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 |
[신화이야기] 한국의 신화를 찾아서
관리자(2009-11-06 17:59:47)
남성적이고 여성적인‘콩’신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정인혁 전북대학교 인문한국 쌀·삶·문명 연구원, HK연구교수
‘어머니’란 단어만큼 듣기만 하여도 행복하고, 불러만 보아도 힘이 솟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나만의 경험을 독자 일반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심히 걱정스럽지만, 가장 듣기 싫었던 목소리 또한 엄마의‘일어나라, 밥 먹어라, 공부해라, 좀 씻어라, 시집가라’하는 잔소리가 아닐까 한다.잔소리를 들을 때면 혹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닐까, 진짜 엄마가 맞을까 의심하곤 했다.‘두 어머니’가 나오는 <문전본풀이>를 살펴보자.옛날 옛적에 남선비와 여산부인은 일곱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남선비는 생계를 위해배를 타고 쌀을 팔러 나갔다. 쌀을 팔던 남선비는 오동나라에서 노일제대귀일의 딸을 만나게 되었다.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남선비를 자기 남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남선비는 노일제대귀일 딸의 꼬임에 빠져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눈까지 멀어 노일제대귀일의 딸과 함께 살게 되었다.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갔지만 남편으로부터는 소식 한 통이 없었다. 남편을 기다리던 여산부인은 남편을 찾아 나섰다. 노일제대귀일 딸의 집에서 여산부인은 어렵게 남편을 만나게되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아니었다.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여산부인에게 날씨도 더운데 목욕이나 하자고 하였다. 여산부인은 의심치 않았다.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여산부인을 물에 빠뜨려 죽인다.노일제대귀일의 딸은 여산부인도 없어진 터에 남선비의 본가 재산까지 탐이 났다.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여산부인인 척하며 남선비의 집으로 갔다. 일곱 아들은 오랜만에 부모님이돌아와서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일곱째 아들은 어머니가 가짜일 것이라고 의심한다. 선창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머니는 이쪽저쪽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날부터 일곱 아들은 어머니가 어디 계실까 근심하기 바쁘다.이를 눈치 챈 노일제대귀일의 딸, 일곱 아들을 죽이고자 꾀병을 부리고 남선비에게 자신의 병을 낫기 위한 점괘를 얻어달라고 부탁한다. 남선비가 점쟁이를 찾아가는 길, 그에 앞서노일제대귀일의 딸이 그곳에 가 앉았다. 찾아온 남선비에게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점쟁이를흉내 내어 일곱 아들의 간을 먹어야만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아들 일곱을 잡을 칼을 가는 남선비, 이를 알게 된 일곱 아들은고민에 빠지는데, 저승가신 여산부인이 꿈에 나타나 일러준 대로산에 올라 멧돼지 새끼의 간을 내어 자신들의 간이라며 노일제대귀일의 딸에게 내어준다.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먹는 척하다가 버린다.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일곱째 아들이 달려들어 노일제대귀일 딸의 거짓을 온 동네에 알리고 일제히 달려드니, 남선비는달아나다 문 앞에 가서 죽어 문전신이 되었고,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변소에서 목을 매어 측신이 된다.일곱 아들은 어머니 복수를 하느라고 노일제대귀일 딸의 두 다리를 잘라 변소 디딤판을 만들고, 머리는 돼지먹이통으로 만들었다. 머리털을 잘라 바다에 던지니 해초가 되고. 입을 잘라 바다에던지니 솔치가 되었으며, 손톱, 발톱은 잘라버리니 딱지조개가 되었다. 배꼽은 굼벵이, 항문은 대전복, 소전복이 되었으며, 육신은빻아서 뿌리니 각다귀와 모기가 되었다.일곱 아들은 서천꽃밭 황세곤간에게 도환생꽃을 부탁하여 얻고오동나라 주천강가에서 하늘에 비니, 여산부인이 떠오른다. 일곱아들은 어머니를 살리고 사철 물 속 추운 곳에서 고생하셨으니 따뜻한 아궁이 위에서 삼세번 드시라며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이 되게 하였다. 일곱 아들은 동서남북 안과 밖 일곱 문의 신이 되었다.<문전본풀이>의 무섭고 나쁜 엄마는 물론 진짜 어머니가아니다. 그저 악한 마음을 먹고 어머니인 척 한 노일제대귀일의 딸일 뿐이다. 일종의 못된 계모이다. 그러므로 엄마가구박한다고 해서 혹시 계모가 아닐까,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가 아닐까, 의심하지 말자. 그것은 사실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를 걱정하셔서 하시는 말씀이리라.