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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
[신귀백 영화엿보기] 가족의 재구성
관리자(2009-12-03 10:40:46)
가족의 재구성 <패밀리 마트, 2009 김건> 프 롤 로 그 ‘ 패 밀 리 마 트 ’ ‘슈퍼’가 없어졌다. 쇼핑이 레저가 되고, 더 싼 대형할인매장을 찾다보니 동네 슈퍼는 눈처럼 사라져 갔다.갑자기 라면이나 담배가 생각난 사람들이 점빵을 찾았을 때는 아! 하고 늦었지만 자본은 금방 동네에 편의점을 공급해 주었다. 아파트 주위라면 어디든 고유 상표‘패밀리 마트’는 밤새 불을 켠다. 말이 마트지 사실 편의점이다. 편의점은 비싸다.사실 편의점에서 살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대형할인 마트에서 사지 못한 생필품을 편히 사는 곳이기에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잠깐 머무를 뿐. 거기서 사람들은 최소한의 소비 욕망만을 발휘한다. 또한 가게의 모든 물건은 바코드로 되어 있어서 절대로 깎아주거나 덤도 외상도 없는 곳이다. 게다가 소비자와 알바 혹은 가게주인이 서로 아는 척하는 것이 불편한 공간이 편의점인 것. 패밀리 마트는 업종변경이나 폐업을 하지 않는 한 하루도 쉬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관계도 법적으로 소멸할 때까지 간판을 켜 놓는다. 이 혼 그 후 , < 패 밀 리 마 트 > 전주에서 나고 자란 김 건의 첫 번째 장편영화 <패밀리 마트>는 전주 수목토 아파트에서 시작한다. 조촐한파티. 소주보다 와인을 마시는 지인들 앞에서 결혼 10년차 부부인 찬영과 윤희는“우리 이혼했어. 축하해 줘”라며 이혼을 밝힌다. 그동안 맞벌이 중산층으로 큰 문제없이 살아온 이들 부부가 선택한 이혼에 멍 때리는 친구들은 부부라는 간판을 내리게 된 그 사연이 궁금한데, 부부는‘그냥’이라고 짧게 말한다. 대형 마트에서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결혼과 가족이라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길찾기를 포기한 그들은‘헤어진 것이 아니라따로 사는 관계’라는 부연설명이 있었을 뿐.이혼에 이르기까지 농성과 전쟁 끝에 배상금 물고 영토와 재산 때문에 치부를 다 보이는 더티함이 아닌 그들만의 쿨한 실험이 새로 시작되는 것. 참음과 폭발 사이의 감정노동이 이혼보다는 정서적 비용이 덜 든다는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이혼이라는 것이 관계의 절멸로 이어지는 수많은 전례들에 대한 학습이 충분하기에 영화 속 친구들이나 관객들은 그들의 이혼의 사유와 앞일이 궁금하다. 그러나 영화 <패밀리 마트>는 이들이혼의 미스터리 즉 이혼에 이르는 병인 윤리적 일탈과 금치산 상황 등을 푸는 게 아니라‘이혼 그 후’에 초점을 맞춘다. 평균적이고 정상적인 관계들에 대한 뒤집어 보기가 감독의 의도다.배우자와의 관계 외에는 함부로 섹스하거나 감정유희를 즐겨서는 안 되는 윤리적 인간, 이쪽저쪽 식구들의생일과 장례식과 결혼식 또 김장노력봉사 등 행사적 인간, 그 속에서 화내지 않는 인내적 인간, 그런 예의방식에서 그들은 이제 자유로워지는 것. 이혼 후 1년 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에겐 편하진 못해도 남루하지 않은삶이 계속된다. 찬영과 윤희는 이혼 후에도 그들의 로망처럼 편한 친구로 지내면서 최소한의 욕망을 실천하려 애쓴다. 양육권은 엄마가 갖고 주말에는 아빠가 아들과 잠시 놀아주는 불편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데,누가 그들을 이혼한 부부라 말하겠는가. 그들에게는 각자의 일이 있고 사회적 평판이 있기에 원거리 부부처럼 가끔 만나면서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그러나 역시 새끼가 문제다. 일에 채인 어느 날 윤희가 육아에 관한 문제로 힘들어 하는 순간, 우연히 그녀는 10년 만에 과거의 절친 선영을 만난다. 한 번의 베이비시터 인연은 그들을 새로운 끈으로 묶는다. 아이를좋아하는 화가 선영은 전시회를 준비하는 동안 잠시 윤희의 아파트에 살기로 하고 그들은 1호 엄마와 2호 엄마로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 낳기는 내가 낳았는데 키우기는 그가 더 잘 키우는 그런 사람 그런 관계,있을 수 있다. 이‘또 하나의 가족’이 생겼는데 서로의 공간과 정서를 침범하지 않으니 이들은 불행하지 않다.주말에는 반드시 가족과 어딜 가야 하고 서로가 짐이 되는 관계에서 해방이 된 그들은 과연 행복할까? 아들 원이의 생일잔치를 위해 오랜만에 윤희네에 들린 찬영은 자신의 서재를 임시 거처로 쓰고 있는 선영이 이젠윤희와 원이에게 자신을 대신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이게 아닌데 하는 소원함을 느낀다. 거기다가 윤희는전 남편에게 여자가 있음을 직감하고는 묘한 질투를 느끼면서 독립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가족 주말여행을서두른다.이혼한 부부가 살아가는 새로운 패턴에 주목하여 가족관계의 의미 있는 조합들을 보여준 김 건의 영화는새롭지만 뭔가 서운하다. 이 각자의 시선에서 여자는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와 남편의 여자관계에 주목하지만남편이 갖는 중요한 고민은 자신을 서방 같은 선배로 생각하며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후배와의 관계설정이다.