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 |
[명인명장] 판소리 고법 명인 이성근
관리자(2009-12-03 10:40:32)
판소리 고법 명인 이성근
목구녕이 나올 때까지는 갈칠라요!
이성근 장인 연보
1935년 정읍군 산외면 용모리에서 태어남
1958년 먹고 살기 위해 육군 8사단에 입대, 토벌작전 중 부상으로 제대함
1960년 전주의 국악원에서 몰래 소리공부를 시작
김동준 선생의 눈에 띄어 본격적으로 사사
이후 박녹주, 박봉술, 김준섭, 강도근 등에게 판소리 창법을 배웠으나 치아가 불량하여
고법으로 돌림. 고법은 김동준, 박귀성에게 사사
1970년대 국립창극단, 여성국극단, 여성농악단 등의 악사, 배우로 활동하며 우리 국악의 역사를
온몸으로 함께 해옴
1986년 전북도립국악원이 개원하면서 단원으로 입단, 이후 교수로 활동
1992년 지방무형문화재(제9-1호) 지정(판소리 고법)
2009년 현재 전북도립국악원 정년퇴임 후 인후동 자택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음
전쟁통과 함께 한 어린시절
정읍군 산외면 용모리라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농사지을 땅도 없어서 쪼그만헌 집에서 식당 같은 것을 했어요. 해방 후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디 해방 후부터 육이오 사변 나기 전에 다 거시기해 버렸죠 인자. 그때부터 인자 곤란을 많이 당했죠. 먹고 살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형제가 많았었는데홍역이다 뭐시다 해서 죽고 크다가 다 죽어부렀고 인자 동생 하나가 살아있죠.학교도 초등학교도 겨우 나왔어요. 그때는 육이오 치르니라고 초등학교 졸업하기도 힘든 판이었어요.산외면에서 살다가 신태인으로 나와갖고 거그서 학교를 대니다가 부모들이 부안으로 나왔어요. 먹고 살기가 복잡허니까 이리저리 이사 대니는 거요. 그라고부안에서 살다가 다시 신태인으로 나왔다가 거그에서 살면서 육이오를 만났죠.그때가 내가 열다섯 살이나 먹었을 거요.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나. 열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그랬을 거요. 육이오 겪고 나서 한국 군인들이 전진허고 올라가고 어쩌고 함선 한 3년 지나가지고 내가 만 열여덟 살이 되었어요. 그때도 배가고프고 집이 가난해서 집에 붙어있기가 힘들었어요. 부모들이 남의 일이나 좀 거들어주고 조금씩 얻어다 먹고 그런 때이니까. 그래서 내가 경찰 전투대대를 들어갔어요. 지원을 해서. 한 1년 거그서 복무했어요. 일단 거그 들어가면 나 먹는 것은 해결이 되니까.
먹고 살기 힘들어 자청한 군대생활
그러고 거그 있다가 정읍에서 내가 현역으로 사단 입대를 해버렸죠. 군대를 들어간 거요. 이왕 저기할 바에는 군대나 가야겠다, 그런 생각이었죠. 그래서 그냥지원해 버렸어요. 그때 내가 정읍 내장지서에서 근무를 허고 있었거등요. 그때우리 내장지서장이 신화춘 씨라고, 경사인데 그 분을 모시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8사단이 내려와서 (빨치산)토벌작전할 때 거그서 내가 사단 입대를 해버렸어요. 그래가지고 인자 머 저어그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순창 쌍치 복흥으로, 내장산 거시기로 안댕긴 데 없이 토벌허로 댕갰죠. 죽는 것도 수없이봤죠. 빨치산한티 기습당할 때도 있고. 현재 최전방에서 군인들 전투허는 거나 똑같애요. 오히려전방보다 더 무서운 디요. 회문산겉은 디, 구례겉은 디는.그때 8사단 16연대 연대장이 이존일 씨라고,부안 사시는 분인디 전라북도지사까지 한 분이죠. 그 양반이 우리 연대장으로 계셨어요. 나는16연대 직할 수색중대에 근무를 했었고. 중대본부 연락병도 허고 그랬어요. 그러고 있다가 인자여그서 전방에로 올라갔지요. 최전방 고지에서미군허고 우리허고 교체할 적에, 우리는 여그서토벌허고 올라가고 그럴 적에 인자 말허자면 진을 바꿨는데, 바꾸자마자 얼마 안 돼 갖고 우리 8사단 21연대가 포위를 당해부렀어. 인민군 중공군들헌테. 그래서 우리 부대가 합동작전을 해갖고 그 고지를 탈환허다가 내가 부상을 당해갖고병원으로 후송이 되었죠. 다리 하체 여그가 부러져갖고 덜렁거렸응게. 그래가지고 후송해서 결론은 대구 27 육군병원으로 가갖고 거그서 인자 제대를 했죠.그래도 그때 당시에는 위험했다 뿐이지 그다지힘든 것은 없었어요. 우리는 전투험서도 전방 막밀고 올라갈 적에는 참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근디, 우리가 만약 유사시에 후퇴헐 적에는 그때가 좀 위험허고 그랬죠. 그래도 목숨이 좀 저기헌다는 것뿐이지, 모든 군대 분위기랑은 그때가 사실은 참 좋았어요. 우리는 선배들이나 직속상관들한테 구타를 당한다거나 이런 거는 절대 없고,오히려 부하들을 더 사랑허고 얼매나 애꼈다고요. 긍게 중대장나 대대장이나 연대장이나 전부가 다 행여나 한 사람이도 목숨 저기헐깨비 무쟈게 직속상관들이 감싸고 그랬어요.
