 사람 소리들이 숨구녁을 못 찾으먼 더 애를 먹고. 고수가 인자 숨구녁을 맞춰줘. 근게 일고수라고 안혀. 소리쟁이는 자기 고수 맞추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거든. 좀 틀리면 틀리는 줄 몰라. 틀리면 막 북 한번 때리주먼 되거든. 근게 틀리던지 어찌든지 북 한번 때리주먼 되거든. 암도 몰라.
일제시대부터 있던 생강조합, 그러나 지금은...
왜정 때 생강조합이 생겼어. 그 조합으서 다른 디로 팔덜 못혀. 차도 없지. 뱃상이라고 있어. 배밖에 없응게. 그려갖고 군산으로 가. 군산서 인천으로도 가고. 뱃질 닿는 디로 가서 팔고. 그러다가 조합이 생겼어. 조합으서 한섬이먼은 두가마니를 한섬이라고 허거던. 짚으로 짠거 가마라고 있어. 그 놈을 혀서 열 닷 근이 한 저울이여. 열 저울이먼 한 섬이여. 백오십근이지. 짚으로 엮은 섬에다가 넣어서는 그냥 위탁을 허지. 팔아 돌라고. 조합에서 구전을 먹고 한섬에 얼매씩. 한섬에 칠십 원인가를 띠었어. 그전에 생강풀이라고 있어, 가랑잎이라고. 그 가랑잎을 전부 풀을 뜯는디 산림계에서 못 뜯게 혀. 그서 조합에서 허가를 내서 인자 팔아. 일주일분에 얼매, 풀 뜯는디 얼매 혀 갖고, 풀표를 팔아. 그서 조합에서 풀표를 사다가 생강밭을 덮었죠. 덮은서부텀 그것이 공기가 들어가고 거서 생강이 하나도 안 죽고 잘 됐어. 시방은 거름을 많이 허지. 그전에는 거름을 혀도 풀 베다가 비료가 있어 뭐가 있어. 암것도 없거든. 지푸락으로 험서부텀은 다 죽은게. 봉동도 지금은 하나도 생강이 없잖여. 서산은 안 죽고 잘 된다고 그려. 충청도 서산. 여그는 심는 사람이 없어. 원인이 뭔가 허면 비료가 많이 쓰니까 그런 것이여.
“도지 못 내먼 논을 띠어버려”
해방돼서는 이승만이 대통령 헐 땐디 없는 원치 가난하고 사람들은 순전 도지 바치다가 못 먹고 살응게 토지개혁을 했어. 정부에서 저 거시기를 상환이라고 있어. 오년동안 갚으라고 연부로 갚으라고. 연부로 얼매씩 합땅을 혀. 한마지기 얼매씩 해서 이렇게 해서. 열마지기 지면 한 가마니씩 하면 열가마니 아녀. 오년만 하면 자기 것이 되야, 토지가. 이승만이 그것은 참 잘혀놨어. 왜냐먼은 그전에 자기 토지 짓는 사람이 우리 동네서 네 명 밖에 없었어. 전부 와리 유사호가 천석 받었거든. 전부 그 사람 땅 있었어. 그려갖고 인자 정부에서 토지분배를 시기놓고는 연차적으로 그 사람들은 일년에 얼매씩 받어가. 천석꾼 받은 사람들은 정부한티. 그래갖고 인자 오년 내주면 그때 등기권을 내줘. 그서 자기 토지 돼았지 그라느면 양 자기 토지가 없었어, 다. 우리 부락으서 팔십호가 넘어 사는디 네 명 밖에 없었당게. 자기 토지 짓는 사람이 네 명 밖에 없었어. 전부 넘의 논을 지어 먹고. 화리라고 혔어. 그것보고 화리라고 혀. 화리지먼은 세를 주잖아. 월세를. 논세를 주고 세가마니 나오먼 두가마니 인자 와서 감평을 혀. 잘된 놈은 더 잡고 못된 놈은 덜 잡고. 논 주인이 댕김서. 세가마니 나오먼 이 사람들이 농사지었으야 댓말 밖에 떨어지는 것이 없어. 그저 다 뺐어가는 것이나 매한가지여. 그걸 다 뺏어가는 폭이지 뭐. 도지내고 아덜은 많고 베으다가 먹고 어쩌고 나먼은 도지 줄 놈이 모지라. 갚을 놈이. 모지래먼 논을 인자 띠어버려. 다른 사람 줘, 잘 내는 사람으로 줘. 사음이 부락 부락 사음이 있어. 긍게 사음치고 자손 하나 잘 된 사람이 없어. 그 사람이 사음 맘대로거든. 띠고 잡으먼 띠고 띠기 싫으먼 사음마다 피토하고 다 죽어. 넘에다가 그렇게 못헐 일 시키고. 그전 말하먼은 도지 심부름꾼이지. 이쟁이나 한가지여. 그 사람이 권리가 참 좋았어. 추석 때 되먼 근게 막 논 안 떨어질라고 괴기 막 없는 사람들이 괴기 근이나 사다가 그 집에 갖다 주고. 처마 밑에다가 양 괴기가 뺑 돌아감서 걸려있고. 다른 사람들 밥도 굶고 거시간디 사음이 권리가 그렇게 좋았어. 다 피토허고 다 죽었어, 그 사람들. 없는 사람들 못 헐 짓이어요, 그것이. 이승만씨가 토지개혁 한 것은 참 잘혔어. 그 다음은 박정희가 정치를 잘 허고. 가난 물리친 사람은 박정희여.