다만, 이렇게 이 이야기는 악한 인물 노일제대귀일의 딸에대한 장치를 통해 악한 것을 멀리하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노일제대귀일 딸의 죽은 몸이 온갖 각다귀(곤충)와 해충인 모기가 되었다는 것은 악한 것에대한 거부감이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그녀가 그와함께 우리가 먹는 것, 해초나 전복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나 죽은 그녀가 집 안에서 가장 불결한 곳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배설의 장소, 곧 화장실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은 악한 것은 곧 부정하고 해로운 것이기에반드시 배제되어야만 한다는 것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어찌 보면 악한 존재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살아가기 위해 먹는 것만큼이나중요한 배설의 일을 관장하는 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는 모순적인 상황은 신화가 갖고 있는, 이성으로는 규정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세상 만물은상반되는 두 가지 성격으로 구성되며 이 두 성격은 서로 떼어놓기 어렵다는 양의성을 갖고 있는 것이 신화이다.신화는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이성적 사고방식과 다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현대인들이 이성에 입각하여 이분법적논리로 대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과 달리, 신화는 감각적인 사실과 추상적인 개념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서 이해한다. 꽃과 바위라는 감각적인 사실에 대해 꽃은 봄에 화려한자태를 뽐내지만 곧 시들고 마는 유한성을 갖고 있지만 바위는 눈에 띠지 않지만 언제고 그 자리를 지키는 무한성을 갖는다. 하지만 꽃이 바위에 비해 유한성을 갖는다고 바위만못한 것이 아니며 눈에 띠지 않는 바위가 무한성을 갖기에꽃보다 낫다고 이해하지 않는다. 꽃이 유한한 것은 꽃이기에그러한 것이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며 바위 또한 눈에띠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신화시대의 모든 것은 현재인에게 있어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이더라도 세속적인 것이라 성스럽지못한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것도 성스러운것도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요소들인 것일 뿐이다. 더나은 것도, 못한 것도 없다. 세속적인 세계와 신성한 세계는분리되지 않았고 세속적인 것이라 나쁜 것도 성스러운 것이라 좋은 것도 아니다. 이성과 감각, 사실과 개념, 합리와 불합리로 나뉘어져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고려하며 관계의 총체 속에서 실현되는 합리성, 그것이 신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그렇기에 현대 서양 철학의 정초를 놓았던 피타고라스는애매모호한 것, 양의적인 것을 혐오했다. 특히 피타고라스는그 학파의 모든 사람들이 콩을 먹지 못하도록 했다. 콩은 남성에게 있어서 가장 여성적인 부분, 곧 숨어있고 부드러우며생명을 생산하는 고환에 해당한다. 동시에 여성에게 있어서는 가장 남성적인 부분, 곧 밖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단단해지는 음핵에 해당한다.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이고 여성적이면서 남성적인 콩은 그 성격이 모호하고 양의적인 것이다.개념적으로 오로지 순수한 것만을 추구했던 피타고라스는이러한 콩을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세계의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관계를 중재하는 양의적인 것을 주로 사용한다.줄다리기를 생각해보자. 어릴 적 운동장에서 청군, 백군모자를 쓰고 양쪽으로 늘어선 아이들은 선생님과 아이들의응원 소리에 맞춰 이를 악물고 줄을 당긴다. 가운데 표시한끈이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 줄을 당긴 아이들은 환호성을 울리며 승리에 감격한다.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전통 줄다리기가 아니다. 우리의 줄다리기는 누군가의 승리와누군가의 패배를 가르는 줄다리기가 아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우반동의 우리 줄다리기 장으로 가보자.직경이 1m나 되는 줄을 수십 미터 길이로 두 개 만든다. 하나는 암줄이고 하나는 수줄이다. 암줄과수줄은 줄다리기에 앞서 각각 여성들, 미혼의 남성들과 기혼의 남성들이 어깨에 멘다. 마을 곳곳을 다녀온 두 줄은 마을 한복판에서 만나 서로 인사한다. 암줄은 수줄이 인사를 제대로 해야 받아준다. 신랑인수줄이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암줄은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줄다리기도 진행되지 않는다. 이러한실랑이가 길면 여러 시간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새침한 암줄이 수줄의 정중한 인사를 받아들이고 나면 암줄과 수줄을 연결한다. 