얻어먹다시피 했던 객지생활
그렇게 만 1년을 복무허고 부상당해갖고 바로 제대를 했어요. 제대헌후에 살아나간 일을 생각허믄 참… 말을 헐 수가 없죠. 부모도 계시지도않고…. 나가 군대있을 적에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어요, 1년 상관에. 나제대허고 막 나오자마자 일주일도 안 되아서 어머니 돌아가시고…. 인자사방간디 객지로 돌아댕기기도 허고, 서울 가서 취직할라니까 잘 안 되아서 얻어먹고 돌아 댕기다시피도 했고, 그랬죠. 서울에 있음선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꿀꿀이죽이라는 거, 참 그것 생각허면 지금 생각해도 그렇죠. 돈이 있을 적에는 사먹기도 하고 얻어먹기도 허고 그러고 지내다가 인자 전주로 내려왔어요. 그때 동생이 전주에 있었는데 우리 동생도혼자 고생을 많이 허다가 전주에 살고 있었는디 동생 볼라고 내려왔다가전주에 정착을 해버렸죠.내가 전주에 올 때가 한 스무 살이나 되았을 거요. 전주에서는 어떻게살았냐. 옛날에 중앙성당 앞에가 전북국악원이라는 곳이 있었는디 상당히 컸어요. 그라꼬 거그 국악원이 있을 적에 말허자면 지금 우리 선배되시는 분들, 정미옥 선생님으로, 저그 저 김유앵 선생님으로, 그 분들이선배들이에요. 그 분들이 그때 당시 국악원에서 공부허고 계실 적에 나도 인자 거그를 끼어들어가 갖고 소리를 배우게 됐죠.왜냐면 그 전부텀 나가 국악에 대한 소질이 많이 있었고, 아버지도 이런 예능, 국악쪽으로 활동을 했다고 봐야죠. 우리 아버님이 북을 잘 치셨대요. 한량으로. 북을 잘 치셔갖고 그 영향을 내가 많이 받었죠. 어렸을때부터 보고 듣고 그랬응게. 모다 소리꾼이 우리집에 와서 소리허고 그런 영향을 받아갖고 내 깜냥으로는 장단이 맞든 안 맞든 소리 몇 마디 같은 것은 저절로 할 정도가 되았었어요.
소리 도둑놈 들어왔다!