시골에까지 밀어닥친 육이오전쟁
육이오때도 여그 살았지. 아, 인민군들이 이 동네 사람 둘이 잡혀가서 안 왔잖아, 죽고 안 왔어. 도망댕기고 안 잡혀 갈라고 인민군 안 갈라고. 여그도 인민군이 들어고 말고. 여그 양 아 저녁에는 여그가 공화국였어. 산사람 빨치산들이 산에 가서 전부 막 내려와 갖고 집이마다 와갖고는 다 떨어가고. 식량 있으먼 다 떨어가고 김치 같은 거 다 가져가고 이불 같은 거 가져가고. 여그 사람들 인자 저녁이먼 무선게로 봉동 여그 내 건네. 거가서 집 다 비워놓고 거가서 자고 아침이먼 죄다 건네오고 저녁이먼 죄다 건너가고. 저녁이먼 여가 다 공화국이 되버렸어, 공산주의 돼버렸어. 아 근게 전부 그냥 여그뿐만 아니라 산 옆으론 다 전부 다 따라간게. 산사람들 막 와 갖고는. 그려갖고 저녁에 잽혀 가고 이 동네 사람도 산사람에 잽혀 가서 둘 죽었어. 잽혀 가서 오도 않고. 육이오때 와서 봉동 내 건네 가 봉동 지서여. 창고 속으다가 한 마흔 댓 명을 따발총으로 양 다 쏴서 죽이고 그러고 후퇴를 했어. 후퇴를 해 갖고는 올라가다가 금산서 미군들이 내려 왔던 개벼. 내려 온 게 그놈들이 다 산으로 도망간거여. 미군들이 저그서 다 쳐 내려 온 게. 인천상륙하고 여그서는 낙동강에서는 쳐서 올라오지 저그서 길이 딱 맥혀 버린게 가도 못하고 오갈 데가 없은 게 총이 여그 냇가에 쫙 깔렸었어. 총을 줏을라면 몇 자루라도 줍고. 송쟁이 하루밤 자고 나먼은 여그 냇가 가상에 가서 한 삼십 명씩 있었어. 인민군들이 후퇴한 게 지서에서 또 빨갱이들 잡어다가 냇가 가상에서 또 싹 쏴서 죽이고. 거차게 많이 죽었어. 저쪽 사람 죽이지 이쪽 사람 죽이지 송장이 굉장했어. 개가 다리뼈를 물고 다니고 거창했었당게. 총 줏을라면 얼매든지 줍고. 나중에 인자 질서가 잽힘서 총 같은 거 전부 압수해 갖고는 부락에서 대표를 뽑아 총을 하나씩을 줘. 치안을 허라고. 나중에 미군들이 에므완 총, 가덜들은 따발총이라고 일흔 두발인가 몇발 나가, 연발로 나가는 것이. 우리나라 칼빈총 에므투라고 그렸는데, 그것이 열 야달발인가 들어가. 미군들이 나중에 옴서 야달발 짜리 에므원이 왔드라고. 야달발 쏘먼은 케스가 탕하고 나와. 총이 원체 무거. 에므완 총이, 근대가 일관이 넘어. 어깨가 무지근 허다고. 육이오때는 대원 댕겼어, 치안대원. 인민군들 잽으러 댕겼다고. 군대는 안 갔지.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고. 저녁이먼 산마다 봉홧불이라고 훤했거든. 저녁이먼 서로 잡으러 댕겼어. 근디 빵 소리 나먼 이쪽 사람만 죽은게. 갸덜 덜은 가만히 숨었다가 지나가면 쏴 버린게. 따콩총이라고 따콩하먼 벌써 대원이 하나 죽었어. 실탄을 허실 안 혀. 여그는 막 그냥 덮어 놓고 무선게 아무데나 막 쏴버린게 사람 하나도 못 맞치고 그렸어.