남편의 고민에 반해 아내의 고민은 일보다 육아에 있고 2호 엄마의 고민은 그림보다 동성애에 있다는 것은이 영화를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실험적인 한계에 머무르게 하고 만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마초적 이데올로기에 속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창 조 자 의 침 묵 새로운 의미를 던지는 텍스트가 좋은 작품이라면 <패밀리 마트>는 세상에(그 동안의 영화에) 없던 이야기를 던진다. 이 재구성된, 유사 패밀리가 던지는 의미는 낯선 만큼 신선하다. 대부분의 낯선 영화가 미학과 윤리 사이의 갈등을 통해 새로운 해법을 보여 주지만 사실 이 영화는 갈등의 원인(아예 접고 들어가지만)이나그 해법에 대해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다만, 우리 조금 다르게 사는 것을 이해 할 수 없겠느냐고 잔잔하게 이야기한다. 특별한 사건 없이 감정선을 잘 이어가는 것이 장점인 듯하지만 에누리나 외상없는 편의점 같은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이것은 로망이다. 가족관계라는 전통적 틀에 맞추지 않고 새로운 가족관계를 설정해서 시간과 감정에서 자유와 평화를 획득한다면 이 시도는 괜찮은 모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실험하는 자유가 과연 이혼할 정도의 고통에 대한 감내든 아니면 치열한 예술과 일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소중하냐는 것이다.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닌 있을 법한 이야기이로, 욕망은 살아있으나 뭔가 허전하다. 뭘까?일이 빠져 있다. 정말로 자유롭고 싶어서 이혼한다면,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화가 선영이 입은 옷은 적어도 그녀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온 계층이며 화가란 것을 말해주지만 윤희의 일터나 집안의 디테일혹은 의상에서조차 그녀가 워킹맘이나 커리어 우먼이란 흔적을 드러내는 데는 실패했다. 일을 통해서 가치와자아실현 혹은 명성이나 사회적 성공을 향한 도전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그것 또한 보이지 않는다. 남자의 직업과 고민 역시 분명치 않음은 물론이다. 홍상수가 보여주는 인간탐구를 볼 때, 영화감독·화가·프로그래머등 직업군의 역할이 확실한 것을 생각하면 답은 간단하다. 일 속의 고독이 드러나야 벗어나고픈 자의 욕망이살아나는 것.영화 맨 뒷부분의 편지 분류하는 모습은 독립의 강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어색한 이유는 앞부분에서 편지 분류에 대한 사소한 암시가 없었음일 것이다. 반복이 주는 알레고리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말이다. 하나 더, 영화 마지막에 삽입한 감독의 보이스오버는 어쩔 수 없이 과잉이다. 창조자로서의 존엄함침묵만큼 권위를 세우는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에 필 로 그 , 전 주 에 서 만 든 … 전주가 좋아서 전주에서 찍은 영화들이 많다. 그러나 서울 사람들이 바라보는, 누추하지만 따뜻한 인간애를 표현하는 공간으로서의 전주영화는 몇 편 있었지만 <패밀리 마트>처럼 프리프로덕션부터 후반작업까지제대로 전주에서 만든 영화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화면 속 배경들이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마치 촬영현장에 와 본 듯한 느낌이랄까. 화면으로 구성되는 전주의 풍경들이 낯설지 않다. 묘하게도 원가가 얼마짜리 제품이란 것을 아는 듯한 느낌, 시인이 마지막으로 탈고한 작품이 아닌 백파일을 보는 듯한 기시감은사실 영화몰입에 방해가 되었다. 물론 이것이 감독의 탓은 아닐 것이다.공간이 캐릭터를 만들어 간다면 과연 전주라는 공간은 어떤 캐릭터에 적합할까? 그저 드라마 <단팥빵> 아니면 <사랑해 말순씨> 정도면 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영화에서든 공간은 사회 정치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찬영이 엄마와 이야기하는 처마선이 번듯한 한옥 공간과 마루는 전주적이긴 해도 그 의미가 불분명하다. 전주가 가지는 섬세한 무늬들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봄날은간다>에서의 허진호의 마루가 있고 오스 야스지로의 일본 마루가 있다면 전주에는 단단하고 오래된‘말캉’들이 있는데 말이다.지역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인력의 자발성에서부터 시작해 커리어의 습득 등 매우 귀중한 경험일 것이다. 전주 사람들에 의해 전주에서 찍은 영화라 해도 전주 사람만을 위한 영화는 물론 아니다. 고단한 시나리오 작업과 제작 투자라는 전 단계 그리고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고독하게 지속되는 감독만이 겪는 사후 단계의 고통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김 건은 이야기를 던지는데 성공했다. 이런 성공에 대한 평가치고는 야박한글이지만 전주에서 영화를 만드는‘감독 김 건’에게 위에 던진 상처의 말들에 다음의 말이 위로가 됐음 한다.영화를 극장에 걸기만 해도 위대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감독이 되지 못한 자 평론가가 된다는 것을. 또 바란다. 부디 교수되지 말고 감독으로 남길. 그래서 막걸리집 같이 흥이 있는, 가맥처럼 편안한, 전주의 말캉처럼단단한 그런 김 건의 차기작이 보고 싶다.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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