그런디 거그를 가보니까 자연적으로 나도 준비가 되고 그러니까 자꼬그리 귀가 기울어지는 거죠. 왔다갔다 허고 저기허다 보면은 국악원 뒷마루에 저녁이면 공부꾼들이 많이 와요. 한량들이 와서 북도 치고. 그래서 저녁이면 뒤에 툇마루에 있는 봉창 쪽으로 가서 앉아갖고 우리 동료급들이 공부헐 적에 허는 소리를 듣고 내가 단가 한마디를 배왔어요. 그전에 서너마디 허던 것은 장단도 안 맞았지만 인자 거그서 듣고 배운 그대로 허니까 이것은 장단이 맞는 거죠 잉.그러는 판인디, 누가 화장실에 가다가 내가 거그 컴컴헌 디 쭈그리고앉아 있응게로 인자 막 도둑놈 들어왔다고 소리를 치는 거요. 그때만 해도 신발 도둑놈들이 많았거든요. 구두 같은 걸 벗어놓지를 못해요 다 도둑질해 가 버리니까. 그때는신발장도 없을 때니까 마루 위에다 올려놓거나 아예 들고 들어가거나 그랬죠. 깜빡 잊고 신발 벗고들어가면 바로 와서 가져가 버리니까. 긍게 막 도둑놈 들어왔다고 나를 잡아갖고 안으로 들어가는 거요. 그때는 내가 사복도 없고 그러니까 제대복을 그대로 입고 모자에도 명예제대 빳지를 그대로 붙이고 있응게, 이 사람들이 가만히 봉게로 상이군인이거든? 그때만 해도 상이군인은 맘대로 못허는 거거든. 상이군인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들고 너 죽고 나 죽으면 그만이다 식이었응게. 긍게 상이군인들을 경찰관들도 맘대로 다루들 못했어요.긍게 야네들이 상이군인이 어찌 여그 와서 그러고 있냐고 물어봐. 그래서 내가 하도 국악 소리가좋아서 뒤에 앉아서 사실은 가르치는 것을 좀 듣고 배왔다고. 긍게 나보고 이거 헐 줄 아냐고 물어봐.헐 지는 몰라도 나가 많이 듣고 해서 장단은 안 맞아도 어느 정도는 헐 줄 안다고 그랬더니 그먼 어디한번 해보라고. 그래서 내가 인자 거그 선생이 갈친 소리를, 때마침 봄이로다는 사철가를 거그서 한반절 정도 소리를 헝게로 우리 선생(고 김동준 선생)이“어? 소리 허겄네? 목이랑 존디!”그러는 거요. 그래서 나보고 소리공부를 헐라면 먹고 잘 디가 있냐고 물어봐. 사실은 나 먹고 잘 디도 없고, 돈도 없다고. 여그서 얻어나 먹고 공부헐라면 몰라도 먹고 잘 디가 없다고 했죠. 솔직헌 얘기로 여그 뒤에 와서 좀 듣고 배와갖고, 어디 돌아댕김선 밥이라도 얻어먹을 요량으로 소리를 배왔다고 그렇게 말을 했죠.
소리로는 먹고 살기 힘들어…
그날은 인자 그렇게 허고 모다들 열한 시 첫 사이롱 불기 전에, 그때는통행금지 사이롱이 있었응게, 모다들 집으로 가는디, 나보고 어디로 갈라냐고 그래. 어디 암디라도 가서 자얀다고 그랬더니 그러믄 오늘 저녁에여그 학원서 집지키고 자라고 허드라고요. 그때는 여름이니까 거그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가만히 봉게로 방도 어질러져 있어서 내가 좀 씰고딱고 그랬더니 와서 봉게 깨끗허니 해놓고 있거든. 그렁게 그 회원들이이 사람을 여그서 공부를 갈치는 방향을 세워보자고 모다들 저기를 허드라고요. 그래서 한 며칠은 선생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거그서 자고 했더니, 그때 당시에 국악원 원장님이김희순 씨라는 어른인디, 그때만 해도 한 팔십이 되셨는디, 그 어른헌티 이야기를 해가지고 나 먹는 것을 그 집이서 해결을 허드라고요. 긍게 원장님이 너 집에 와서밥 먹고 학원에서 공부허고 학원 지키고 심부름 허고그럴 거냐고 그러기에, 하이고 뭐 더 이상 말 헐 것도없이“예! 헐랍니다!”그러고 얼른 받아들였죠.그래갖고 거그서 있음서 공부를 본격적으로 인자 시작을 했죠. 공부를 해놓고 봉게로 그때만 해도 모다들나를 볼 때 싹수도 있고 목도 좋고 소리도 어느정도 제법 허고 어찌고 헝게로, 국악원에 다니시던 그런 분들이 다 누님뻘인디, 그 분들이 용돈도주고 심부름 갔다 오면 잔돈도 주고 이렇게 얻어쓰고 어렵게 공부를 했죠, 불쌍허게.그렇게 한 3, 4년 공부를 허다 보니까 그때 당시에는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이것을 시작했는데 실상 해놓고 봉께 그것도 먹고 살기가 참 힘들드라고요. 소리를 아주 잘허는 사람이 아닌 이상먹고 살기가 힘들고 특히 남자들은 더더군다나힘들더라고요.