사랑방에 모여 유성기판으로 소리를 배우다
소리 배운지가 한 오십 여년 됐는개벼. 밸 적에는 열맹인가 뱄었는디. 거그서 인자 저녁으로 밤새도록 낮에는 일해야 된게 못 허고. 사랑방에서 노느니 양 거그서 배웠응게. 저녁에 새로 한시까지 열두시까지 허고 긍게 배가 고픈게 간식을 돌아감서 해와. 그리서 먹고. 배운 중에서는 내가 젤로 낫다고 했어. 판곤씨가 가리켰는디 그 집이 가서 춘향전, 심청전. 그 전에 유성기라고 있어. 시방은 레코드라고 허는 유성기가 있어. 바늘나오고. 그것을 임방울이로, 김소희로, 박동진이로 그것을 판이 있어 가지고 가사가 다 있어. 책이. 그놈을 봄서 그놈을 틀어놓고 거그서 많이 배왔지. 시방허고는 그때 가사허고는 선생마다 지금은 다 틀리잖아. 뭐시 공증이 있어가지고 그놈의 것이 콩나물 대가리라도 있어야지 헌디 이 소리는 그런 것이 없어. 저 선생한테 배웠으먼 저 선생제자고 그렇잖아. 시방도 잘 불르는 사람 명창이 있잖아. 시험보러가먼 그 제자는 심사위원들이 알아줘. 그 사람덜 암만해도 점수를 더 주고 이렇게 혀서 그러드라고. 시방은 뭣을 허먼 컴퓨터가 있어 갖고 거짓말도 못 허고 외수 없는디. 그전에는 그런 것 없었어. 일부러 댕기지는 않았어. 친구들이 가먼 양 자꾸 소리허라고 헌게 혔지. 환갑잔치 때 어느 부락이고 나 아는 사람이 있으먼 내가 가면 일동이 부르라고 혀서 많이 불렀지. 자꾸 시기고 그런게. 글구 부자집은 기생을 사 오는 디가 있거든. 글먼 저분 잘 부른게 한번 불러보라고 헌게 기생들이랑 불르기도 혔지. 돈이 있어야 공연도 허고 그렸지. 돈이 있어야 돌아 댕기고 허지. 벌어먹고 살아야 헌디 대회 같은 디 나갈 수 있간디. 권속들 멕이고 해야 허는디 돌아댕길 수 있간디. 나도 배우고 잡은 사람이 있었지. 내게 딸린 권속들 멕여 살려야 헌게 소리는 뒷전이었지.
천대받던 우리 소리
그 전에는 광대, 잿놈들이 소리를 불렀잖아. 당골들이 정월달이먼 동네마다 댕기면서 북치고 노래불름서 동냥을 얻었거든. 당골애비라고 남자는 허고, 여자는 당골애미라고 허고. 말하자면 상놈들이여 그게. 정초면 거그다가 아덜 낳면 팔기도 허고, 명 길으라고. 그려갖고 돈도 받아 가고. 나도 얘기 소릴 들었는데 저그 용진 권삼득이라고 소리 명창이라고 있었어. 그 집안으서 양 말도 안 듣고 집안 망신 시키는 놈이라고 죽이라고. 멍석을 말아서 작두를 갖다 놓고 모가지를 썰으라고. 내가 어차리 죽게 된게 저그 외양간에 소나 한번 웃기고 죽겄다고. 근게 소를 웃긴당게 이상허잖여. 한번 그래보라고 어차피 죽을 놈잉게. 아 손수건을 내 갖고 거그다가 소변을 봐 갖고는 코에다가 댄게 하늘을 보고 허허 하고 웃거덩. 소가 사람이 오줌싸면 웃거덩. 저놈 죽이기는 아깝다고 저리 멀리 내쫓으라고. 하여간 그렇게 양반들은 안 배왔어.
메기는 사람이 잘 해야 듣기도 좋은 법
소리 배웠다고 히도 그전에는 인자 내가 계가 많이 있어요. 그런디 가서 한마디 불르먼 그 사람들이 소문을 내고 그러네. 잘 불른다고. 내가 계가 열 여덜개가 되았어. 그런디 가서 불르먼 그냥 그 때는 소리도 없는 판이여. 이런 소리 들어보도 못헌 디가 많고. 부락에서 초청해서 많이 댕김서 불러줬어. 그땐 소리가 없었어, 귀한게. 암케나 불러도 잘 불른다고 혔어. 시방은 유치원 애덜도 잘 불르네, 인자. 유치원 애덜도 부모가 출세를 헐라고 전부 일심정력을 다 드려, 그냥. 내가 청이 좋았어. 선생보담 내가 청이 좋았어. 북도 선생보다 잘 친다고 그런 소리도 많이 들었당게. 부락사람들, 우리 전부 일가들이 모여 배왔어. 작년에 군에서 와 갖고 부락사람들 뫼아서 박았어. 메기고 허고 그랬어. 지금 면에 가면 있을 것이여, 녹음헌 것이어. 받는 사람은 아무나 받지 않아. 소리를 헌다 헝게 다른 사람이 메기면 듣기 싫고 메기는 것이. 그것도 멋지게 메기야 듣는 사람도 좋고, 상주도 울릴 때는 울리고. 메기는 것도 잘 메겨야 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