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 |
[내 인생의 멘토] 사진가 정주하
관리자(2009-11-06 17:58:40)
사진가 정주하-윤광인 선배와 스승 한정식
부정(不貞)의 정(貞)
정주하 사진가,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불현듯, 새삼스레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암담하던, 그러면서도 아무런 삶의 긴장이 없던 그런 때였다. 1973년에 입학하여 1976년 2월에 졸업을 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거즘 반 삼십 오 년 전의 일이다.
당시 특별한 재능도 없고, 또 학교생활에서도 뛰어난 면을가지지 못한 여느 학생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옅은 안개처럼 주변을 감싸고 있을뿐이었다. 몸속에서 요동치는 호르몬은 흐트러진 모습으로밖을 향해 비쭉거리고, 잘 알지 못하는 지적 호기심에 무슨책이든 멋 삼아 읽던 그런 시절이었다. 사회적으로는 그래도문학이 우선시되던 시절인지라가난했으나 주변에 책은 있었고, 시내 한 귀퉁이에는 반드시몇 개의 중고 책 서점이 성업 중이었다. ‘헌책방 순례’라는 용어가 있었으며, 드물게는 소설에 감동하여 자살했다는 어느문학소녀의 이야기가 전설처럼떠돌기도 했다.내 몫의 삶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흐르는 시간에 전부를 맡긴 채 막연한 기대를 해야 할 뿐이었다. 투철한 사회의식도 없었고, 완전히 비켜나 자신 안에 몰입도 못하는 그런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나는 사진가로 그리고 사진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고 있다.매우 당연한 듯한 지금의 모습도 과거의 나에 포개어 보면어불성설이다. 내게 있던 단 한 가지 긍정(?)적인 면이란 그저 소설책 읽는 것을 멋으로 아는 것이었다. 수업시간에도공부보다는 소설책을 읽으며 보냈으며, 방과 후나 휴일에는자주 헌책방을 기웃기웃 서성이며 보냈다. 친구 둘과 함께가출을 했었던 때에도 그 행위가 주는 어떤 의미보다는, 소설 속에서 읽었던 비슷한 장면이 나를 더욱 실감이 나게 하였던 듯하다. 물론 결과는 참담했지만 말이다.이렇게 지내던 사이에 사진이 끼어들었다. 윤광인이라는학교선배가 제물포역 어귀에서 사진 현상소(소위‘DP&E’점)를 운영하며 오가는 후배들을 유혹하였다. 적어도 사진의저변 확대가 없이는 자신의 직업이 존재할 수 없으니 당연한일일 터이다. 그는 온화한 품성을 지녔으며, 당시에 이미촉망받는 아마추어 작가였다.적어도 인천에서는 말이다. 우리와 만나기 직전에 경기도에서 주최하는 콘테스트(당시 우리는‘경기도전’이라고 불렀다)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세목(細目)회라는 사진동호회에 주요멤버이기도 했다. 그는우리(이 때 우리라 함은 지금까지 사진가로 남아있는 최광호와 나를 지칭한다)에게 학교에 사진반을 만들라고 교사(敎師)하였으며, 우리는 그의 교지(校誌)에 따라 다섯 명으로 구성된‘선인고등학교 독수리 사진반’을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한 사진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나의 직업이 되었으며, 동시에내 삶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이때 만났던 윤광인 형이 지금 내 인생의 멘토를 이야기하는데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내 사진의 시작이어서그렇기도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사진이 그를 제일 먼저 배반하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사진술(Photography)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에게는‘당시’의 한계가 있었다. 나는 그가 취한 사진제작방식(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의미로써)을 격렬하게 비판했으며, 그 역시 내게사진(Photograph)을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사진술을 전달하는 것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나아가 나에게 사진에 대해혹은 삶에 대해 강제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긍정할 뿐이었다. 그가 내게 준 것은 그래서 빈 세계이지만, 나는 그 빈 세계 안에서 나를 그릴 수 있었다. 물론 당시에 내가 그린 세계란 반항과 거절 그리고 거친 사유의 찌꺼기일 뿐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부여잡고 방황함으로써 파멸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그를 배반하며 일구어 온 내 사진이기에 지금 멘토를 말하면서 집어야 하는 제일 중요한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그리고, 사진을 좀 더 진지하게받아들이면서 내가 얻은 멘토는은사님인 한정식 선생님이다. 대학 때 사귄(?) 분이다. 내가 군에서 제대한 이듬해인 1982년에 중앙대학교 사진과에 입학을했을 때, 선생님께서는 신구전문학교에서 중앙대학교로 이적하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동창생인 셈이다. 나는 학생으로, 선생님은 교수로 말이다. 선생님과의 인연 또한 나의 반항심과 교만함으로 굴곡이 좀 있다. 부드러운 품성을 가진선생님인지라 늘 나를 품어주셨지만, 나는 오히려 도망을 다녔으며 부정하려 애썼다. 이유는 있다.사실 나는 아직도 선생님의 사진관(觀)이나 제작방식을받아들이지 않는다. 게다가 세계/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더욱이나 다르다. 특히 정치적인 관점은 너무도 달라 때로는 격렬하게 논쟁을 벌일 때도 있다. 그분의 삶의 여정이 나와는 많이 다를 뿐만 아니라, 지금의 위치도 무척이나 다르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서 반사되어 오는 빛의 깔도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에는 그러한 선생님의 빛깔을 지우려 해 보기도 하고, 또 가려보려고도 했다. 그분 역시 내게 같은 요청을 했다. 내가 가진 색깔에 선생님의 마음을 덧칠하시려 무던히도 애쓰셨지만 결국은 실패하셨다. 나도 실패했고. 이 갈등의 구조 속에서 생긴 그 더께는 하지만 매우 두터운 우정과 같아 서로 인정하는포옹으로 변환되었다. 내가 무엇을 하던 그분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걱정을 해주시며 나는 그의건강에 더 큰 관심을 둔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서 멘토란 어쩜부정(不貞)의 정(貞)이 아닌가 싶다.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받아들이는 형국 말이다.불현듯, 긴 시간이 주마등처럼스치고 지나가면서 고마운 사람들이 마구 생각난다. 철없이 풋기를 드러내며 나대던 시절,그런 나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받아들여 준 여러 고마운 분들이다. 어쩌면 좋을까? 벌써 세월은 내 머리를 온통 백색으로만들어 버렸고, 늘 조준하며 째려보던 과녁은 그만 내 앞에바싹 다가오고 말았다. 능숙하고 속 깊은 처신으로 세상을대해야 하거늘 여전히 어리석은 모습이 달에 비친다. 이 글쓰라고 한 사람, 내게 술 한잔 사소.
정주하 독일 퀼른대학교 자유예술대학 사진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현재 백제예술대학 사진과의 교수로 재임 중이다. 저서로는 1999년에 발간한『땅의 소리』가 있다.