암줄의 끝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어 뾰족하게 끝을 다듬은 수줄을받아들인다. 암줄의 고리를 통과한 수줄의 끝에 나무를 꽂아 빠지지 않게 한다. 줄다리기 준비가 끝이난다. 이윽고 시합이 시작되는데, 삼세번을 하여 두 번 먼저 이기는 쪽이 승자가 된다. 아무래도 암줄편이 장성들로만 구성된 수줄을 이길 리 만무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세 번 중의 두 번은 암줄이 이긴다. 그러면 놀랍게도 풍년이 온다. 해마다 승리는 암줄의 것이고 해마다 풍년이 온다.줄다리기, 그것은 양편으로 나뉜 두 힘의 세기를 겨루는 것이다. 하지만 두 힘은 서로의 힘자랑을 하기 위해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성하는 두 힘이 얼키설키 얽히는 데에 의미가 있다. 누가 이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두 힘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내일을 열어간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그리 쉽지 않다. 두 힘은 서로 상반되기도 하여언제나 티격태격한다. 새침한 암줄과 완력의 수줄은 그렇게 맞서지만 하나가 되고, 조화를 이룬다. 남자와 여자가, 연로한 자와 어린 자가 그렇게 하나가 되어 티격태격 새로운 내일의 마을을이룬다.시합이 끝나면 당산 입히기라는 절차가 있는데 이것을 마을 사람들은 제전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여긴다. ‘당산(堂山) 입히기’란 줄다리기에 사용했던 줄을 가져다가 당산목(堂山木)에 감는 것을 말한다. 이 행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서 농악대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는 것으로 밤을 보낸다. 줄다리기에서 줄을 당산나무에 감는‘당산 입히기’는 바로 여신인당산신과 줄로 표현된 남신과의 혼례를 의미한다. 당산신은 곧 지모신이고 농경생산신이다. 줄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이는 나무의 싹으로 상징된다. 남성과 여성이 만나 싹을 틔우는 것이다. 땅 속에 파묻힌 씨앗으로부터 나무가 성장한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위로 새가 날아와 앉는다. 새는 열매를 먹고 씨를 배설한다. 그리고 그위에 죽어 씨의 발화를 돕는다. 씨앗은 다시 싹을 틔우고 나무가 되어새가 깃들게 가지를 내어준다. 이것이 바로 만물의 생명권에서 이루어지는 순환의 시간이다. 신화는 바로 이러한 순환과 반복을 이야기한다.이러한 순환과 반복의 리듬을 따라가면 일 년의 시작과 끝에 거행되는민속의 축제들과 만난다. 줄다리기는 그 중 하나이다. 그 축제들의 기본목표는 바로 갱생(更生)이다. ‘고쳐 사는 것’(경생更生)이 아니라‘다시사는 것’갱생(更生)이다. 내가 주인이 되어 나의 삶을 개발하기 위해 타인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나를 둘러싼 원초적인 조화와통합의 질서를 회복하여 다시 사는 것, 그것이 목표인 것이다.과학적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이성과 합리성을기반으로 한 국가체제 또는 법이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여긴다. 이들에게 신 또한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신은 인간 역사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철학과 과학을 선택하는 대신에 신과 신화를 추방하게 된 것이다. 신화학자 엘리아데는 이러한 인간 중심, 이성 중심의 정신이 20세기에 이미한계와 위기에 봉착했다고 진단했다. 왜냐하면 과학으로 대표되는 이성에 편향된 시각으로는 더 이상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또 다른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과 과학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도 때로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신화가 실재적인 해결책을 알려줄 때가 있다. 이성과 합리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경험’을 해본적이 없는가. 때로는 과학적인 설명을 수반하는 어떤 이야기보다 신화처럼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더 진실한 사실로 여겨진다. 이는 신화의 설명 방식이 실제 이야기의 참 모습을 보다 깊이 드러내어 주고 보다 풍부한 의미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대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이성을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인간이 오늘날 이루어온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진리 발견의 방식에 더하여 우리 선조들이지녔던 감각적인 방식, 곧 신화적인 사고방식을 회복한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더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