국립창극단으로 몰래 도망가다
그러는 판인디 그때 당시 우리나라 국창 박녹주 선생님이‘국극사’라는 창극단을 가지고 계셨는디, 전주 공연 올 때마다 나를 데려갈라고 그냥애를 썼어요. 나 소리허는 걸 보고 저놈 소리 가르치면 쓰것다, 그런 생각을 허셨나봐요. 그래서나를 데려갈라고 몇 번을 애를 썼는디, 우리 선생님이 안 놔주는 거죠.한 4년 동안 갈쳤는데 우리 선생님이 놔주겄어요? 당신도 당신 제자 맨들라고 욕심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인자 나가 선생님 몰르게 도망을 갔죠. 허허허.왜 몰르게 도망갔냐면, 박녹주 선생 남동생 되시는 분이 박만호 씨라고, 인자 명예는 박녹주 씨 명예지만 사실상 단장은 박만호 씨 그 냥반이었어요. 그 냥반이 마음대로 단체등록증도 가지고 있고 그랬어요. 경상도분들이라꼭말을이렇게했어요.“ 야, 성근아일마! 니소리공부헐라먼 우리 누님헌테 와서 해라고마! 울 누님 국창 아이가? 이왕 헐 바에는명예 있는 대 국창 선생님 한티서 공부를 해야지”해쌓고 어쩌고 어찌나그러는지, 거그에 내가 꼬임에 넘어가서 서울로 도망갔당게요. 그래갖고국극사로 가서 한 4년간 있음선 공부도 허도 못허고 그냥 단체 따라댕김서 저기허다가 결국은 거그서 연극만 배왔죠. 무대에 올라가서 연극을했으니까. 연출 선생헌테 연출받고, 작품 나오면 공연허고, 공연 허다가도 악사가 없으면 내려와서 악사도 허고, 그때만 해도 내가 북 장구를 그런대로 쳤으니까 무대에서 허는 공연장단 정도는 마음대로 헐 수 있었어요, 판소리가 아니기 따문에.
왔다갔다 허다봉게 세월이 가버렸죠
그래 인자 그렇게 험선 한 몇 년을 허송세월을 냄겨 버렸죠. 그러다가 다시 전주로 와서 공부를 또 했어요. 공부 해갖고 어느 정도 되면또 여그저그서 와갖고 바람을 넣는 거요. 단체를 맨드는 디 니가 필요헝게 좀 와야겄다, 해갖고 여그저그 가서 한 1년 있다가 오고, 저그 가서 한 1년 있다가 오고, 그렇게 왔다갔다 허다봉게 세월이 가버렸죠.나 먹는 것은 인자 안 굶었지. 여그저그서 서로 오라고 헝게. 밥 얻어먹고 공연해주고, 인자 공머슴만 사는 거지.그러고 댕기다가 나중에 혼합단체도 없어져 버리고 여성단체가 만들어졌어요. 여성 국극단이. 전주에 여성창극단이 생김서 그때부터는 여성창극단이 인기가 많았어요. 임춘앵 씨 허믄 몰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참 우리 대한민국 멋쟁이였어요. 그 냥반이 단체를 갖고 조금앵씨, 김영애 씨, 이런 분들이 저기허고 그때만 해도 여성국극단이 한 대여섯 개가 되았어요. 긍게 또 여그저그서 악사가 없으면 나를 데려갈라고 오는 거요. 우리 단체로 가자고. 그라꼬 인자 단체생활을 여성국극단에서 허다가 결국은 여성국극단도 해산돼 버렸어요.왜 해산되냐? 이 텔레비 나옴서 해산돼 버렸어요. 텔레비 나옴서 인자 이 단체가 사그리 없어져 버리는 거여. 사그리 없어지는디 그때 당시 여성농악단이 전주에 생겼어요. 여성농악단이 생기는 바람에 여성농악단 가서 사회도 보고 토막연극도 허고 소리도 허고 농악 끝나고나면 저기도 허고 그럼서 농악단에 한 2, 3년 허다가…. 남자는 진짜먹고 살기가 힘들더라고요. 국악을 해봐야.그래도 용케 내가 연극을 배와갖고 연극형식을 좀 알기 따문에, 약장사 무대가 생긴 거여. 약장사 무대가 생겼는디 처음에는 무대가 없었어요. 그냥 천막 치고 거그다가 평상 하나 갖다놓고 소리 한 대목씩토막연극을 했어요. 춘향모 어사또 만나는 장면 그런 거. 그런 걸 허다봉게로 약장사 허는 분들이 이렇게 허는 것보담도 무대를 맨들면 좋겄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무대가 생기기 시작했죠. 그라꼬 인자 약장사댕김서 그랬는디 나도 결혼을 허고 자녀도 생기고 그러니까 처자식 안굶길라면 약장사가 아니라 더헌것도 따라댕김서 벌어먹어야지 어쩔거예요?
도립국악원에 입단하다
그래서 거그를 오래 따라댕갰죠. 내가 전주에 완전히 정착헌 것은한 40대 초반? 40대 초반에 정착을 해갖고 옛날 소리공부 했던 것을찾아가면서 나대로 연구를 허면서 인자 공부를했죠. 그러다가 인자 전라북도 도립국악원이 생겼잖아요? 그래서 거기 도립국악단 상임단원으로 입단을 해갖고 국악단 생활을 했죠. 국악단에서 한 2, 3년 있다가 어떻게 해갖고 서울 국립창극단으로 갔어요. 우리 선생님(고 김동준)이 국립창극단 지정고수로 계셨는데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내가 거그로 스카웃 되았죠. 그래갖고 인자 국립창극단 고수로 가서한 6개월 있었나? 근디 여그 황병근 원장님이“아 이선생 전주로 내려와! 전주사람이 전주서활동하고 전주를 발전시켜야지, 왜 서울에 가있냐”고 나허고 약속했응게 빨리 전주로 내려오라고 막 명령을 해.그래서 나가 가만히 생각을 해봉게 내가 전라북도 사람인디 기왕이면 내가 전라북도에서 활동을 허고 발전을 시키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한 6개월 있다가 사표 내고 전주로 와버렸어요.그때만 해도 1년 계약제인데 국립극장에서 사표를 받아주나요? 그래서 내가 몸이 아파서 가야겄는디, 내가 죽어도 여그 있어야 하냐고, 그럼서 막 내려가야겄다고 허고 바로 전주로 내려와 버렸죠. 그때는 인자 국악원에 교수로 내려왔죠. 그래서 도립국악원에서 정년퇴임을 했어요. 그때 전주로 내려오자마자 지방문화재를 바로 받았고. 그때가 92년도예요. 92년도 5월20일.
목구녕이 나올 때까지 갈쳐야겠다
참말로 먹고 살기 힘들었는디 국악원 일 함서 쪼끔 나아졌어요. 많지는 않지만 월급 삼십몇 만원 나오는 걸로 살고 개인 과외도 하고 그럼서 그때부텀 쪼금 먹고 살만 해졌죠. 지금은돈 모아놓은 것은 없어도 누구한티 돈 빌려달라 소리는 않고 그럭저럭 안 굶고 살아요.지금은 제자 몇 사람 갈치고 있는디, 내가 다른 소리를 안 갈치고 적벽가를 내가 완창을 허니까 적벽가만저기를 허죠. 글고 열사가(이준, 안중근, 윤봉길) 공부를 좀 허고 싶다는 제자가 있어서 몇 사람 갈치고 있어요. 그라꼬 요즘 좀 바빠요. 그래도 나가 나이 더 먹기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가르쳐서 전수시켜놓고 그래야죠. 그래서 바빠도 그냥 허고 있어요.언제까지 헌다는 계획은 없지만 우리 제자들이 본인스스로 완벽허게 헌다 싶으면 그만 두는 거지, 뭐 더이상 헐 것 있어요? 제자들도 다른 디 가서 발전을 시켜야죠. 제자들도 기르고.긍게 나는 나한테 배울라고 허는 분들이 있기 따문에, 내가 원체 서럽게 공부를 허고 그랬기 따문에 내가엥간허먼 갈치는 데까지는 갈쳐봐야겄다, 그런 생각을해요. 목구녕이 나올 때까지는 갈쳐야겄다. 안 나오면인자 못 갈치는 거고. 힘 팡기고 기운 팡기면 못 갈치죠. 지금도 청이 아주 높은 사람들은 갈칠라면 힘들어요. 상하청으로 갈치다가도 상하청을 잘 못 받아들이고 허는 사람은 내가 질러줘야 허니까, 그런 디서 좀힘이 부치고…. 워낙 한 20년 가까이 앉어서만 소리를헝게로 골반이랑 다리가 워낙 안 좋아요. 걸으면 휘청휘청해.옛날에다 대면 지금은 국악인들이 거부장자가 돼버렸죠. 그때는 밥이라도 먹으면 다행이었는데. 그런 선배 분들이 그런 노고를 바쳤으니까 지금 우리 국악이이마만큼 발전이 되았고 유네스코에 등록까지 되았지않습니까? 선배님들이 그마만큼 고생을 허셨어요. 왜정 때 압박 받아가면서도 숨겨서 지켜갖고 있다가 발전을 시켰다는 게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에요. 그것을우리 후배들이 좀 알고 지켜갔으면 좋겠다 이거요. 사실 이렇게 지켜온 것이 기적이에요. 그것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